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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사회적 복종’과 ‘기계적 예속’ 속 헤게모니와 반변증법 전략

기사승인 2017.08.01  13:4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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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학 목사의 <문화로 본 성서>

<영화 포스터>

1. 영화 <군함도>

<군함도(The Battleship Island), 2017>의 첫 장면은 1944년 11월 일제강점기, 군함도에서 탈출하는 아이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곧 잡히는데, 일본 군인들은 그물을 던져 아이들을 바다에서 익사시켜 죽이고, 시체를 군함도로 가져간다. 포상을 받는 것이다. 
 
장면은 바뀌어 1945년 2월 7일 경성 명동의 반도호텔. 징용 축하공연을 하는 이강호 악단(황정민 분)과 소희(김수안 분)의 노래를 들려준다. 그러나 이강호는 여자를 잘못 건드려 도망자 신세이다. 뒤를 봐주는 경찰이 이렇게 말한다. “조선인들도 일본에서 돈을 벌 수 있다.” 이 말에 속아 강호는 악단을 데리고 시모노세키로 향한다.
 
1945년 2월 12일 관부연락선 시모노세키 항. 강호는 물론, 종로 일대를 주름잡던 주먹 최칠성(소지섭 분)도 일본에 도착했고, 일제 치하에서 온갖 고초를 겪어온 말년(이정현 분)도 꿈을 안고 일본에 왔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여 끌려간 곳은 다름 아닌 지옥섬, 군함도였다. 그곳은 조선인들을 징용해 석탄 노동자로 착취하고 있었던 곳이다.
 
군함도는 대일본 건설을 위해 석탄을 공급하고 있으며, 소장 시마자키(김인우 분)는 징용된 조선인들에게 기숙사를 제공하고, 건강보험, 퇴직적금 등을 들어주었으나 뒤로는 조선인 윤학철(이경영 분)과 결탁하여 임금을 착취한다. “같은 조선인 끼리 싸우는 것은 일본인들이 원하는 것이다.”라며 징용 조선인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윤학철은 일제가 항복한 후, 조선을 다시 세우기 위해 해방 조선에 필요한 인물이라 광복군에서 구출하려고 하는 조선의 지도급 인사이다. 변절자의 얼굴을 감추고 친일파이지만 민족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어린 소희가 시마자키 소장 앞에서 살기 위해 부른 군가 ‘동기의 벚꽃’은 가미가제 특공대의 군가이자 서글픈 조선의 운명을 잘 보여준다. 살기 위해 변절하거나, 살기 위해 충성을 맹세하거나...
 
장면은 바뀌어 1945년 7월 중국 광복군 OSS 훈련장, 이범석 장군은 탁월한 작전 수행 능력과 신념을 지닌 인물인 박무영(송중기 분)을 군함도로 보내 윤학철을 구출하라고 한다. 이후 일본 전역에 미국의 폭격이 시작되고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은 군함도에서 조선인들에게 저지른 모든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갱도에 가둔 채 폭파하려고 한다. 이러한 계획에 시마자키와 손잡고 민족을 배신한 윤학철을 처단한 무영은 강옥, 칠성, 말년을 비롯한 모든 조선인들을 데리고 군함도를 빠져나가기로 결심한다.
 
어쩌면 드라마가 부족한 류승완 감독이 액션으로 그 부족분을 메우려고 했으나, 황정민을 신파로 너무 활용해 버려 <국제시장>도, <귀향>도 아닌 어정쩡한 영화가 되었고, 소지섭과 영화의 남성미를 너무 살리다 보니 <베테랑>의 그늘이 보이며, 송중기를 천하무적 류시진 대위로 그려 너무 어색했으나, 영화에서 ‘지도자란 무엇인가?’ 그리고 ‘지도자 하나가 바뀌면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 때문에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영화이다. 그리고 언제나 이정현은 감독의 부족한 연출력에 그나마 힘을 보탠다.
 
아무튼 영화는 헤게모니를 통한 ‘사회적 복종’과 ‘기계적 예속’의 모습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축적된 군함도라는 섬을 통해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일본은 군함도를 2015년 근대산업문화유산(방파제 안 섬에는 아파트 같은 건물들이 가득하다)으로 유네스코에 등록했다. 근대산업문화의 상징은 아파트이며 자본이 아닌가? 그리고 석탄은 바로 그 출발이다.
 
