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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만난 자에게 우린 무엇을 할 수 있나?

기사승인 2016.11.16  11:4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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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영성을 아느냐?③> ‘기도어린 경청’ 김오성 목사

ⓒ유문철

역시나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한국샬렘영성훈련원(이하 한국샬렘)의 김오성 목사를 만나기 위해 대학로에 위치한 한국샬렘 사무실로 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영성의 선배를 만나러 가는 길이 마냥 기쁘고 가벼울 수만은 없었다. 사무실에 거의 도착했을 때, 찌는 더위에도 당시 ‘248일째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백남기 농성장을 마주쳤기 때문이다.

248일이 되도록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백남기 농민의 상황과 쾌유를 기원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묵묵부답인 책임자의 처벌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가고 있는 농성장을 보니 그러했다. 더군다나 당시 필자 역시 ‘옥바라지 선교센터’에서 옥바라지 골목을 지키기 위해 쉽지 않은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도처에 널린 국가 폭력의 강도만난 자들의 신음소리에 하늘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오늘의 여정을 북돋아주었다.
두 번째 영성의 선배는 김오성 목사는 사회활동과 영성의 질문을 던지기에 탁월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감리교 목사이며 오랫동안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그리고 에큐메니컬 기독학생단체인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등에서 활동하며 사회 문제의 연구와 활동을 이어왔고. 지금은 한국샬렘의 디렉터로 영성훈련 활동을 하고 있다. 사회운동과 영성, 과연 그는 어떠한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다음은 김오성 목사와 필자의 대화이다.(필자: 광희/ 김오성 목사: 오성)


광희: ‘영성’과 ‘사회선교’는 제게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화두입니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 둘의 관계를 중심으로 샬렘에서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오성: 2008년, 한국샬렘이 처음으로 만들어질 때 굉장히 중요한 세 그룹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분류는 아니지만, 첫 번째 그룹은 민중교회에서 사역을 하거나 활동을 했던 분들입니다. 이들은 사회선교현장에서 오랫동안 사람들을 만나고 투쟁하던 사람들이지요. 이런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지쳤고, 신앙적으로 자기를 재충전하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서 완전히 소진되어 버렸던 것이지요.

사회현장에서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고 ‘어떻게 같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분들이니까, 당시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받았던 상처와 비판적인 의식으로는 기존의 교회에서 통성기도를 하며 신앙적으로 자신을 추스러 세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신앙적으로 자신을 세울 수 있는 방법을 다양하게 모색하다가, 샬렘에 합류하게 된 그룹입니다.

또 다른 그룹은 원래 사회선교에는 관심이 크게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전의 기도방식으로 더 이상 기도생활이 어려워 다른 기도의 방식을 찾던 열심있는 신앙인 그룹이었습니다.

세 번째 그룹은 상담을 하던 기독교인 그룹입니다. 상담과 치료의 주목적은 심리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치유하여 일상적인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상담의 영역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심리적인 상처를 입었을 때에는 기독교인으로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를 고민을 갖고 계신 분들이었습니다. 상담과 영성에 대한 것들을 고민하면서 심리 치유와 기도를 어떻게 통합할 수 있는 가를 고민하셨던 그룹입니다.

한국샬렘영성훈련원 김오성 목사. ⓒ에큐메니안

관성(慣性)에서 관상(Contemplation)으로

광희: 그렇다면 목사님께서 한국샬렘에 참여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오성: ‘사회선교의 현장에서 저항의 목소리를 같이 내는 것이 곧 기도다’라고 생각하며 현장에 많이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도였다고 한다면 신앙적으로 재충전되고 하나님과 가깝게 만나는 계기가 되어야 했는데, 때로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그렇지 못한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죠.

그것이 진정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내면을 성찰하는 것과 외면의 사건들이 연결돼야 하는데, 자기내면을 들여다보며 ‘내가 왜 여기에 참여하고 있고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일인가? 이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인가?’하는 성찰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성찰을 하는 것이 저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매우 중요하지요. 일상적인 성찰과 분별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영성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훈련을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를 돌아보며 기도할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위해서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통 사회선교현장에 나가서 기도(운동)할 때 우리의 발이 기도한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의 몸이나 생활, 모든 것들이 기도에 푹 담겨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는 내 발이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코드로 작동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죠.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것이 어떻게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면서 정말로 내 발이 기도할 수 있게 되는 방식들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들을 시작했어요. 그러다 샬렘을 통해서 배우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관상(Contemplation)입니다. 이 말을 라틴어 어원으로 풀어보면 con은 함께 라는 말이고 templation은 성전이라는 말에 어원으로 두고 있죠. 즉 관상은 성전에 함께 머무는 것,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관상은 세상 가운데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인식하고 그것들에 대해 사랑의 응대이며, 세상 가운데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열린 태도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관상은 개인과 체계, 침묵과 활동, 영성과 저항, 영과 육 등과 같이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면서, 구분된 것들 사이에 어떤 균형을 유지하려는 태도와는 거리가 있어요. 관상과 행동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행동 가운데 모든 것을 지탱하고 포괄하는 관상이 존재함을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광희 씨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광희: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함께 하시죠,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는 주일학교 에이스답게 대답했다)

