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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페스포럼 8-1: ‘우리’의 ‘그들’에 대한 차별

기사승인 2017.03.27  12: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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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의 차별에 대하여>

종교인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지만 사회가 평화롭기는커녕 폭력이 교묘하게 구조화되고 도리어 내면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하는 제8차 “레페스포럼”(REPES Forum)에서 전철후 교무(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가 고모리 요이치의 『인종차별주의』(푸른역사, 2015)를 읽고 전체 토론을 위해 요약한 발제문이다. 이번호에는 먼저 발제문만 게재한 뒤, 다음호에 참석자들의 종교와 차별 관련 토론문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종교, 폭력, 평화의 관계에 대해 모색하고자 한다.

참석자

오현석(북경대 박사과정, 종교학)
이관표(협성대 초빙교수, 종교철학)
이명권(코리안아쉬람 대표, 종교학)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진행)
이현아(경동교회 준목, 기독교교육학)
전철후(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 원불교학/기록)
정주진(평화갈등연구소장, 평화학)
홍정호(연세대 객원교수, 선교학/정리)

 
정체성과 아이덴티티

김제동의 ‘톡투유’라는 토크쇼에서 천체 과학자가 우주를 빗대어 ‘공간’이라는 개념을 설명한 적이 있다. 지구를 작은 먼지라고 가정한다면 태양은 사과 정도의 크기라고 한다. 먼지와 사과 사이의 거리는 사람의 여섯 발자국 정도라 한다. 사과 한 개의 주변에는 먼지 정도의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니 우주 공간은 사실상 텅 비어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먼지 같은 지구에서 우리가 무언가 물질을 만나는 일은 반가워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 특히 생명체를 만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과학자는 힘주어 강조한다. 이처럼 텅 비어 있는 공간에서 사람과 사람이 인연으로 만난다는 것은 기적이며, 신비이며, 기쁨이다. 그 속에 뭔 차별이랄 게 있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다양한 형태의 차별로 그득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신분사회가 형성되고, 사람을 돈과 권력으로 자리매김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시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일본의 문학자 고모리 요이치의 『인종차별주의』는 우리가 분명히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매일 ‘새로운 인종주의’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담론을 펼치고 있다. 과거에는 생물학적인 외적 차이를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했는데,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인종차별주의를 광범위하게 부추기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맴미의 ‘인종차별주의’ 규정, 즉 현실 혹은 가공의 차이에 일반적 혹은 결정적인 가치를 매기는 것으로서, 이 가치매김은 고발자가 자신의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피해자를 희생시키고 자신의 이익을 행하는 것이라는 정의를 인용하며 풀어나간다. 이 가치매김 이론에 바탕하여 언어적 차별을 중심으로 인종차별주의에 대해 다각도로 설명하고 있다. 

‘더러워’, ‘냄새나’

이 책에서는 인종차별주의를 가령 ‘더러워’와 ‘냄새나’ 라는 언어를 통해서 상대방을 공동성의 바깥으로 배제할 수 있음을 프로이트의 발달단계 이론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더러워’와 ‘냄새나’ 라는 말을 통해 차별적 의식이 형성되고, 그 과정에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적 기준, 종교적 가치관, 성별자의 문화적 기준, 배설행위 관련 습관, 청결과 불결의 공간적 분류, 그리고 배설을 둘러싼 각종 논리 등 지극히 복합적인 사회적 그물망이 형성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을 통해서 불쾌한 경험을 거듭하는 아이들의 욕구불만이 인간 공격성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한다. 아이들이 타자에게 ‘더러워’, ‘냄새나’ 라고 말했다면 그 말에는 공격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더러워’와 ‘냄새나’의 언어적 공격성을 죽음의 본능으로 표현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태어나서부터 항문기까지의 발달단계에서 이러한 말을 들었을 때 사회적 공동성으로부터 배제될지 모른다는, 생사와 관련된 공포와 긴장과 억압을 느끼게 된다. 그 말이 지닌 공격성을 일찍부터 내면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과 ‘그들’의 언어적 차별