<근대성의 상징인 아파트가 가득한 군함도 섬>
2. 사회적 복종과 기계적 예속
 
들뢰즈와 가타리(G. Delueze & F. Guattari)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사회적 복종’과 ‘기계적 예속’이라는 권력장치를 통해 주체성을 만들어낸다. 사회적 복종은 성, 신체, 직업, 민족성 등 특정한 정체성을 할당해 이분법에 기반을 둔 ‘개체화된 주체’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개인이나 인권, 시민사회, 정치적 대표, 이데올로기와 억압 등이 사회적 복종에 해당된다. 기계적인 예속은 인간은 물론 비인간적인 요소들을 시스템의 부품처럼 배치해서 관리, 제어하는 것이다. 가령 주가지수나 통화, 방정식, 다이어그램, 컴퓨터 언어, 국민 계정, 기업 회계 같은 것들이 이에 속한다. 영화에서는 탄광 속은 ‘기계적 예속’에 해당되고, 그 외 모든 공간은 ‘사회적 복종’에 해당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동차 산업이 새로운 자동차 라인을 출시하듯 새로운 주체성 모델을 출시한다.”라는 가타리의 말은 ‘주체성’ 생산이야말로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이며, “자본은 기호로 움직인다.”라는 말은 자본주의가 언어를 주된 수단으로 삼아 인간중심적으로 세계의 구조를 파악하고자 했음을 잘 드러낸다. 이러한 자본주의가 인간의 주체성을 생산하는 구조가 무엇인지를 파악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자율주의(autonomism)1) 이론가 마우리치오 라차라토(Maurizio Lazzarato)는 ‘주체/대상, 자연/문화의 대립’을 의심하고 무효로 만들어야 된다고 말한다. “기계는 기술의 부분집합이 아니라 인간 본질에 참여한다. 실제로 기계는 기술의 전제 조건”​2) 이며 이런 관점에 서면 “공공 기관, 미디어, 복지국가 등의 장치도 … 인간, 절차, 기호계, 기술, 규칙 등”​3)을 배치하는 기계가 된다.
 
따라서 군함도는 탄광의 석탄을 캐기 위한 기술에 인간본질을 투여하여(물론, 조선인에 한해서) 식민지적 억압과 자본에 착취당하는 비인간적인 ‘인간-기계’를 그려준다. 라차라토에 의하면, “비인간들은 인간들만큼이나 행동의 틀과 조건을 규정하는 데 기여한다. 사람들은 기계들, 객체들, 기호들이 자기 자신과 동일한 “행위자”로 존재하는 배치 속에서, 또는 집합체(collective) 속에서 언제나 행동한다.”​4)
 
따라서 언어처럼 인간의 의식에만 대응하는 ‘기표적 기호계’로는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기계적 작동 방식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여기서 라차라토는 ‘비기표적 기호계’라는 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른 모든 존재에게 없는 것, 즉 언표행위와 표현의 역량이 인간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제국주의적’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제국주의적 역량이 사라진다고 해도 인간에게는 또 다른 표현 수단이 존재한다. ‘비언어적 수단’ 말이다. 언어적인 언어의 기호들은 비언어적 언어의 기호들, 특히 행동 언어를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5)
 
그렇다면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주체를 어떻게 발명해야 하는가? 사회적 복종에만 대항해 민주주의에 근거한 평등을 요구하는 차원에 멈춰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 예속에까지 대항해 인간중심주의에서 탈피한 새로운 주체성을 발명할 수 있는 실존 양식을 고민해야하는 것이다. 정치적 행동은 노동의 사회적 분할에 따라 특정한 지위와 역할을 할당하려는 사회적 복종의 명령을 거부해야 하며, 동시에 정치적 행동은 기계적 배치, 달리 말해 세계와 그 가능성을 구축하고 문제화하며 변형해야 하는 것이다. 군함도를 탈출하는 조선인들이 바로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잘 그려주는 것이다. 사회적 복종을 탈피하고 기계적 예속을 벗어버리는 것, 그것은 바로 그 시간과 그 공간의 벗어남이다.
 
3. 헤게모니: 지도자 하나가 바뀌면 세상이 변한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단순한 물리적 강제와 힘으로 지배하는 것에 더하여 ‘피지배자의 동의 혹은 합의에 기반을 두는 지적, 도덕적 지도력’을 첨가하여 헤게모니(hegemony) 개념을 발전시켰다. 곧 물리적 힘과 지적 합의가 결합될 경우 정상적인 헤게모니가 나타나는 것이다. 지배가 강제와 힘이라면, 헤게모니는 지적, 도덕적 지도력에 의한 자발적 합의가 본질인 것이다.
 