오성: 맞아요. 그게 중요하죠. 우리가 교회와 같은 특정한 장소에서만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그 말은 너무나도 자주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말을 희석시켜버리죠. 어디에서나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이야기 하는 순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일상 가운데서 사라져 버리곤 하죠. 우리가 공기를 의식하면서 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일상 가운데 끊임없이 인식하기 위해서는, 집중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의식할 수 있는 시간들을 따로 떼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더욱 깊게 하기 위하여 시간을 구별하여 만들고 농밀한 시간을 보낸다면, 이 시간의 영향으로 인해 일상 중에 하나님을 더 깊게 의식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것이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항상 잊어먹는 존재거든요. 망각과 실수에서 돌이키고, 중요한 것들을 망각하고 실수할 때마다 이것을 다시 빠르게 전환하는 것이 이뤄져야하죠.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떼어 놓는 것,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 하면서 ‘내가 정말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가? 하나님과 잘 의식하며 살았는가? 더불어 걸었는가?’를 성찰 해보는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시간들을, 일 년의 며칠 정도를 떼어내어 깊숙이 훈련하는 것을 ‘피정’ 혹은 ‘침묵수련회’라고 합니다. 고요 가운데 자기를 되돌아볼 수 시간은, 일상 가운데 하나님을 의식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영성 훈련이고 일상과 영적인 것들을 분리시키지 않고 연결하게 되는 것이죠.


..피정과 영성수련이 일상으로부터 도피라고 비판하지만, 사실은 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에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느끼며 행동하기 위한 감각을 다듬는 과정이다...

 

ⓒ에큐메니안

어두움으로 하나님께 걸어가기

광희: 그렇다면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오성: 영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애매하죠. 모호하고, 사실 완전히 잡을 수 없으며 잡힐 수도 없는 개념이에요. 성경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랬을 때, 그 영에 대해서 완벽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완벽하게 설명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긍정신학의 전통(via positiva) 에서 이야기한다면 영성은 인간에게 깃들어져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그럼 그게 뭐냐 라고 이야기할 때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게 부정신학의 전통(via negativa)인데, 부정신학의 전통에서는 인간 이성의 한계로 인해 어떤 표현을 동원한다 해도 완전하게 다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영은 ○○이 아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은 ○○이다”라고 말할 때는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신비적인 ‘영’을 자신들의 개념으로 한정지어버리거든요. 긍정신학의 전통에서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개념을 너머서는 것들에 대해서 이단이고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긍정신학의 전통이 갖고 있는 장점은 확실성을 주장하는 것인데, 그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까 자신의 경험과는 다른 경험과 생각이 다른 것들, 그리고 이런 경험과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배척하죠.

인간이라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한다면 내 경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나보다 더 크신 분이심으로 내 이성에는 잡히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지요. 결국 우리는 그분을 온전히 전부 알 수 없는 것이 분명하죠.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하나님께서는 넘어서 계신다는 개방성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죠. 샬렘은 긍정신학과 부정신학의 통전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대부분 긍정신학의 전통 속에서 많이 자라왔기에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전통을 강조하죠.

광희: 부정의 전통이 우리 삶에 중요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오성: 부정적인 전통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상처와 고통과 어둠에 대한 경험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상처, 고통, 어둠의 경험을 했을 때, 하나님 존재에 관한 질문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 어둠의 경험들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부재의 경험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어둠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더 갈급하게 찾게 된다고 하면, 하나님 부재의 경험이 하나님에 대한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거든요. 어둠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어떤 갈망이 더 커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죠.

그러나 말로 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너와 같이 계신 하나님을 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여겨요. 오히려 이런 손쉬운 위로는 그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어요. 저는 일단 말로 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같이 아파해주고 슬퍼해주는 것에서 출발해야 된다고 여겨요. 쉽사리 그 사람을 위로하지도 말고, 성급하게 하나님이 없다고  혹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하지도 말고, 우선 슬퍼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같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같이 아파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것 말이죠.

개신교 목회자들이 어떤 상황 앞에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판단을 가지고 손쉬운 답으로 문제를 해결해버리려고 하기 때문에 굉장히 논란이 되고 상처가 되는 발언들을 많이 합니다.