고모리는 나가이 카후의 『악감』이라는 소설을 분석하면서 인종차별주의에 내재하는 욕망의 문제도 들여다본다. 『악감』은 전형적인 인종차별주의(오리엔탈리즘) 담론를 담고 있다. 동양에 대한 모멸과 혐오, 증오마저 느껴질 정도로 철저한 차별적 담론이다. 이 책에서는 ‘우리들’과 ‘그들’ 사이의 차별의식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양인 저자가 동양인을 프랑스를 기준으로 서술하면서 오리엔탈리즘적 관점 하에 인종차별주의의 담론을 재생산하고 있다. 고모리는 『악감』을 통해 프랑스에서 살던 일본인이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가 ‘뮈세’의 시집을 꺼내어 읽으면서 보통의 일본인에 대해 인종적 우월감을 느끼고, 평범한 일본인을 야만인처럼 신기하게 쳐다보는 장면 등을 소개하면서, ‘나’가 ‘그들’을 언어적이고 의식적으로 차별하면서 인종차별주의를 자연스런 감수성으로 내면확시키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소설의 주인공은 그저 서양화된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순수한 서양인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있다. 『악감』은 저자가 ‘서양’과 ‘일본’ 사이에서 ‘자신’이라는 주체가 처한 위치가 흔들리는 과정과 결국은 그들의 모습이 다름 아닌 ‘내’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인종차별주의’의 인문적 성찰

고모리는 ‘가치매김’의 폭력적 차별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상호간 결합관계의 그물망 전체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 언어적 그물망의 내구성을 검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저자는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벤치마킹하며 ‘의심하는 전략’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왜’ 신비하고 기쁨인지에 대하여 인문학적으로 성찰하면서 ‘인종차별주의’를 넘어 ‘평화 영성’ 담론의 가능성을 열어보고자 한다.

1) 언어라는 그물

그물이라는 표현과 관련한 대표적인 담론은 화엄사상의 인드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에서 가장 잘 보인다. 이것은 제석천(帝釋天)에 있는 보배로 된 그물의 그물코마다 구슬이 달려있는데 구슬에 비친 우주를 다른 구술이 서로 비치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모습에 대한 비유이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상호연기적 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상호 의존적 관계에 대한 인식을 중요시한다.

수많은 다른 존재의 작용과 희생 덕분에 하나의 존재가 생존한다는 사실이 불교의 ‘가치매김’의 근거다. 인간은 이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사람 뿐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존재와 자연 없이 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런 관계성은 정적이지 않고 매우 역동적이며, 다른 존재를 존중하기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할 줄도 알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그물처럼 연계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개인에게는 불성이 존재함을 인정한다. 원불교 ‘처처불상’의 개념은 모든 존재는 깨우칠 수 있다는 내재적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인간이 거대한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개인주의에서 관계주의로의 ‘가치매김’이 필요하다.

2) 공존, 원불교의 사은사상

소태산의 사은(四恩)사상에서는 우주의 모든 생명체와 우주 자체가 총체적으로 연기적인 은혜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은사상은 인간 사이에 맺어진 은(恩)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는 ‘없어서는 살 수 없는 피은’의 관계라는 것을 중시한다. 보은 생활을 하자는 것이다. 근본적인 상생과 생명의 관계를 인식하고 감사생활과 적극적인 보은 생활을 하자는 것이 사은사상의 본질이다.

‘논어’의 화이부동(和而不同)에서 ‘화’는 화목하고 서로 잘 어울린다는 의미이며, ‘동’은 동일의 의미를 갖고 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과 공존과 평화의 논리이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한다. 지배와 합병의 논리이다.

3) 사색과 성찰

고모리 요이치가 제시한 ‘의심하는 전략’을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은 그물처럼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으로 이어지고, 각각의 존재는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내재적 초월’의 존재임을 자각해 가는 과정이다. 또한 하나의 가치관으로 합일해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가치와 차이를 인정해 주는 ‘화’의 논리로 공동체를 형성해 가야 한다는 인식의 과정이기도 하다. 고모리가 강조했듯이, 우리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새로운 ‘인종차별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에 대한 사색과 성찰이 필요하다.(전철후,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

레페스포럼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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