그람시에 의하면 적대집단은 ‘지배’하고 자신의 동맹집단은 ‘지도’한다. 일본이 일본 자국민과 조선인들을 항구에서 탄광에서 어떻게 지도하고 지배하는지 <군함도>는 너무나 잘 비교해서 보여준다. 폭력은 적에게만 사용하고 동맹집단은 포섭의 대상이며 그들의 열정과 지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지도력을 계속 발휘해야 한다. 윤학철을 폭력이 아닌 포섭으로 삼은 것은 조선인들을 장악하기 위한 헤게모니 전략이다. 그람시는 헤게모니를 구축할 수 있는 계급을 ‘기본계급(부르주아지 또는 프롤레타리아트)’만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헤게모니는 경제적 토대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윤학철과 시마자키의 결탁은 기본계급의 헤게모니 전략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그들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한명을 민족을 배신하고, 한명은 인간성을 말살한다. 따라서 석탄과 전쟁, 경쟁 인물간의 대립, 그리고 경제에 기초한 군함도의 상황은 헤게모니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힘으로 지도력을 발휘’하려는 최칠성과 송종구(김민재 분), 힘이 아닌, 지식인의 권위로 지도력을 발휘하는 윤학철, 개인이 아닌 집단지성의 토론으로 지도력을 발휘하는 박무영과 부성(아버지)으로 인한 사랑 때문에 지도력을 발휘하는 이강옥을 그려주고 있다. 게다가 광기의 지도자인 야마다(김중희 분)도 있다. 군함도를 탈출하는 조선인들을 죽이며 야마다는 이렇게 외친다. “왜 조센진들은 고마움을 모르나. 조센진! 조센진!! 조센진!!!” 이렇게 짜증 썩인 목소리에는 조선에 대한 증오와 멸시가 깃들어 있다. 이유 없는 멸시와 증오, 그 뒤에는 광기가 있는 것일까? 아무튼 지도자 하나가 바뀌면 세상이 변한다. 아니, 적어도 딸아이 인생 하나는 변화시킬 수 있다.
 
4. 바디우의 윤리와 반변증법적 전략
 
알래 바디우(Alain Badiou)는 『윤리학(L'ÉTHIQUE):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에서 오늘날 ‘윤리’라는 말이 각광을 받고 있는 데 주목한다. 확실히 생명윤리, 윤리 위원회, 기업윤리, 인권의 윤리, 동물윤리, 사이버윤리, 커뮤니케이션 윤리 등 우리 주변에 윤리가 넘쳐난다. 기본적으로 차이를 인정하고 타자를 인정하는 이러한 윤리는 ‘관용(tolerance)’ 정신이 그 근본일 수 있다. 바디우도 이렇게 말한다.
 
“윤리란 ‘타자에 대한 인정’(타자를 부정하는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또는 ‘차이의 윤리’(이민자들을 배제시키고자 하는 민족주의 또는 여성 존재를 부정하려는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또는 ‘다문화주의’(행동과 지성의 통일된 모델을 부과하는 것에 반대하는)라고. 또는 단순히 타자들이 자신과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 그 훌륭하고 오래된 ‘관용’이라고."​6)

그러나 바디우는 여기서 더 나가 비판적으로 윤리를 검토한다. 따라서 바디우는 ‘윤리’가 사람들을 관리하고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라고 폭로한다.
 
“윤리의 군림은 필연적인 것에 대한 주저와 순전히 부정적이고 게다가 파괴적이기도 한 의지 사이의 고유한 조합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징후이다. 그러한 조합은 허무주의라고 지칭되어야 한다.” ​7)
 
결국 이데올로기로서 윤리는 ‘서구적 질서’를 선택하게 했고, ‘자본주의 경제’와 ‘의회 민주주의’를 옹호하게 하여 결국 보수주의, 보신주의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윤리학’은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것에 예속되었다. 결국, 우리가 아는 통념적인 윤리학은 승자들의 윤리학이며, 승자들에게 유리한 윤리학이다. 따라서 바디우는 이렇게 말한다.
 
“윤리학은 따라서 ‘계속하시오!’라는 정언명령(칸트 : 그 자체가 선인 명령)하에서 식별의 자원(시뮬라크르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과 용기(양보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유보(총체성의 극단성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를 결합시킨다.” ​8)
 

박무영은 윤학철을 식별했으며, 군함도에서 조선인들을 탈출시키는 것을 양보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주었으며, 자신의 의견을 총체성의 극단성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유보하며 집단 지성을 발휘했다(혹자는 이 장면이 촛불집회를 상징한다고 하며 감독을 비판하지만, 오히려 영화는 이 장면 때문에 바디우의 윤리학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윤학철의 실체를 드러내는 박무영과 집단지성>
바디우는 나치즘을 ‘생각의 형식’이 아니라고, 곧 “야만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믿음이야말로 지적 헤게모니의 착각이라고 한다. 곧, ‘정치’는 생각할 수 있고, ‘야만’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전제야말로 ‘자본주의적 의회주의의 야만성’을 은폐하는 것이라고 한다.​9) 따라서 바디우는 나치즘도 정치이자 생각이라고 말한다. 사실, 나치즘을 ‘생각하지 못하는 악’(한나 아렌트의 ‘생각없음’과 유비 가능하다)으로 말하기는 쉽지만, 그 경우 대안은 ‘무기력한 신학적인 판단’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게 된다. 유대교의 메시아니즘이 그 경우인데, 신의 심판과 그 종말적 도래만이 인간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된다.
 
