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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과 황금률

기사승인 2017.12.14  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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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칭의복음(稱義福音)과 큐(Q)의 사회복음(social Gospel) 사이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7:12; 표준새번역)

Treat others as you want them to treat you. This is what the Law and the Prophets are all about.(matthew7:12; CEV)

(1)

한국에서는 도시나 시골, 어디를 가나 십자가가 쉽게 눈에 띄지요. 교회의 숫자가 편의점보다 많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세계 대형교회 50개 중 절반이 한국에 있고요, 우리는 기독교인 천만 명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전 국민의 1/4이 기독교인인 셈이지요. 명실 공히 한국은 기독교 국가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기독교 교세가 확장되고 기독교이느이 수가 늘어날수록, 그에 비례하여 사회는 맑고 투명하고 정의로워야 정상일 것입니다. 허나,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고, 부패지수는 상대적으로 높아졌습니다.

한편으로는 돈, 섹스, 세습 스캔들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패한 권력을 옹호하는 적폐세력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대형교회들의 민낯입니다. 십자가는 서 있되, 막상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십자가의 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아이러니이기도 하지요.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자기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그 분의 삶과 가르침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사회의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과 어울렸고, 어떤 사람들의 권익(權益)을 대변했는가? 그는 어떻게 살았고,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그가 이루고자했던 세상은 무엇이었는가? 예수의 인격과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는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2)

예수가 공생활(公生活)을 시작하면서 품었던 원(願)은 무엇인가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모신 존재이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었어요.(마3:13-17Q)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위에서 ‘하늘 아버지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마6:10Q; 마7:21Q) 빈부귀천을 떠나 모든 인간이 사람답게 사는 홍익(弘益) 세상을 여는 것이고요, 성령 법인 양심이 발현(發現)된 세상, 곧 자비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세운 이러한 원(願)은 하나님나라 운동에 집약되어 있지요.

헌데, 작금 한국교회의 실상은 어떤가요? 하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예수의 원(願)을 찾아보기 힘들지요. 개(個)교회 이기주의와 번영신학 그리고 성장이데올로기에 빠져 맘몬교(敎)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교회와 예수 사이의 괴리(乖離)에 한국 기독교의 근본 문제가 있지요.

금년이 종교개혁 500주년입니다. 당시 부패한 가톨릭의 개혁에 불을 지폈다는 점에서 루터 개혁신앙의 시대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루터는 개혁신앙의 원형을 역사적 예수가 아닌 바울의 칭의론에서 찾았지요. “오직 믿음(sola fide)”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교의(敎義)가 그것인데요.(롬3:28)

루터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오직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지요. 이는 땅위에서 하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겠다는 예수의 구원관과 사뭇 다르지요.

(3)

바울은 예수와 동시대 인물이었습니다. 아마도 서너 살 연하(年下)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스데반이 처형당할 때, 바울은 그 자리에 있었어요.(행7:58)  십자가 사건 외에 예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바울이 고백하는데요.(고전2:2) 아마도 그는 역사의 실존인물 예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바울은 환상 가운데서 만난 부활의 예수를 복음의 근거로 삼고 있지요.(롬1:4; 행9:1-5)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어떤 시각에서 받아들였나요? ‘우리 죄를 위한(hyper ton hamartion hemon)’ 대속(代贖)사건으로 받아들였어요.(고전15:3-5)  아마도 이는 예루살렘 교회 신앙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입니다.

큐(Q)는 어떤가요? 예수의 죽음을 사회적 불의에 항거하다가 순교(殉敎)당한 예언자들의 맥락에서 받아들이고 있어요.(눅13:34Q) 일종의 사회적 스캔들로 이해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정의는 희생자 중심입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희생자 가운데 한 분이셨기 때문이지요. 큐(Q)는 희생자들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얼굴을 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희생자의 칭의(justification)가 가해자의 칭의(justification)에 우선하지요. 가해자를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것은 희생자의 존재론적 특권(特權)입니다. 하나님은 희생자 편에 서 계시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어디에서 하나님의 현존(現存)을 만나야 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큐(Q)의 답변입니다.

큐(Q)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기억(historical memory)을 담고 있다면, 바울은 이를 대속(代贖)사건으로 재해석한 것이지요. 예수 죽음의 역사적 뿌리가 잘려나가고, 이차적인 신앙고백(secondary confession of faith) 사건으로 추상화된 것입니다.

루터는 바울의 대속(代贖)신앙을 극단화시켰습니다. 루터의 이신칭의(以信稱義)론 배경에는 어거스틴의 원죄론(original sin)이 깔려있는데요. 원죄론은 생물학적인 유전(遺傳) 개념과 사회학적인 법(法) 개념이 결합된 것인데요. 애초부터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개념이지요.

