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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박형규 목사를 추모하는 이해학 목사의 편지

기사승인 2016.08.22  10:5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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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규 목사,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박형규목사님 당신은 큰 웃음 이었습니다 

박형규 목사님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많은 이들이 큰 별이 떨어졌다느니, 큰 바위얼굴을 잃었다느니, 큰 스승이 가셨다고 애석해 한다. 나는 박형규 목사님 소천 소식을 들으며 아하 큰 웃음을 잃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분은 늘 웃었다. 박장대소할 때나 눈치 안보고 낄낄대는 웃음도 있었지만 주로 빙긋이 웃는 묘한 웃음이다. 나는 박 목사님의 웃음을 응큼한 웃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분은 좋아도 웃음이요, 싫어도 웃음이며 찬성이나 거절도 웃음으로 표했기에 그 웃음의 색깔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자유의 낙천성이 그분의 웃음을 발전시켰겠지만 많은 체포와 구금사이에서 조사받을 때 웃음으로 대신하는 것 때문에 수사관들의 분노를 폭발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하셨다. 나는 박 목사님의 이 모든 웃음을 통 털어 큰 웃음이라고 부른다.   

 

박형규 목사님!

제가 71년 위수령 파동 시 문교부장관 명에 의해 한신대에서 강제 제적되어있을 때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Korea Metroporitan Communiti Organization;KMCO)의 부름 받아 훈련실무자가 되었습니다. 그때가 1973년 제 나이 30세 이었습니다. 목사님 패거리의 일원이 된 것이 감옥 들어가는 은총을 넘치게 받은 운명인 것을 뒤늦게 알았는데 우리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면 나는 단연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처음부터 당황하였습니다. 실습한답시고 청계천 슬럼가를 몇 바퀴 돌며 정일우(John vincent Daly)신부와 동거하는 제정구와 잠 몇 번 자고 나니 남산야외음악당 부활절 삐라사건이 터졌습니다. 이어 박 목사님과 권호경, 남상우, 김동완, 나상기, 황인성, 이상윤, 정명기 등 청년들이 구속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만든 나의 훈련은 목요일마다 열리는 재판 날이면 사람들을 모아서 기도회 하는 일 이었습니다. 목사님, 아십니까? 전혀 예상하지 않게도 그 일이 당시에 반체제 인사들의 집합장소요 언로의 진원지가 된 목요기도회로 발전된 것입니다. 기독교회관 목요기도회. 70년대 모든 구속자 가족들의 마른 목을 축이고 국가폭력의 횡포에 짓눌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숨을 쉬고 민주주의의 공감대를 확산하는 속에서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였습니다. 

빈민선교에 대한 교재는커녕 훈련 메뉴얼도 없는 상태에서 바로 현장에 투입되어 미션만 받았습니다. 지역사회의학(communiti Medicine)을 실현할 병원을 설립하라는 것 이었습니다. 총도 없이 훈련도 안 한 채 전쟁터에 나가는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오재식 선생을 통해 전설 같은 미국의 흑인빈민을 조직한 알렌스키(Saul D. Alinsky) 이야기를 한번 들었을 뿐입니다.

자본가와 의사들만 살찌우는 현재의 병원체제에서 주민이 주인이 되어 투표를 통해 이사를 뽑고 이사들이 주민을 위해 병원을 운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권호경 전도사님이 월요교회를 통해 주민들에게 받아놓은 병원설립 요청서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박형규목사, 부산복음병원 장기려박사, 연세대 예방의학교수 김일순박사, 지역사회의학 전문가 시빌리 선교사 등이 위원회를 꾸리고 병원 설립 모금을 하고 있었으며 WCC 책임자가 방문해 병원기자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일은 주민들을 동원하여 시청에 압력을 넣어 병원 부지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역병원 의사들의 반대와 권위주의적 관료들이 우리에게 병원부지를 할애할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정보원들이 우리를 빨갱이라고 소문을 내고 주민들을 선동하여 흩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박목사님께서 이런 실패의 보고를 받으시며 웃으시는 묘한 웃음을 있지 못 합니다. 저는 오랜 후에야 지역사회의학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중국을 비롯하여 리비아 등 제3세계 나라들이 자본 중심의 의료체계가 아닌 사람중심의 의료협동시스템을 유행처럼 실시하고 있으며 특히 쿠바는 오늘까지도 전국민의료혜택을 성공적으로 실시하고 있어 돈이 없으면 치료받지 못하는 미국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협동조합으로 더불어 사는 사회건설의 꿈이 수도권의 흐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민중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능력을 길러주는 지원공동체로서의 새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1973년 3월 1일에 창립한 주민교회입니다. 