...대형교회 목회자 자신의 성급하고 독단적인 판단에서 나오는 이른 바 ‘망언’은 정말로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런 점에서 사실, 부정신학적 전통의 훈련이 필요로 한데, 자기가 알고 있는 신학적 개념과 경험을 가지고 상황을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왜 고통에 차 울부짖는지를 듣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활동을 하실까?’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행동들,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것들을 분별하고 확신이 들었을 때, 응답을 하는 것이죠.

따라서 귀를 열어놓는 훈련들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사실 영성훈련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자기의 마음과 귀를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경청하는 것, 샬렘에서는 기도어린 경청(prayerful listening)라는 말을 쓰는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기도하는 심정으로 듣는 것이죠. 지금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마음 속으로 하나요?

광희: 네!? (멍하게 듣고 있다가 놀랐다)

오성: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 속으로 그 이야기를 판단하잖아요. 저건 신학교에서 배웠고, 이건 동의가 안되고, 이건 좀 새롭네? 사람들이 대부분 대화를 하면서 그런 작업을 마음 속으로 하거든요. (...역시 기도하는 사람이라, 내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그렇게 훈련이 되어 있지요. 들은 정보를 가지고 빠르게 판단해 대처해야 유능하다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작업을 계속 하죠. 이런 방식은 사실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을 반복하거나 재배치하는 것이죠.

ⓒ뉴스1 이종덕 기자

이것은 온전하게 마음을 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못하는 것이죠. 기도어린 경청을 한다는 것은 그게 아니라.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하면, 자기의 자아를 죽이면서 듣는 것이죠.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지우면서 그 사람의 자리에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야기에 대해서 느껴보거나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죠. 하지만 이게 사실은 쉽지 않은 거죠. 부정신학적인 전통에 따르면 기도는 이런 훈련들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렉시오디비나(Lectio Divina)를 하거나 향심기도(Centering Prayer)과 같이 영성훈련을 할 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확장하거나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비우고 덜어내고 텅 빈 여백의 공간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초청하시는가를 듣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 기도어린 경청이란 것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라기보다도, 타자가 오롯이 나에게로 다가 올 수 있도록 나의 전 존재를 온전히 개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기도를 글로 배웠어요...

광희: 영성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부정 신학적 전통에서 기도를 해보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침묵기도를 하면서도 ‘이게 맞나?’, ‘내가 지금 기도하는 것 맞나?’하는 의심과 불확실함의 유혹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유혹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까요? 익숙하지 않은 부정의 방법들을 체화하는데 필요한 무엇이 있을까요? 이해했다고 다 되지는 않잖아요.

오성: 굉장히 중요한 지적을 했는데, 그 영성훈련이라는 것은 사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거거든요. 그런 점에서 기도하는 몸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침묵기도와 같은 여러 가지 형태의 기도를 하면서 자기를 비울 때, ‘내가 지금 이거 제대로 기도를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르는 경험을 누구나 합니다.

그런 질문이 떠오를 때 한 가지 팁을 드린다면, 역설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도의 여정에 제대로 들어선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침묵기도를 해보기 전에는 그런 질문을 갖지 않았거든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입문의 과정을 제대로 경험하고 있는 거구나.’하면서 견디는 거죠. 애매함과 모호함을 견디는 것이 다양한 형태의 침묵기도를 행하는 문턱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애매함과 모호함을 경험하고 영성일지를 쓰고, 이를 통해 영적 동반(영성지도)를 하게 되면, 이런 공동 분별의 과정에서 처음에 가졌던 질문들은 상당히 사라지게 되죠. 완전히 사라지느냐? 그렇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기도에서 정답은 없거든요. 기도의 과정은 늘 초보의 단계를 다시 경험을 해요.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가면 더 심화된 질문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럴 수 있어요. 그럴 때 겸허하게 ‘나는 항상 초보자이다, 기도에는 전문가가 없다’ 이런 생각을 끊임없이 갖게 되는 거죠. 그 길을 걸어가면서 때때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들을 만끽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부르시는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찾으면서 그 여정을 걷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광희: 신앙의 후배들이 기도하면서 사회선교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해주실 수 있는 말씀들이 있을까요?

