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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의 탄압에 저항하는 민중혼(民衆魂) (13)

기사승인 2016.12.19  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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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박정희의 「언론윤리위원회법」과 장준하의 「자유언론수호연맹」 1

함석헌

아직 한일협정 위한 정부 당국의 대일회담이 계속되고 있는 터에 한일협정 저지를 위한 싸움에서 몸을 뺄 수 없는 장준하는 정말 눈코 뜰 수 없을 만큼 바쁜 와중에서도 또 하나의 조직을 구상한다. 실로 거대한 조직이었다. 그 조직에 대한 구상은 1963년을 보내면서 더욱 명료해졌다. 언론 자유의 수호와 그 신장을 과제로 하는 전국적 조직의 결성이었다. 제야의 세력은 물론 야권의 정당들까지를 묶어내는 조직이었다. 

물론 틀의 구상은 장준하 몫이었지만 장준하로서도 이 작업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예와 달리 조직을 강조하는 함석헌의 열심히 있어서 였다. 무슨 일이거나 이미 알려진 대로 함석헌은 “글쎄...”의 사람이었는데 지난해 시민회관, 대광고등학교 야회 강연이 있은 이후 곳곳의 강연회를 취소당한데다, 그처럼 언론을 탄압하는 정부 당국을 향해, “정부당국에 들이대는 말”을 내놓은 데 대해, 당국의 책임자(?)들로부터 광인(狂人)이니, ‘정신이상자’니 하는 반론을 들으면서 이전에 없던 한 생각을 구체화 하게 된데서 였다. 

종교와 역사는 분리 될 수 없는 것이라 하는 함석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함석헌은 행동인이라기 보다는 사색하는 이였고, 역사교사로 역사를 살아 온 이었지만 헤아리기 어려우리만큼의 깊이를 지닌 종교인이었다.

그에게는 거룩한 지성소(至聖所)가 있었다. 함석헌에게 그 처소는 마치 야곱이 하늘로 치솟은 사다리를, 그리고 그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천사를 보는 곳이었다. 그 소(所), 크기래야 사방 열자도 못되는 그의 서재 겸 거실이었지만, 그 곳을 지성소라 하는 이유가 있다. 함석헌이 글을 쓰는 시간이 아니면 그곳은 그의 지존인 뜻을 찾아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고 두 세시간은 보통이고, 한나절씩의 시간을 두 손을 모은 채 깊은 고요에 들곤 했다. 절대의 지경에 드는 것이었다.

이제까지의 나날의 삶을 그렇게 살아온 함석헌이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공식적인 반격을 받으면서 조금은 달라지고 있었다. 언론, 출판, 집회에 대한 국가권력의 탄압을 받으면서 「조직적 저항」을 주장하는 것이 그랬다. 8월 16일(1963), 함석헌의 「정부당국에 들이대는 말」에 박정희 정권의 반격문이 임성희(任聖熙)공보부장관 이름으로 바로 다음날 역시 같은 동아일보지상에 보도되었다.

“오늘날 한국에 언론자유가 없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이와 같이 무책임한 발언에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도시 여하한 명분의 자유일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적일 수는 없으며 책임감 있고 성실한 법치권 내의 언론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부인권설에 논거를 둔 듯 한 함씨의 주장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 우리나라에 언론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혁명정부가 민권을 신장하고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사회정의의 실현에 그 최고의 이념을 두고 있다는 데서 여러 외국인사를 비롯하여 I.P.I에 의해서 수차에 걸쳐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여러 차례에 걸쳐 강연과 지상을 통하여 정신이상자 아닌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광적인 독설과 이적에 가까운 반역적 망언까지 되풀이 해온 함씨가 이제 와서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없다고 하는 것은 무고한 사람에게 가해하고 쾌감을 느끼는 「사디즘」적은 정신 이상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함씨는 그 공명선거 실시에 관해서도 운위하고 있으나 혁명정부가 앞으로 실시할 각종 선거에 있어 우리나라 헌정사상 유례없는 공명선거를 실시할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다짐하고 있는 것. 온 국민이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5.16혁명이 4.19혁명의 연장이요, 4.19 혁명이 부정선거의 척결을 위해 피 흘린 것이라면 혁명정부에서 부정선거란 가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공보부장관 임성희의 담화문」을 마음 모아 읽어 내리던 함석헌은 잠시 「5.16 군사 쿠데타」를 분석한다. 함석헌은 제2공화국을 끔찍이 아꼈다. 함석헌이 제2공화국을 한국사 속에서 특별한 애정을 갖는 것은 그것이 4.19정신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과 순수한 민주정권(民主政權)이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4.19의 증인’이요, ‘4.19의 해설자’인 그로서 제2공화국에의 애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혁명정부의 공명선거라....5.16은 순(純) 민선에 의한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한 탈법집단 아닌가? 그것은 함석헌에겐 씻을 수 없는 원죄집단 이었다. 칼 가지고 이룬(?)정권, 함석헌에겐 그것은 망할, 망해야 할 정권이었다. 두말 말고 군대로 다시, 지금 돌아가야 하는 정권(?)이었다. 함석헌은 임성희의 이어지는 담화문을 이어 읽는다. 

“우리는 오히려 정부와 국민사이에 불신과 반목을 조장하는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이야 말로 커다란 암(癌)이 되리라는 것을 경고해둔다. 우리 현명한 국민들은 사사건건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자기소론을 아전인수식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면서 종교인의 탈을 쓰고 일부정파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의 무책임한 선동적 망언에 추호도 현혹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함석헌의 글을 반격하는 것은 임성희만이 아니었다. 바로 박정희의 마스크 역할을 하는 최고회의 공보비서였던 이낙선(李洛善)도 팔을 걷어 부치고 달려들었다. 박정희의 ‘입’들이 다 달려든 것이다. 그런데 자다가도 웃을 일이 생겼다. ‘함씨 발언 막지 말라’는 박정희의 소리였다. 

