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3 (사도행전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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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이 임하시자 나타난 현상은 하나의 상징이다. ⓒGetty Images |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 |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나 자신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이런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오순절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제자들에게 강림하셨을 때 나타났던 방언 현상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와 연합, 성령에 의한 진정한 소통과 하나됨이라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오순절을 지키러 전 세계 곳곳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디아스포라 유대 공동체에 속한 유대인들도 있었고, 이방인이면서도 유대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9-11절에 의하면, 이들은, 지금의 이란, 이라크, 튀르키예, 이집트, 리비아, 로마에서 온 유대인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 크레타인들과 아리비아인들이었습니다. 오순절 당일 이들에게도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장 7-8절입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로 갈릴리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를 포함해, 가나안 전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당시 히브리어식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람어는 주전 6세기 바벨론 제국 치하에서 공용어로 사용되던 언어였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지나는 동안 유대인들도 이 아람어를 받아들여 줄곧 사용해 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물론 아람어를 쓰셨습니다. ‘달리다굼’, ‘에바다’, 이런 말들이 모두 아람어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당일 갈릴리 지역 출신의 제자들은 아람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터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강림하시자, 그들의 입술에서 평소에는 쓰지도, 알지도 못하던 말이 갑자기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들은 아람어로 말하려 했을 뿐인데, 입술에서는 다른 언어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 언어들은 오순절을 지키러 전 세계 곳곳에서 온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자기 지역에서 쓰던 언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전 세계 곳곳에서 온 무리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아람어를 쓰는 제자들이 하는 말이 자기들의 언어로 들려서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성령께서 통역사가 되어 제자들과 이들 사이를 막힘 없이 온전히 소통하게 하신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굳이 자기 언어를 버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아람어를 버린 게 아닙니다.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모든 이들도 각기 자기 언어를 버린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서로 소통이 가능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시고 역사하시니 일어난 기적이자 신비였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고유한 인격을 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언어, 우리의 문화, 우리의 역사, 우리의 기질과 특성, 우리의 기억을 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것들의 그림자와 불완전함을 의식하면서 경계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을 초월하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우리와는 다른 것들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성령이 강림하셨다고 전 세계 곳곳에 거주하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이 선택한 단 하나의 인종, 단 하나의 민족만 살아남는 게 아닙니다. 단 하나의 인종, 단 하나의 민족으로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서로 분리된 채로 떨어져 살 이유가 없어질 뿐입니다. 반대로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고 함께 살아야 할 이유가 넘쳐날 뿐입니다.
성령의 이런 역사는, 제국의 정치 이념과 통치 행위와는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제국의 정치 이념과 통치 행위, 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느나, 그 본질은 결국, 창세기 11장에 기술된 바벨탑 사건이 잘 말해 줍니다. 바벨탑 사건의 배경과 관련해 11장 1절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였고, 말이 하나였더라.”
제국은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하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무엇보다 언어를 통제했습니다. 제국이 지정한 하나의 언어를 표준어로 삼아, 제국에서 통용되는 각종 주요 책자와 문서와 정보지들을 하나의 언어로 통일시켰습니다. 제국의 치하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무조건 제국의 언어를 습득해야 했습니다. 바벨론은 아람어를 지배언어로 삼았습니다. 헬라제국은 헬라어를 지배언어로 삼았습니다. 로마는 라틴어를 지배언어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로 통일된 언어로, 제국의 황제와 권력자들이 하려는 일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시 창세기 11장 3, 4절입니다.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본질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만의 왕국으로 대체하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예를 높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드러하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 자기 영속성을 추구하려는 데 있습니다.
제국의 정치 이념과 통치 행위의 본질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제국이 황제를 신성화하고,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여 영원한 제국을 만드는 데 주력했습니다. 문제는 그 방법이 매우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절대 복종을 요구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군사력으로 강제했습니다. 물론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 제국은, 항상 세계의 평화를 구현하는 나라인 것처럼 굴었고, 로마에 복종하면 평화와 안전이 보장된다는 거짓을 선전했습니다. 제국은 사실 권력을 쥔 자들의 욕망을 위해 존속될 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무력 혁명을 통해서라도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 했던 게 이해가 갈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해 바벨탑을 쌓으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창세기 11장 7절입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한마디로 언어적 소통을 가로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이 막지 않으셨어도 그들은 결국 불통과 분열의 양상을 드러냈을지 모릅니다. 탑이 다 건설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누가 그 탑 꼭대기 방을 차지할 것인지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내가 그 탑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며, 영원히 끊날 것 같지 않은 논쟁, 어떤 합의점도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논쟁에 서로 휘말리지 않았을까요?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는 마음가짐으로는, 자기 주장을 강화하려는 마음가짐으로는, 아무리 대화해 봐야 불통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어차피 실패할 대화를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미리 막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의 날에 일어난 방언 현상은 이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습니다. 그 날에 언어는 하나가 아니라 제 각각이었습니다. 언어가 하나로 통일되지도 않았습니다. 논쟁도 없었습니다. 다만 오해는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3절을 보십시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면, 방언 현상은 그저 취기에 지나지 않을 터입니다. 성령의 강림과 권능을 이해하지 못하면, 방언 현상은 그저 언어적 특이 현상에 지나지 않을 터입니다. 성령이 이끌어내시는 참된 소통에 무지하면, 방언 현상은 오히려 언어의 혼돈 내지 언어의 착란에 지나지 않을 터입니다. 그러므로 방언 현상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 이하, 베드로의 강론에 주목해 봅시다.