75년 주민교회 설립예배 설교하시는 모습

축복으로 신물이 난 교회들이 모자라 또 교회를 세워야 하나하고 반대하는 몇 실무자들이 논쟁할 때에 목사님은 웃기만 하셔서 나는 교회를 설립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주민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민교회도 못 말리게 번잡스런 아이같이 사건을 저지르며 별볼일 없는 떼거지들이 겁 없이 중심부를 공격하는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오마이뉴스가 정리한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민교회는 '빨갱이 교회'였다. 1973년 3·1절에 교회를 창립하자마자 문제를 일으켰다. 첫 성탄절에는 김포공항에서 기념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 20명 전원이 경찰서에 연행됐다. 주민교회 교인들이 김포공항에 예수님이 오시기를 간구한 것이다. 교인들은 김포공항을 외국 자본이 우리 민족의 고혈을 빨아가는 통로이고 대일 굴욕 외교의 상징이라 생각했다. 결국 이듬해 1월 이해학 목사(당시 전도사)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영장 없이 구속돼 징역 15년형을 받았다. 또 매해 3·1절에는 '반정부 인사'로 통하는 김근태・문익환・박형규・한승헌・한완상・함석헌 같은 이들을 교회 강단에 세워 정치적 암흑기에 지역사회에 의식의 등불을 켰다.

20~30명 되는 교인들도 공안 당국에 시달려야 했다. 교인 모두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가정집과 직장까지 조사를 받았다. 직장을 잃고 전셋집에서도 쫓겨나는 이들이 많았다. 교련 교사는 일요일이면 아예 교회 앞에서 학생들을 돌려보냈다. 반공 단체들은 '이해학을 추방하라'라고 쓴 머리띠를 두르고 삐라를 뿌렸다. 협박 전화와 편지로 가족까지도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경찰의 압력을 받아 온 건물 주인도 주민교회에 더는 세를 줄 수 없다며 쫓아냈다. 경기도 성남 수진동의 빈민촌에 뿌리를 채 내리기도 전에 주민교회는 사라지는 듯했다. (주민교회는 최근까지도 빨갱이 교회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지만, 그동안 주민교회가 받은 억압은 공권력의 부당한 선교 탄압이었다는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판결을 지난 2007년 받았다.)

직업 상담실을 개설해 노동자를 해고하여 취업의 커미션을 취하는 악순환을 끊고자 하였고, 실업자대책위원회에서는 성남시에 건의해 1300여 명이 생계 지원 사업에 참여하도록 도왔다. 여신도회는 이웃들과 함께 생필품을 저렴한 가격에 공동 구매하는 소비자 운동도 펼쳤다. 그리고 주민교회가 개척 전부터 꿈꾸던 의료 사업을 추진했다.

박형규 목사를 비롯해 부산 복음병원 장기려 박사와 연세대 김일순 박사, 시빌리 선교사 등 기독 의료인들이 힘을 합쳐 성남 지역에 '지역 사회 의학'(Community Medicine) 병원을 설립하려 하였다. 의료 취약 계층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생각해 교계 안팎으로 모금 활동을 펼치고, 독일 등 세계 교회들에도 도움을 구했다. 그렇지만 성남시가 비협조적이었고, 지역 의료인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부지를 확보하지 못해 병원 설립을 포기해야 했다. 그간에 위원회가 성남지역병원 설립을 위해 모금한 돈은 서울 금호동 복음병원을 짓는 데 쓰였다."

이해학 목사 (성남주민교회 원로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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