따라서 특정 정치적인 문제를 도덕적인 판단으로 손쉽게 대체한다면 나치즘과 민주주의의 공모관계라는 진실을 밝혀내지 못해 역설적으로 향후 되풀이될 전체주의의 출현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10) 따라서 왜 우리가 일제에 대해 역사적 반성을 요구하며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군함도 문제에 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게다가 감독이 상투적으로 일본인 보다 더 지독한 조선인을 배치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일제가 ‘생각의 형식’이 아니라, ‘야만’이며 ‘야만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류이며 여기에는 조선인도, 바로 우리 자신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디우의 전략은 무엇인가? 『세기』에서 ‘통합과 융화를 지향하는 변증법’에 대해 반(反)변증법을 내세운다. 곧 모순을 폭로하고 대립을 격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바디우는 현대의 포스트모던 상황에 맞선 투쟁을 통해 낡은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인간’을 낳으려고 한다. 젊은 시절 심취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조반유리(造反有理)’​11) 사상이 바디우 안에 잠재되어 생생하게 고동치고 있으며(그런 면에서 바디우는 ‘현대의 가장 위험한 철학자’이다) 박무영은 조선인들과 함께 군함도 안에서 반변증법을 실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반변증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군함도에서, 한반도에서, OOO에서...
 
*각주
 
1) 이탈리아에서 68운동은 대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던 프랑스나 미국, 독일 등지의 운동과는 달리 처음부터 젊은 노동자들의 운동이었다. 68~69년 당시의 노동자 대투쟁에서 ‘아우토노미아 오페라이아’(노동자의 자율)라고 스스로를 지칭한 노동자주의적 사회운동은 큰 역할을 담당했다. 아우토노미아 오페라이아 그룹은 데모에서 경찰에 폭력적으로 맞섰으며, 공장에서 사보타주를 주도했다. 이 운동에 노동자와 학생 뿐 아니라, 노숙자와 실업자들도 함께 했다. 이들은 ‘노동자주의 (오페라이스모)’라고 불리는 자신들의 이론을 발전시켰는데, 이 이론의 핵심적 요소가 ‘자율’이다.
 
2)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신병현 역, 『기호와 기계: 기계적 예속 시대의 자본주의와 비기표적 기호계 주체성의 생산』 (갈무리, 2017), 116
 
3) Ibid., 117
4) Ibid., 42.
5) Ibid., 199.
 
6) 알랭 바디우, 이종영 역, 『윤리학(L'ÉTHIQUE):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2001), 29.
 
7) Ibid., 41.
8) Ibid., 108.
 
9) 이하 알랭 바디우, 박정태 역, 『세기』 (이학사, 2014) 참조.
 
10) 이택광에 의하면 ‘우리’가 그 야만의 공모자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야만에 적대적인 줄 알고 있는 민주주의가 사실 그것을 배양하는 조건일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전체주의는 여전히 ‘우리’의 미래를 위협할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나치즘은 1890년과 1920년 사이에 발생한 여러 전쟁의 경험으로 인해 정부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인민이 선택한 ‘극단적인 해결책’이었다. 이택광, ‘부르키니와 극단주의’, 『경향신문』, 2016년 9월 4일 참조.
 
11) 조반유리는 ‘모든 반항과 반란에는 나름대로 정당한 도리와 이유가 있다’는 뜻으로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이 홍위병과 학생들을 부추기기 위하여 내세운 구호이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마오쩌둥은 “중앙 기관이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면, 우리들은 지방이 조반(造反:반항, 반란)해서 중앙으로 진공하도록 호소해야 한다. 각지에서 많은 손오공(孫悟空)을 보내어 천궁(天宮)을 소란하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천궁은 당시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한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등이 실권을 잡았던 당 중앙회를 말하고, 손오공은 전국의 중학, 대학에서 나와 전국을 휩쓸었던 홍위병을 뜻한다. 이 문화대혁명의 결과 류사오치는 지하 감방에서 죽었고 덩샤오핑은 실각했으며 약 300만 명의 당원이 숙청되었을 뿐 아니라, 경제는 피폐해지고 혼란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이러한 조반유리의 정신에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광란의 이미지로 연결되며,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지금도 이 말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한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webam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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