베드로는 이런 말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2장 15절입니다.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연이어 베드로는 선지자 요엘의 말을 인용합니다. 2장 17절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방언 현상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의 통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육체에 부어질 성령의 동일성입니다. 인종, 민족, 계급, 계층, 지위, 성별, 성향, 특질을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임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은 모두 같은 성령이십니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갖가지 차이를 뛰어 넘어 그들 모두를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이 하나의 성령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백이명의 제자들 개개인에게 임하신 성령, 오늘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이 모두 동일하신 성령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방언 현상에서 또 중요한 것은 언어의 통일이 아니라 선포되는 그 메시지의 동일성입니다. 사도행전 2장 11절에서 방언 현상을 목도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성령은 우리를 어떻게 온전한 소통에 이르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메시지를 토대로 소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큰 일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선지자의 말을 더 들어 봅시오.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면,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예언, 환상, 꿈, 이것은 모두 우리의 개인적 소망이나 미래 전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의 큰 계획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방언 현상과 관련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바로 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역사를 선포하고, 이어가고, 완성해 가기 위해 우리를 소통하게 하시고, 연합하게 하십니다.
이 성령이 누구에게 먼저 강림하셨습니까? 바로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특별히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이었던 사도들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성취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그 의미를 가르치는 일을 최우선적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지금 그 과업의 첫 발을 뗀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전방위적 확산과 완성에 있음을 보았고, 들었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2장 22절에서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약술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 나타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그분이 곧 우리의 메시자임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다시 살리셨고,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을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곧 그분을, 우리가 살아갈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새로운 자기 정체성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고 받아들여 주시는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총을 받고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강림하시자, 바로 이 메시지가 동일하게 사도들의 입술을 통해 선포되었습니다. 그 의미가 밝혀졌습니다. 방언 현상으로 나타난 성령의 권능은 결국 복음의 메시지에 관한 사도들의 선포와 가르침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이 사도들의 선포와 가르침이 성령의 권능을 통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훼손되거나 왜곡되는 일 없이, 동일하게 전달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첫 강론이 끝나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장 41절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며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백이명의 제자들이 삼천명의 제자들로 확장되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통해 사도들의 선포와 가르침이 계속되자 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이 세상의 나라들, 이 세상의 집단들,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한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이 거룩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이 거룩한 공동체는 세상의 것과 어떻게 다릅니까?
사도행전 2장 42절 이하를 보십시오. 언어, 인종, 민족, 계급, 계층, 지위, 성향, 특질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그 차이를 뛰어 넘어 친밀한 교제를 이어갑니다. 성찬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사랑의 식탁 교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합합니다. 함께 기도에 전념합니다. 사도들을 통해 기사와 표적이 나타납니다.
더 놀라운 것은 44절입니다. 성도들이 서로의 삶을 공유하되,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줬습니다. 이것은 공산주의를 정치 이념으로 표방한 권세자들과 나라들이 그렇게 꿈꿔왔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애초에 인간의 구상과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내기에는, 인간은 너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이율배반적이며, 탐욕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총칼로 강제한다고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피의 혁명으로 구현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나타난 이 놀라운 사랑의 연대와 섬김과 나눔은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의 때에 태동한 이 거룩한 공동체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였습니다. 46-47절을 보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 곧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러 그분과 친교하는 게 이 공동체의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해야 그것이 성도들 간의 성숙한 친교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이웃을 섬기고 돌보고 사랑하는 일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전위대가 되어 이 세상 한 복판에 등장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이념, 억압과 폭력, 탐욕이 득세하는 이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변화시키려, 사도들의 가르침, 곧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고, 성령의 권능을 의지하여, 세상으로 나아가는 이 거룩한 공동체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복음을 선포하며 세상을 섬기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서도 재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시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