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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와 페스탈로치’의 성찰을 시작하며

기사승인 2016.12.01  10: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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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선의 집언봉사執言奉辭 22>

지난 11월14일부터 16일까지 홍콩에서 ‘한반도 평화조약에 관한 국제 에큐메니칼 컨퍼런스’가 열렸었다. 개회예배에서 성서연구를 담당했던 나는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는 두 가지 핵심 힘(Two key forces for bringing peace to the world)”이라는 제목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 가족의 이야기를 택했다. 거기서 나는 인생 파국의 마지막에도 삶에 남아있게 해주는 인간 내적 힘으로서 먼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염려를 들었다. 그리고 요셉 당시 이방인 요셉 가족에게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땅을 내어주겠다고 하는 당시 최강국 이집트 파라오 왕의 선언처럼 시대의 강국들이 보여주는 넓은 마음, 관대함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는 두 번째 요소라고 밝혔다.

여기에 반해서 오늘 우리 시대는 모든 정황이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혹독하게 성과위주의 교육으로 시달림을 받는 아이들은 가족과 부모에 대한 사랑은커녕 자신의 부모조차도 적으로 돌리는 일에 익숙하다. 결혼, 자식 등의 3포를 넘어서 n포 시대라는 이 시대의 젋은이들에게 이런 인간 보편의 힘을 기대하기란 더 이상 어려울 것 같다. 여기에 더해서 영국의 EU탈퇴, 미국의 트럼프대통령 당선, 이웃 일본 아베정부의 평화헌법 포기 등은 오늘 세계 정치상황이 강대국들의 관대함과는 정확히 반대로 가는 것임을 확실히 한다. 그리고 국내적으로 지금 속속들이 드러나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한국 상황은 우리의 미래가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기인 것을 드러내준다.

페스탈로치(H.J. Pestalozzi, 1746-1827)

그래서 나는 더 이상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와 인문주의의 기수, 스위스의 페스탈로치를 찾는 일을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페스탈로치(J.H.1746-1827)는 우리에게도 그 이름으로는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사실 그의 삶과 행적, 사고 면에서는 그렇게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는데, 우선 나도 포함해서 한국에 본격적인 페스탈로치 연구가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들도 또한 이 연구에 그렇게 몰두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페스탈로치 자신이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으로 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가 어느 한 분야의 일로 한정될 수 없어서 오히려 소홀해 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그 시대의 뛰어난 정치 철학자였고, 사회운동가였으며, 문학가였고, 학교교사와 행정가, 신학자, 저술가, 민중교육운동가로서 유럽 교육의 코페르니쿠스적 전기를 마련한 사람 등으로 평가된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의 시기에 페스탈로치는 당시 유럽 계몽주의 운동의 한 중심지였던 취리히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조국 스위스와 유럽을 살리는 길로서 법률가와 목사의 길을 마다하고 농촌을 선택한 농민 운동가였다. 대학시절 금서였던 루소의 책 등을 읽으며 ‘애국단(Patrioten)’ 활동을 열심히 한 그는 거기서 함께 했던 부인과 결혼해서 첫 보금자리를 취리히 근처의 시골에 마련하였다.

거기서 그는 10여년의 시간을 당시 정치경제적으로, 문화교육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어 있던 인구 99%의 농촌 민중의 삶을 개선하고자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자신도 살리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과 농촌을 살리려 한다는 조롱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모든 일을 통해서 다듬어진 정치사회적 혜안으로 유럽과 자신의 조국 스위스가 나아갈 길을 밝히는데 주력했으며, 그 결과 프랑스의 혁명정부로부터 미국의 조지 워싱턴, 영국의 벤담, 독일의 실러 등과 함께 프랑스 혁명국가의 명예시민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이 혁명 시대의 와중에서 그는 인간에 대한 다시 한번의 깊은 이해를 위해 『인류의 발전에 있어서의 자연의 과정에 대한 탐구(Meine Nachforschungen ueber den Gang der Natur in der Entwicklung des Menschengeschlechts), 1797』라는 작품도 저술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유럽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인 칸트나 헤겔, 피히테, 헤르더 등의 작품들과 견주어지는 역작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보통 좁은 의미의 교육가로 알고 있는 페스탈로찌의 교육주저들은 모두 이러한 오랜 기간의 정치철학적, 신학적 투쟁과 고통에 찬 성찰 뒤에 다듬어진 것 들이다. 