죄(hamartia)는 정상에서 벗어난 상태를 일컫지요. 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기 마련인데요.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의 인권을 회복시켜주는 것은 사회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해 필요하지요. 기원전 18세기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아야 된다는 규정이 나옵니다. 이러한 탈리온 법(lex talionis)은 이스라엘 사회를 지탱하는 율법의 근거가 되고 있지요.(참조, 출21:23-25; 레24:17-21; 신9:21). 재판은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지요.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지요.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루터의 이신칭의론(以信稱義論)은 어떤가요?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관점에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구원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지요. 가해자와 희생자를 구분하지 않고, 죄의 경중(輕重)을 따지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믿기만 하면 피 같이 붉은 죄가 눈같이 희게 된다는 논리에 서있지요. 결과적으로 루터는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베푸는 구원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가해자들의 구원은 말하되, 바로 그들에 의해 수탈과 착취당한 희생자들의 치유나 인권회복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지요. 사회정의(social justice)가 결여되어 있는 가해자 중심의 구원론입니다. 이는 오늘날 루터의 후예인 한국 개신교의 한계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4)

큐(Q)복음이 전하는 예수 설교의 주요 상대는 누구인가요? 가해자들이 아니지요. 희생자들입니다. 하루끼니를 위해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눅11:3-4Q), 가난하고 배고프고 박해받는 사람들,(눅6:20-21Q) 지체장애인들이었지요.(눅7:22Q)

예수는 그들이야말로 하나님나라의 수혜자(受惠者)요 축복의 주체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날 심판관으로 오신 사람의 아들은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들, 곧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희생자들과 자기를 동일시하지요.(마25:31-46)

희생자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그들의 동반자(partner)로써 사는데서 큐(Q) 예수의 특징이 드러나지요. 인간다운 삶을 상실한 희생자들의 인권회복과 정의실현이야말로 하나님나라 운동의 선결(先決)과제였어요. 희생자의 치유나 인권회복을 우회(迂廻)한 가해자의 용서나 구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큐(Q) 예수의 기본입장이었어요.

큐(Q)는 하나님의 공정하심(正義)를 무엇에 비유하고 있나요? 자연의 운행(運行) 이치를 들어 설명하지요. 하나님은 태양을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에게 골고루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태양이 뜨고 비가 촉촉이 내리면 어찌 되나요? 우주만물이 소생(蘇生)하지요. 뭇 생명을 소생시키는 자연의 공의(公義)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태양이 뜨고 비가 내리고, 낮과 밤, 음과 양이 교차하고, 춘하추동이 돌아가는 자연법에 순응하는 삶에서 큐(Q)는 하나님 공의(公義)의 원초적 체험을 하게 되지요.

노자에 따르면, 사람은 땅을 본받고(人法地),  땅은 하늘을 본받고(地法天), 하늘은 도를 본받고(天法道)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고 했습니다.(노자25장)

노자와 큐(Q)의 예수는 태양이 뜨고 비가 내리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우주만물이 태어나고, 자라고, 수렴하고, 씨앗을 맺는 생장수장(生長收藏)의 과정 속에서 자연의 공의로움을 보고 하나님의 공의를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正義)가 인간세(人間世)에서는 실정법(實定法)으로 나타나지요. 실정법은 양심에 기초하고 있으며, 양심은 자연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 화면(畵面)에 양심이라는 프로그램을 태어날 때부터 깔아놓으셨습니다.

양심이 발동하면 어떻게 되나요? 불행한 사람을 만나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惻隱之心)이 일어나지요. 불의한 일을 보면 분노의 마음(羞惡之心)가 생깁니다. 양보하는 마음(辭讓之心)이 생기고, 선악과 시비를 판당한 수 있는 지혜(是非之心)가 생깁니다. 이를 맹자는 양심(인의예지)의 4가지 단서(端緖)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양심법이 큐(Q)의 예수에서는 황금률로 나타나지요.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의 골자이다.”(마7:12Q) 예수와 동시대 유대교 랍삐인 힐렐은 “내가 당해서 싫은 것 남에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개체(個體)로 살다가 모여 더불어 살게 되면서 서로의 욕심이 충돌하고, 갈등과 다툼이 생기기 마련인데요.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보편적인 해법이 양심이고 황금률입니다. 인간 안에 계신 성령은 황금률을 통해서 작동하게 되지요. 황금률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운행하는 우주공식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는 황금률의 실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 교회, 공동체, 사회, 지구촌의 모든 문제는 황금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내가 당해서 싫은 일 남한 테 하지 않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내가 먼저 해 주는 황금률의 실천이야말로 인류가 살 길입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으로써 큐(Q)의 예수는 ‘하나님 공경’과 ‘이웃사랑’계명을 들고 있습니다.(마22:34-40Q) 이 두 계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황금률이 되지요.  나와 내 존재의 근원을 둘이 아닌 하나의 관계로 보는 것이 하나님 공경이라면, 나와 나 아닌 것을 둘이 아닌 하나의 관계로 보는 것이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선교의 근본 문제점은 어디에서 발견되나요? 오직 루터의 칭의론(稱義論)에 국한시켜 복음의 정체성을 찾은데 있지요. 이제 한국교회는 역사의 예수에게로 돌아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건설을 선교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루터의 칭의복음(稱義福音)과 큐(Q)의 사회복음(social Gospel) 사이의 균형과 조화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해가야 할 것입니다.

김명수 kmsi1204@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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