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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이전으로 돌아간 사법부

기사승인 2016.08.02  11:4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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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호 칼럼>

사진출처 : 연합뉴스

요즘 상식 밖의 일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구속돼 6개월이나 감방살이를 한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씨가, 1심 재판 선고에서 무려 5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사건의 성격이나 그 동안의 판례를 보더라도, 벌금이나 집행유예를 예측했는데, 빗나가도 너무나 빗나갔다. 검사 구형 8년인데 3년이나 깎아주었으니 많이 봐준 거 아니냐는 듯한 판사의 표정이었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경찰이 검찰로 송치할 땐 소요죄까지 적용했는데, 그건 뺐다니 정말 봐 주긴 많이 봐 준 모양이다.

그런데 그렇게 존속살해 범죄에나 적용될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형에 해당한다는 한상균 위원장의 범법행위를 살펴보면, 정말 별 것 아니다.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위원장 책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잘 아는 대로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이 주축이 된 노동운동 단체로 비정부조직(NGO)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 결사의 자유에 따라 조직된 단체로, 자체 규약에 따라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다. 그 활동을 원활하게 하고 보호하여 헌법이 정한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그 법의 명칭이 ‘집회와 시위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나 ‘집회와 시위에 관한 처벌의 법률’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법에 의해 한상균 위원장은 구속되고 기소된 것이다. 부가로 적용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이나 공무집행방해는, 집회와 시위에 불가피하게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상대적인 것이다. 즉 경찰이 과잉대응을 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로, 원인을 제공한 경찰에게 근본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내가 경험한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1990년 벽두에 노태우, 김종필, 김영삼의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생기고, 그에 대응하여 군사독재로의 회귀에 위협을 느낀 남한사회 모든 운동세력은 총결집하여, 민자당일당독재분쇄와민중기본권쟁취를위한국민연합(이하 국민연합)이라는 긴 이름의 투쟁연대조직체를, 그해 4월 21일에 결성하게 된다. 해직된 상태로 전교조 부위원장이었던 내가 상임집행위원장의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엄청난 대정부투쟁에 들어가게 되고 나는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수배가 된 상태로, 숨어서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대정부투쟁의 방법은 주로 집회와 시위로, 당시 전대협 등 학생운동이 주력으로 나서고, 노동자 등 단체들이 뒤를 따르는 형국이었다.

연일 집회와 시위가 도심에서 벌어지고, 경찰은 최루탄을 쏘고 학생등 시위대는 화염병이나 돌 등을 던지며 저항하던 때라, 서로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여러 번에 걸쳐 국민대회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인 집회와 시위가 격렬하게 열리고, 그러한 정세는 다음 해 4월까지 진행되었다.

그런데 다음 해 1991년 4월 26일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이 여러 형태로 저항하던 중, 명지대 1학년 강경대 학생이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대정부투쟁의 파도는 쓰나미가 되어 전국을 강타하게 된다.

사진출처 : 오픈아카이브

국민연합은 곧 고강경대열사살인규탄및책임자처벌을위한비상대책위원회로 전환하여 싸움을 이어갔는데, 나는 자연스럽게 이 조직의 집행책임자가 된다. 이 싸움은 천신만고 끝에 한 달 만인 5월 20일, 강경대 학생의 장례식을 광주 망월동 민주열사 묘역에서 마무리할 때까지, 전무후무하게 격렬하게 진행돼, 무려 12명이 투신 및 분신으로 목숨을 던지며 항거했고, 전국이 혁명적 분위기에 싸이게 된다. 이에 놀란 민자당 정권은, 강경대 학생을 죽인 경찰에 대해 책임을 물어 해당 경찰서장은 물론 경찰청장까지 해임조치하고, 당시 경찰을 책임지던 내무부장관과 국무총리의 경질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당시 강경대 학생에 대한 경찰의 쇠파이프 폭행살인을, 부검 없이 검안과 CT 촬영 필름 판독 등으로 확인하고, 스스로 인정하고 책임을 진 노태우 정권에 비해, 기자 등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물대포를 불법으로 쏘아서, 백남기 농민이 뇌사상태가 되었는데도 뻔뻔스럽게 나 몰라라 하고 있는 현 정권과 비교해 보면, 지금이 훨씬 더 악랄하고 폭압적이라 할 수 있다.

장례를 치르고 나는 다른 지도부와 함께 당시 유일한 피난처였던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단식농성으로 항거하며 90-91년 대 투쟁을 정리했는데, 우리 운동세력이 투쟁의 과정이나 성과를 정치적으로 수렴하거나 스스로 정치세력화하지 못한 한계도 있었지만, 박홍, 김지하의 반역, 유서대필 사건을 조작한 공안검찰, 정원식 총리내정자에 대한 밀가루 계란 투척 해프닝을 과대포장해서 국민을 속인 조선일보 등이, 투쟁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다. 결국 나는 상임의장 한상렬과 책임을 지기로 하고, 그해 6월 25일 명동성당에서 끌려 나가게 된다.

어찌 보면 단식하며 조계사에서 버티다가 경찰에 연행된 한상균 위원장과 마지막은 비슷한 경로인 것 같아, 한상균 위원장이 끌려 나올 때 몹시 화나고 안타까웠던 느낌이 새롭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경찰로 끌려갔고, 검찰로 넘겨져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2년 동안 내 책임 아래 이루어진 일은 엄청난 것이었다. 연일 집회와 시위가 전국 여러 곳에서 일어났고, 화염병 등으로 불바다를 만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쪽도 많이 다쳤지만, 경찰의 피해도 대단했다.

병원으로 후송돼 전치 3주 이상의 부상을 당한 경찰의 수도 수백에 이르렀다. 검찰은 나와 한상렬 의장을 집회와시위에관한법률과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으로만 기소했던 것 같다. 소요죄는 검토 대상도 아니었고, 공무집행방해죄도 적용하지 않았다. 집회와 시위를 막거나 방해하는 행위는 경찰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 보장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한 상식적 판단이었다.

사실 폭력행위도 같은 맥락에서 판단해야 한다. 집회와 시위 자체가 광의의 합목적적 폭력행위 이고, 집회, 시위를 보장해야 한다는 기본권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도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적용은 재판 내내 쟁점이 되었다. 그래서 검찰은 폭력의 피해자라는 수백 명의 경관을 법정에 출두시키는 등의,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법원은 내게 그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폭력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고, 나는 1년 8개월을 살고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 사면 복권되어 자유세계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한상균은 5년이란다. 군사독재시절보다 엄청난 형량이다. 법 적용도 양형도 모두 정치적 탄압을 검찰과 법원이 자청하는 전형적인 독재체제의 대표적 행태이다.

지난 13일 발표된 ‘한상균을 석방하라 - 민주주의 살려내자’ 시국회의의 시국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민주주의는 죽어가고 있다. (중략) 법치의 마지막 보루여야 할 사법부는 헌법을 깔고 앉아 권력의 입맛대로 판결문을 쓰고 있다. 한상균 위원장 5년 선고, 흔들거리던 민주주의 시계의 초침마저 멈춰 버렸다.’

군사독재 시대보다 더 비상식적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 필자 이수호.

 

 

 

그는 전 전교조 위원장, 전 서울시 교육위원, 전 민주노총 위원장, 전 방송문화진흥회(MBC) 이사, 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전 박원순 서울시장 공동선거대책위원장, 현 한국갈등해결센터 상임이사로 활동 중에 있다.

이수호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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