기절할 만큼 웃기는 소리였다. 후에 이 함석헌의 글, “정부당국에 들이 대는 말”에 한 일간지에 3회에 걸쳐, “들이대는 말에 갖다 바치는 말씀”으로 비난을 쏟아내는 그는 후에 박정희의 사가(史家)로 알려지는 조갑재(趙甲滓)에 의해 ‘5.16혁명 기록의 사관(史官)’으로 알려지는 자다.
“그때 (이낙선이 함석헌과 논쟁?을 벌리던 때, 필자 주), 이 낙선의 나이는 36세, 60대 민간지식인과 30대 젊은 장교의 대결이었다. 이 논전은 군과 민, 구세대와 신세대 서구적 민주주의와 민족적민주주의 대결로 의미가 부여되는 제5대 대통령선거의 전초전이기도 했다.” 조갑재의 말이다.

이낙선은 말한다. “선생님은 박 의장이고 공무원이고 군인이고 지성인이고 닥치는 대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어 놓고 언론자유도 그 외의 온갖 자유도 없다니 도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작년과 금년의 재해로 정부나 국민이 온통야단인데, 선생님은 어디서 온 이방인이기에 초연히 앉아 불난 집에 부채질만 하십니까?

지금 우리가 가난을 면하기 위하여 걷고 있을 겨를이 없어 세찬 달음박질을 하는 통에 얼마쯤의 무리가 뒤따랐던 것도 사실입니다. 혁명정부는 어리석게도 국민들을 편안히 쉬지 못하게 했습니다...그래서 ‘요다음 표 찍을 때 보자’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5.16은 결코 인기를 얻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이낙선은 함석헌의 말, 글들을 “선생님이 즐겨 돌리시는 혓바닥 운동”으로, “자랑으로 하시는 ‘광필(狂筆)’이라고 내댄다. 결국 공보부장관 임성희, 공보특보 이낙선의 반격은 곧 함석헌의 글이 한 정신이상자, 정신분열증환자의 혓바닥 놀음, 광필이라, 미친 글, 미친놈의 글이라는 것이었다.

함석헌을 참을 수 없게 한 것이 정신 이상자, 정신분열증환자라는 말이었다. 그는 “살의 베임을 당했으면 당했지 말과 글을 뺏길 수는 없다”하는 이었다. “정신이상자”란 함석헌에 대해서 박정희와 그의 세력들이 두고 쓰는 이름이었다. 군사 쿠데타가 있던 바로 그 다음달, 함석헌은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를 썼는데, 그때도 그 글을 읽은 5.16의 두 번째 사람으로 알려진 당시중앙정보부장 김종필도 임성희, 이낙선과 한자 다름없이 함석헌을 일러 “그 정신 분열증 들린 영감”이라 했다. 그 같은 쿠데타 세력의 악평을 전해들은 함석헌은 말없이 그저 고요히 그 말을 새겨 넘기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함석헌의 “정부당국에 들이대는 말”에 정부당국의 반격담화문이 며칠 동안 유력지의 지면에 실려 나오면서 시중 온갖 신문엔 시민들의 자유기고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울에 있는 중앙지만이 아니었다. 지방신문들, 잡지들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박정희의 라인에서 내놓은 글은 함석헌을 향해서 였지만, 독자의 투고란에 보도되는 글들은 예외 없이 함석헌의 주장을 지지, 예찬하는 내용들이었다. 신문사편집진에서는 독자들의 신분을 염려하여 주소는 물론 이름까지도 끝 자는 빼고 보도하는 정도였지만 투고하는 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박정희 전선에는 이상한 기류가 돌기 시작한다. “이 같은 언론들, 이따위 언론들을 그냥 놔둬서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언론을 좀 손 봐야 한다”, “언론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된다” 박정희 정권이 의기의 투합을 보기 시작한다. 소위 구국의 대업에 반동하는 신문들에 족쇄를 채우자는 것이었다. 그 의기의 투압이 함석헌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도 함석헌이 그 단추를 제공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대안 없는 함석헌 역시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에 저항의 장(場)을 심사숙고 하고 있었다. 함석헌이 이럴 때 생각나는 것이 장준하였다. 장준하를 같이하면 일이 만들어지는 것을 함석헌은 수차례 체험해 온 바 있다.

“가만있을 수가 없소. 역사의 진행을 이렇게 방해하다니...싸움을 좀 조직화할 필요가 있어 좀 만나자 했소. 무슨 방법이 없겠소?” 함석헌이 장준하를 불렀고 찾아온 장준하에게 함석헌이 내놓은 제안이었다. 함석헌의 서두르는 모습에 약간은 의외라 여기면서도 장준하는 속웃음을 했다. 바야흐로 자유언론 수호를 위한 대단원을 자신이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 10월 대선(大選)이 목전에 놓여있다. 실제로 자유언론수호를 위한 세력을 조직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선생님. 선생님께 말씀은 못 드렸습니다만 선생님 귀국하셔서 시민회관 강연회 후부터 바로 이어 언론수호를 위한 범국민적인 대책위 같은 것을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온 힘들이 대선으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대선을 치룬 다음 흐름을 주목하면서 대책을 세우도록 하시지요.”

함석헌은 장준하의 제안을 고맙게 받았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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