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가 영성을 아느냐?> ①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가 수록된 드렁큰타이거 1집 앨범. |
프롤로그
1995년, 어느 한국인 랩퍼가 미국에서 흑인 랩퍼와 자신의 힙합음악을 들고 한국의 방송국에 찾아왔다. 그러나 아직 힙합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한국에서 그의 음악은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한 PD는 진짜 힙합은 이런 것이라며 ‘룰라’의 노래를 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고배를 마신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4년 뒤인 1999년, 그는 다시 한국에서 새 앨범을 낸다. 전설로 회자되는 그 앨범은 ‘Year of The Tiger’. 위 이야기는 바로 힙합의 제왕, 드렁큰타이거 Tiger JK의 이야기다.
"음악 같지 않은 음악을 이젠 모두 다 집어치워 버려야 해.
우리가 너희들 모두의 귀를 확실하게 바꿔줄게. 기다려.
하하 참으로 놀라와 진짜인 우리가 돌아와 조금씩 너희가 있는 곳에 이제 서서히 올라가 거기가짜 거기 있어봤자 진짜를 보여줄게 우리가 거기 닿자마자"
(드렁큰타이거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中)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는 대중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그동안 왜 한국에 랩과 힙합음악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댄스곡이 주류였던 당시 랩은 노래 사이의 양념 정도의 수준으로 댄스곡과의 경계가 모호했다. 힙합은 그저 PC통신 동호회에서나 다뤄지는 ‘비주류 음악’이었다.
이런 때에 그들의 가사처럼 ‘진짜’가 등판했다. 이제 더 이상 힙합은 댄스의 양념도, 비주류도 아닌, 대중에게 어엿한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다. 댄스로부터 독립한 한국힙합은 끊임없는 변태의 과정을 거쳐 진화했다.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인 ‘쇼미더머니’가 방송되자마자 관련음원이 음악 차트를 싹쓸이하고, 한여름에 마치 캐롤처럼 거리를 평정하는 것을 보면, 음악시장에서 힙합이 얼마나 거대한 괴물로 진화했는지 느낄 수 있다.
이제는 누구나 힙합에 대해 한 두 마디는 할 수 있는 시대다. 사람들은 오버·언더그라운드의 지형, 힙합음악의 유입 시기, 개인 선호와 취향에 따라 서로 다른 기준으로 힙합을 즐기고 있다. 그 와중에 재밌는 것은 여타 다른 음악 장르와는 다르게 유독 힙합에서 ‘진짜’에 대한 자부심(일명 힙부심)이나 정체성 논란이 뜨겁다는 것이다.
'언프리티 랩스타' 화면 갈무리. |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온라인 힙합커뮤니티를 살펴보면 각자의 기준으로, “이것이 진짜 힙합”이라고 주장하며, 상대방의 귀를 일명 ‘막귀’(음악을 들을 줄 모르는 막 되먹은 귀)로 규정하고 신입 회원을 무시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싸움은 비단 팬들끼리의 충돌로 그치지 않는다. 아티스트들도 자신의 노래를 통해 ‘진짜 힙합’을 주장하며, 공개적으로 서로의 음악이나 행동을 주고받는 ‘디스전’은 힙합에서만 볼 수 있는 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꼭 그렇게 해야만 왠지 힙합 같다.(이 좁은 한국 땅에서 마주치면 얼마나 뻘쭘할까...)
아무튼 서로가 진짜라고 주장하는 힙부심의 전장과 동시에 ‘쇼미더머니’, ‘언프리티랩스타’처럼 참가자의 랩을 평가하고 우승자를 가려내는 과정들을 보며 시청자들은 힙합이란 무엇일까? 좋은 힙합은 무엇일까? 힙합에는 무슨 기준이 있을까? 저게 잘하는 거 맞어? 하는 물음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실로 드렁큰타이거의 도전,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가 심어 놓은 힙부심의 씨앗은 17년이 지나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코에 걸면 ‘코 영성’ 귀에 걸면 ‘귀 영성’?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라는 질문에 힙합 아티스트들은 대부분 “알아, 이게 진짜 힙합이야”라고 반응 할 것이다. 나는 이 질문에 “난 힙합을 몰라”, “사실 난 가짜 힙합이야”, “당신이 진짜야” 라는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 혹 힙부심이 졸렬 해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힙합뿐만 아니라 그렇게 정체성 논란과 자부심이 뜨거운 주제를 기독교 안에서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영성이다.
“○○○목사님은 영성이 깊더라”는 말 들, ‘영성집회’, ‘영성수련회’, ‘영성일기’, ‘영성캠프’ 등의 프로그램, 또 ‘○○○의 영성’과 같은 신학세미나 등 영성은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바야흐로 영성의 홍수시대다.
영성은 실로 아무 곳에나 붙여도 어색하지 않고 멋이 있어지는 마법의 접미사다. 스타벅스의 영성, 오호츠크해의 영성, 강백호의 영성 등 다소 과장과 비약이 있지만 정작 홍수에서는 마실 물을 찾기가 어렵다는 말대로 영성이 범람하여 그 뜻의 명확한 정의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미 이 용어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 사용이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환경에 따라 잘 체감되지 않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기에 쉬운 통계로 약간의 동의를 얻고자 한다.