그는 당시까지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했던 유아교육과 사회교육에 눈을 떴고, 인간의 지적, 도덕적 그리고 직업적 능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들을 탐구해내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유럽의 민중들을 어떻게 인간적인 힘의 주체적 인간으로 키워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우리가 보통 좁은 의미의 교육자로 알고 있는 그의 교육 사상들 속에는 이렇게 그가 어떻게 인간 사회의 발전을 생각하는지, 그가 생각하는 참된 종교란 어떤 것인지, 당시 유럽의 정치․경제 상황에서 어떠한 공동체 생활의 모습이 인간성의 참된 계발과 고양을 위해서 요청된다고 보는지 등의 전일적 사고가 녹아있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생각들을 열정적인 언어로 200편 이상의 저서들로 표현해 내었고, 그 중에는 수많은 우화들과 시들도 있으며, 유럽 최초의 농민소설과 수 백 통의 편지들도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당시의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보면서 나아갈 길을 모색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나는 2000년대 초에 페스탈로치에 대한 전체적인 소개를 시도한 적이 있다. 당시 출판사 ‘내일을 여는 책(대표 황덕명)’에서 내는 <처음처럼>이라는 잡지에 연재를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출판사가 재정난 등으로 그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면서 나도 여러 가지 다른 일들로 계속해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박근혜-최순실 사태가 일어나고, 앞으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상황뿐 아니라 21세기 세계의 상황이 전개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페스탈로치를 떠올렸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그가 오늘 인류 근대 산업문명 시대를 열어젖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프랑스 대혁명 전후의 시기에 어떻게 유럽 보편사의 진행을 파악했는지, 여러 강대국들에 둘러싸여서 그 강대국들 사이의 전쟁에 용병을 보내서 겨우 먹고살아온 자신의 조국 스위스가 어떻게 개혁되고 변화되어야 새로운 나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등, 그는 큰 정치와 역사의 틀 가운데서 인간 본성의 문제, 아이를 키우는 일, 가족적 삶의 의미, 지방자치의 문제, 농촌과 도시의 관계, 당시의 구제도와 정치혁명의 과정, 교육과 종교의 관계, 지도자의 부패와 사치와 민중의 도덕적 타락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참으로 다양하고 심도 깊은 물음들을 던지면서 그 답을 온 몸으로 얻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진실하고 성실한 투쟁과 고투가 나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도움이 되고 하나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 시대도 이제 그 산업문명의 시대를 마감하고 또 다시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문명전환의 시기이고, 그래서 모든 기존의 가치체계와 제도들이 뿌리부터 흔들리면서 우리는 또 다른 토대를 세워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이번의 박근혜 사태로 페스탈로치가 프랑스대혁명 시대에 베르사이유 궁전과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한 것과 같은 일을 우리도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페스탈로치는 그 혁명 과정의 전후를 그의 유명한 『Ja oder Nein(Yes or NO, 1791)』이라는 글 등으로 잘 추적했고, 여기서 'Ja oder Nein'이란 혁명정신에 대한 긍정이냐 부정이냐의 의미이다. 처음에 이 변화와 개혁에 찬성하던 사람들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많은 혼란과 고통, 폭력과 어려움들을 보고서 다시 그 전의 구제도 시대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빠지자 페스탈로치는 그 과정을 참고 견디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하게 역설한다. 과정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다시 안일한 과거로 돌아가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지, 어떻게 그 시기를 넘길 수 있는지 등을 그는 우리 각자의 역할, 정치와 종교, 법과 경제 등이 어떠해야 하는가 등과 연결해서 잘 밝혀낸다. 참된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서 설왕설래 했던 모든 과정들을 그는 그려내고, 예측하고, 독려하는데, 나는 그런 모든 일들을 겪고서 오늘의 유럽이 있고, 스위스가 있으며, 자유과 독립과 하나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사실 지난 번 8월까지 <논어>에 대한 집언봉사의 글을 마치고 이어서 그 다음 경전으로 <大學>을 잡아서 그 성찰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일이 여러 가지 다른 일로 차일피일 미루어지다가 오늘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래서 페스탈로치의 생생한 언어가 더욱 긴요하다는 판단으로 계획을 바꾸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페스탈로치와 15세기 중국 명나라 왕양명을 비교 논문을 쓰면서 그 때 전두환 정권으로 인해서 서울의 봄이 날라 가고, 다시 암흑 같은 80년대를 지나면서 나는 바젤에서 두 사상가를 읽으면서 우리의 상황을 너무도 잘 지적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또한 페스탈로치의 해법이 15세기 명나라 말기의 혹독했던 환관정치 시대의 왕양명의 그것과 어떻게 그렇게 잘 연결되는지 나는 감탄하고 또 감탄했었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와서 페스탈로치에 대한 연구는 큰 진척을 보지 못했다. 여성신학, 조선 유교 공부, 다시 오늘의 상황에서의 여성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 등이 나의 관심을 더 끌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어쩌면 왕양명이나 페스탈로치에게는 항상 더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게 하고, 그래서 더 자신으로 돌아가서 생각하게 만드는 인자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이들에 대한 박사학위 후 한국학과 조선유학에 더 관심하게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페스탈로치 연구가 최현배 선생님이 일본에서 페스탈로치를 공부하고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는 우리말을 연구하는 것이 더 급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한글학자가 된 것, 고려대학교의 페스탈로치 연구가 김정환 선생님이 한국의 주체적인 무교회주의자 김교신 연구를 깊이 하신 것 등도 모두 같은 연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양명이나 페스탈로치 안에는 우리 삶의 근거와 기초, 토대를 묻게 하지만 그것들을 항상 다시 던지고 더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고 더 핵심적인 고유성이 무엇인가를 묻게 하는 특성이 있다.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글을 쓰려니 이 서문을 시작해서 마무리하는데도 일주일 이상이 걸렸다. 어제 광화문 광장 등에서의 박근혜 퇴진을 위한 제5차 촛불집회에는 사상 최대 인파가 모여 150만 이상이었다고 한다. 외신들도 앞 다투어 이 소식을 전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정치적 저항의 집회를 하면서 마치 축제처럼, 평화의 놀이처럼 할 수 있는지 놀라고 또 놀랐다고 한다.

어제 집회현장에서 8시에 모두가 불을 꺼서 지금의 암흑과 같은 현실에 저항하는 일에 함께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우리가 이 혁명과 개혁의 시대를 잘 넘어서 새로운 공화국을 이 땅에 구성하고, 그것으로 이제 서구를 넘어서 한반도에서 세계 인류 문명이 나아갈 길을 밝히는 모범을 세울 수 있기를. 이 일을 위해서 이미 3백여 년 전의 일이었지만 페스탈로치라는 한 인물의 삶과 사상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소개를 시작한다. 다음번부터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이은선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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