오성: 영성이나 신앙이라고 할 때, 사실 우리 일상적인 삶과 신앙이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성과 속, 신비와 저항, 개인과 사회가 같은 말들은 구분을 할 수 있지만 분리되는 것은 아니지요. 개인과 사회를 예를 들면 사회없이 개인 존재할 수 없고, 개인없이 사회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개인과 사회가 분리되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인 이웃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말씀을 따라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이웃의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에큐메니안

우리에게 어떤 사회적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에 대처하고 반응하기 위해서는 그 사건에 대한 철학적, 인문학적, 사회과학적인 분석들을 합니다. 이런 분석과 더불어,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기독교 교회적인 전통을 통해서 이런 유사한 사건들에 신학적으로 어떻게 응답했는가를 탐구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을 하고 난 이후에 행동으로 나아가기 이전에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이런 분석을 하면서, 또 분석 이후에 기도를 해야 되는 거죠. “우리가 정말 이 시기에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르는 것입니까?”

답은 어떻게 나올지 몰라요. 기도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주시는 것들에 대해서 내어놓고 공동 분별을 하는 거죠. 기도하고 분별을 해보니까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난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라는 판단이 설 텐데 이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인가? 그 일을 해야 되는 것인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인가? 우리가 해야 된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이걸 기도하며 묻고 들으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신다고 뜻이 모이면 그것을 해보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나오는 뜻이 정답인가? 그건 몰라요.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분별하고 난 이후에는 그것을 용감하게 하는 거거든요.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행동에 어떤 영향과 결과가 생길 것 아닙니까? 그럼 그 영향을 가지고 다시 그 사이클을 반복을 하는 것이죠. 어떤 영향을 가지고 있는가? 사회적으로는 어떤가? 그것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어떻게 했는가? 이것을 위해서 다시 기도를 하고, 행동하는 그 사이클을 계속 그려 나가는 것이죠.


...성찰과 기도와 행동의 끊임없는 순환에 고정된 답은 없다. 우리는 단정적인 답이 한 방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 이라는 허상으로부터 탈출해야한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이성을 통한 합리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기도로 가져가는 과정은 굉장히 취약한 편이에요. 이게 영성훈련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죠. 그것을 지속할 수 있게 어떻게 기도로 가져올 것인가. 사회문제를 기도로 가져오는 것은 지속적으로 기도를 해오지 않았다면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계속 할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개인이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는 것도 소중합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하면? 샬렘에서 필요한 것들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김오성 목사는 기도의 몸을 만드는 것을 매우 강조했다. 헬스가 자신의 몸을 강화하고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함이라면, 기도의 몸을 만드는 것은 자신을 죽이고, 겸손하고, 비우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샬렘은 기도하는 몸을 만드는 거룩한 피트니스센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았다..


광희: 마지막 질문을 드립니다. 한 신학생이 영성가들을 만나 묻는다는 기획의 인터뷰 요청의 메일을 보냈을 때, 영성가라는 표현을 본인에게 적용시킬 때 부담스러워 하시며 처음에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이것은 모든 인터뷰 대상자들에게서 공통적인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영성가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성: 사회에서 통용되는 ‘영성가’의 개념들이 있잖아요. 위대한 영성가들. 토머스 머튼, 에크하르트, 베네딕트, 프란체스코 등등 여러분들이 있는데, 영성가라는 표현들은 사후적인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삶 전체를 통해서 붙일 수 있는 명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만약 영성가라고 한다면 내가 죽고 나서 내 삶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평가를 할 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이끄시는 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질문하고 분별하는 것이 내가 하고 있는 일이예요. 자신의 내면을 깊게 성찰하고, 사회적인 문제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는가를 지켜보고 증언하는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이고, 그런 점에서 저는 모든 진정한 신앙인들이라면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 그런 일을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야기한다면 모든 신앙인들이 다 영성가가 아닐까요? 그런데 지금 사회적으로 영성가라고 이야기할 때 나름대로 붙여있는 고정관념이나 권위들이 있어서, 저 자신에게 그런 명칭을 붙이거나,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호칭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심정적인 거부감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일부러 어떤 권위를 만들거나 권위를 세우거나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런 호칭이 사람들을 잘못 인도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광희: 많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인터뷰는 7월에 진행이 됐지만, 여러 상황으로 내용을 정리하며 글을 마무리 하다 보니 어느덧 민중총궐기를 하루지난 시점이 됐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어 백남기 농민은 결국 소천하셨다. 여전히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 뿐만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폭로된 믿을 수 없도록 참담한 현실이 가져온 좌절과 절망이 우리를 집어삼켜버렸다. 거대한 악의 구조 앞에서 과연 삶은 가능한 것인가? 이럴 때 ‘영성’을 말한다는 것은 절망으로부터 회피하거나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살만한 엘리트들의 고상한 취미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심과 움직임을 면밀하게 성찰하며 기도하며 행동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음성, 시대의 비명과 절규에 귀를 기울이며 더욱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세상 속으로 투신하여 그 좌절을 회피하지 않고 끈질기게 맞서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영성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 중 하나다. 관상적 활동, 활동적 관상이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광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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