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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동, 민중의 한과 성령론으로 서구신학을 넘어서다

기사승인 2018.02.18  23: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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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만난 서남동 목사 ⑦

내가 죽재 서남동 교수님을 만난 것은 강의실에서였다. 70년대 초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시절 나는 서 교수님의 강의를 신청했다. “서구신학의 안테나”로 알려진 그를 통하여 최근 현대신학의 흐름을 읽기 위해서였다. 나타난 모습은 1미터의 막대기에 똘똘 말린 묵직한 차트 덩어리였다. (당시에는 빔프로젝트나 파워포인트와 같은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커다란 종이 위에 매직펜으로 손수 쓴 그림표를 사용했다.)

서남동, 우주진화의 종점을 탐구하다

그는 한 학기 강의진행 내용을 설명한 후, 차트를 개봉하고 강의를 시작했다. 진행되는 것은 한마디로 ‘생물학’ 강의였다. 차트에 그려진 도표는 지구생성에서부터 생명의 발생, 번식 등을 거쳐 인간출현의 생물학적 진화과정을 그린 것들이었다. 내게는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종합대학에서 생물학 강의를 왜 신학과 교수에게 들어야 하지? 이건 신학이 아니잖아? 이런 의문이 앞섰기 때문이다.

물론 강의가 진행되면서 이해하게 되었지만, 이것이 우주진화의 종점으로서 인간의 모든 힘이 집중, 수렴되는 오메가 포인트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이것을 신학화하는 과정으로서의 서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그는 떼이야르 드 샤르댕에 심취되어 있었다. 또 그는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나이에 샤르댕의 원서를 읽기 위해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겐 참으로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다음으로 죽재 선생님을 만난 것은 1984년 그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기 전 짧은 기간 동안 독일을 방문한 적이 있으신데, 이때 우리집에서였다. 나는 선생님이 독일에 오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저희 집에 오실 것을 요청했다. 보통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강연이나 설교 혹은 좌담회를 마련하여 한국의 소식을 전해 듣곤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짜여진 일정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으셨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피곤한 몸을 쉬던가, 한잠 자던가, 연락할 곳에 전화를 하던가, 밀린 원고를 쓰곤 했다, 좀더 에너지가 남아있는 분은 거리구경을 함께 나가곤 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우리집에 오셔서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민중신학에 대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말씀은 아주 진지했고, 선생님은 쉼이 없이 말씀을 이어가셨다. 점심 때 오셔서 저녁 드시고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나 혼자서 그 귀한 강의를 독청한 셈이다.

간간이 우리 집사람이 동석하기는 했지만. 아! 그 때의 열정,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그 정열. 30여년이 지난 오늘도 그 독대의 자리를 잊을 수 없다. 아쉬웠던 것은 듣고 있는 내 자신이 민중신학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었다는 것. 그리하여 선생님의 번득이는 상상력과 날카로운 예민성을 소화하지 못한 점이다. 유럽 투어를 마치고 선생님은 북아메리카를 거쳐 귀국하셔서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이 소식은 정말 충격이었다. 그만큼 기억이 생생하였기 때문이다.

서남동, 민중의 한과 성령론으로 서구신학을 넘어서다

내가 선생님을 더욱 가까이 접할 수 있었던 기회는 목회를 마치고 학위논문을 쓰면서 선생님의 글을 탐독할 때였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에게서 다른 신학자와는 차별되는 어떤 독창적인 것을 발견하면서이다. 그의 성령론과 민중의 한(恨)에 대한 논고는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가 성서를 참고서로 규정한 것이나, 그 대신 성령의 직접적 계시를 강조한 것은 기독교 정통주의 전통과 텍스트를 신앙하는 성서 문자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거부이기도 했다.

고난의 현장에 개입하는 하느님의 음성으로서 성령의 임재는 객관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관적 경험이다. 신과 나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계시와 인식”의 틀에서 체험할 수 있다. 각자는 이 성령의 체험을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일치하는가 반추해 봄으로 자신의 경험을 객관화 하고 자기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이같은 성령론은 선생님의 삶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선생님께서 초안하기도 하고 참여하셨던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1973), “3.1 구국선언”(1976)은 한국 민족과 민중의 고난 속에서 직접적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인지한 교수님의 신앙고백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선생님께서 민중의 내면을 “한”(恨)으로 특징짓고 신학화한 작업 또한 매우 독창적이며 나에게 매우 매력적이었다. 한은 한국 민중이 공유한 것으로서 역사적으로 축척된 감정이다. 그는 이것을 심리학의 용어를 빌려 원초적인 근원(Archetypus)으로 표현하며, 민족사 속에서 해방의 힘으로 분출되는 원형으로 보고 있다. 그의 한에 대한 해석은 정신분석학자 C. G. 융의 “집단적 무의식”(das kollektive Unbebußte)을 연상케 한다.

융에게 이것은 심층 깊은 내면에 깔려있으면서 인간의 본래적인 자기실현(Selbstverwirklichung)의 동인으로 작용한다. 나는 서 교수님께서 제기한 한의 문제를 심리학적인 접근을 통하여 더욱 심화 발전시키지 못한 아쉬움을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게 있어서 죽재 서남동은 제어할 수 없이 자유하고, 방방 뛰는 열정과 상상의 소유자로 남아 있다.

박명철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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