영성이라는 단어가 책의 제목에 붙거나 주제어로 출간된 단행본의 폭발적인 증가를 살펴보자. 1980년대에는 25권이었지만, 90년대 221권, 2000년대에는 653권으로 그리고 현재 아직 7년이 채 안된 2010년대에는 564권이 출간되는 엄청난 증가폭을 보였다.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 '영성'을 키워드로 검색해봤다. 수 많은 영성 관련 책들이 검색됐다. |
영성은 단순히 기독교만의 유행이 아니라, ‘감성’과 ‘힐링’과 같은 사회적 현상에 가까우며 그 담론은 본래 고향이던 교회의 벽을 진즉에 넘어섰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영성의 탈기독교화는 더욱 분명하다. 영성은 종교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미국 구글갤럽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를 ‘보다 영적인 것을 찾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들은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그저 종교적인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나 치료되지 않는 아픔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필자가 영성에 주목하는 이유도 그 지점이다.
필자는 영적인 냄새를 좋아한다. 그 냄새를 좇아 꽤 여러 곳을 다녔다. 전통적이다 못해 지나치게 보수적인 교회, 예언이 터져 나오고, 집회 도중에 천사가 금가루를 뿌리고 있는 환상을 보는 사역단체, 철거민과 함께 거리에서 드리는 선교센터 등을 가리지 않고 다녔다.
4차원의 영성에서 사회적 영성, 방언기도부터 관상기도 모두가 관심사이며 CCM부터 떼제 노래, 시커스예배에서 리마예식서까지, 기도원에서 수도원이 나의 신앙의 여정이다. 대학원에 들어와서는 그 관심을 이어 ‘영성신학회’를 조직해 영성에 관심이 있는 원우들과 함께 공부중이다.
영성의 세계는 너무도 넓어서 학문적으로나 목회적으로나 말하는 방식도 접근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필자의 경험을 반추해보면, 어떤 곳에서는 큰소리로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열정’을 말할 때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또는 세상과 근심에 대한 ‘초연함’을 말할 때 사용한다. 또 다른 곳에서는 마치 드래곤볼에 나오는 전투력측정처럼 보이지 않는 기운(영빨)의 ‘척도’로 사용한다.(호오! 영성이 42,000까지 올라갔네요) 그것뿐이겠는가? 몸에 배어있는 ‘경건’의 태도,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는 구별되는 ‘성질’, 고대 문헌을 통해 전수되는 ‘지혜’, 인간 경험의 ‘총체’ 등등 수많은 곳에서 각자의 의미로 영성을 사용한다.
너무도 귀가 얇은 나는 여기에 있으면 “이게 진짜다” 저기에 있으면 “저게 진짜다”라고 확신에 차 몰두하며 영부심을 잔뜩 부렸다. 그러나 얄팍한 영부심은 냄비처럼 금방 식어 내팽겨 쳐지고 다른 곳을 찾기를 반복했다.
예수전도단 캠퍼스 워십. (출처: 예수전도단) |
나는 영성이 계속 궁금하다. 영성은 이미 기독교를 벗어난 단어이지만, 나는 아직 내가 있는 자리, 곧 기독교에서 영성의 의미를 더욱 쫓고 싶다. 왜냐하면 적어도 나에게 영성이란 내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 경험한 하나님 체험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관심을 기독교 영성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다. 기독교 안에서 영성의 의미를 묻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긴 여정이 될 것 같다. 기독교 안에서만 해도 그토록 다양한 영성의 용례를 보면서 정직한 신앙인은 물음을 던지게 될 것이다. ‘영성이란 뭘까?’, ‘왜 영성일까?’
나는 아직 영성 꿈나무, 영성새내기, 영알못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영성은 어떤 방식으로든 체험과 경험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영성의 이해가 그토록 상이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겠다.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영성은 영원히 그 의미를 합의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영성은 글만으로는 알 수 없다. 영성비급이 있다한들 수행과 실천이 없다면 영성 B급에 머무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탁월한 영성학자가 깊은 영성을 담보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책을 덮고 도서관 밖으로 나가보려고 한다. 자신의 방법으로 영성에 대해서 물으며 길을 찾고, 살고 있는 선배들을 만나서 얘기를 좀 들어보려고 한다. 가서 물어보자.
“너희가 영성을 아느냐?”..는 반말이고 건방지니까.... “영성은 무엇인지?”, “왜 영성인지?” 좀 들어보고자 한다. 나보다 먼저 앞서서 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존을 던져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지혜는 분명 나를 보나 넓은 지평으로, 깊은 성찰로 인도해줄 것이다. 그러다보면 “너희가 영성을 알아?”라고 누군가 나에게 물어보면 지금보다는 괜찮은 대답들을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여정을 출발하면서 동반자인 독자들에게도 물음을 던지고 싶다.
“너희가 영성을 아느냐?”
(는 에큐메니안 박준호 기자가 지어준 제목임을 밝힙니다)
이광희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