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에 굴복하지 않는 선한 의지(시편 31:1-8)
하나님을 향한 호소와 찬양으로 이뤄진 시편은 다른 성서의 내용과는 명확히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말씀이 아니라 하늘로 올리는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편은 누구든 각자의 처지에서 그 뜻을 음미하며 자신의 깊은 내면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여지를 열어줍니다. 물론 세계에서 고립된 채 별도로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분투하며 고통을 겪는 사람 자신의 처지에서입니다.
오늘 시편은 한 편의 시 가운데 그 전반부입니다. 한 편의 시로서 31편은 크게 두 부분(1~8, 9~24)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두 부분 모두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며 드린 기도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증하며 감사 찬양을 드립니다. 첫째 부분이 개략적이라면 둘째 부분은 훨씬 구체적입니다. 오늘은 그 전반부의 말씀을 함께 음미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고통을 호소하며 안전한 공간을 찾고 싶어 합니다. 더불어 누군가 그 고통의 호소를 들어주고 있다는 믿음이 들고 안전한 공간 안에 있다고 느낄 때 안도하며 감사합니다. 오늘 시편은 그 마음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그와 유사한 상황 가운데 처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어떤 사정인지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 주인공은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고 하나님의 의로움에 기대어 호소합니다. 피할 바위가 되고 구원해 줄 성채가 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에 부합하게 곤경에 처한 주인공을 구해주시리라는 믿음을 표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 구원의 손길을 체감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1~3).
이어지는 고백은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암시하며, 더불어 더욱 절절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우상을 믿는 사람들과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신을 대비하는 가운데 자신이 겪고 있는 수치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암시하고 있고, 그것이 깊은 영혼의 아픔이 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원수들의 손에 넘기지 않고 자신을 평탄한 곳에 세워주셨다고 고백합니다(6~8).
시편은 그저 논리적 구성 자체만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을 따라갈 때 비로소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애초 시인의 마음과 달리 시를 대하는 이의 마음에 따라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가능성 또한 안고 있습니다. 마주하는 독자 내지는 청중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할까요? 그것이 시적 언어가 갖는 매력입니다. 어떤 텍스트도 예외가 아니지만 시적 텍스트는 그 상상력의 공간을 훨씬 폭넓게 보장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 여지 안에서 몇 대목을 주목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부끄러움, 수치라고 고백합니다(1). 부끄러움은 대인관계 안에서 겪는 고통입니다. 부끄러움은 우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때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잘못을 알아차렸을 때 느낄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자신에게 강요된 어떤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수치를 겪는다’고 할 때의 상태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수치는 바로 그렇게 강요된 고통입니다. 그야말로 영혼의 고통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고통의 상황입니다(7). 존재를 부정당하는 고통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강요된 고통이라는 것은 우상 숭배자들과 자신을 대비하는 대목에서 더욱 분명해 보입니다(6). 우상 숭배자들이 자신에게 강요한 고통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고통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호소하면서 시인은 말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인도해 주시고 이끌어 주십시오”(3).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상황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상황이라는 인식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이 자신에게 강요하는 수치가 그저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사태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태일까요? 오늘 시편의 후반부 서두에 그 상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울다 지쳐, 내 눈이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내 몸과 마음도 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는 슬픔으로 힘이 소진되었습니다. 햇수가 탄식 속에서 흘러갔습니다. 근력은 고통 속에서 말라 버렸고, 뼈마저 녹아 버렸습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한결같이 나를 비난합니다. 이웃 사람들도 나를 혐오하고, 친구들마저도 나를 끔찍한 것 보듯 합니다. 거리에서 만나는 이마다 나를 피하여 지나갑니다. 내가 죽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으며, 깨진 그릇과 같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 옵니다. 사방에서 협박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나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내 생명을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밉니다.”(31:9~13)
마치 욥의 탄식을 듣는 것 같습니다. 병고(9~10)에 더해 적대자들로부터 비방을 겪고, 친구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처지에 빠져(11), 결국은 죽음의 위협까지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탄식입니다(12~13).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 아니 그저 죽고 싶은 마음뿐인 처지에 대한 탄식입니다. 주인공이 겪고 있는 고통의 실체, 강요당한 수치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고통 가운데서 시인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호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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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 속에 탄식은 하나님을 향한다. ⓒGetty Images |
후반부에 그 반전이 더욱 극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이미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습니다. 절망적인 고통의 탄식 가운데서도 구원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는 희망의 의지가 강력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절망의 탄식이 깊을수록 오히려 구원의 희망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어떻게 그 역설이, 그 반전이 가능할까요? 시편이 한결같이 노래하는 역설이요 반전입니다.
고난을 돌아보시고 영혼의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손길을 느낄 때 가능한 희망의 의지입니다. 주인공에게 수치를 강요한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이요 그들이 주인공에게 수치를 강요하는 사태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사태라는 것은, 그들의 악행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상황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저주하고 혐오하는 사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오를 부추기고 사람을 고통에 처하게 만드는 사태입니다.
주인공은 하나님을 그렇게 체험하지 않습니다. 혐오와 차별의 하나님의 아니라,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환대와 포용의 하나님, 진리의 하나님이자(5)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입니다(7). 주인공이 체험한 하나님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일 리 없다는 믿음의 체험이요 고백입니다. 주인공이 경험한 삶의 조건이요, 주인공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입니다. 절망 가운데 더욱 도드라지는 희망의 역설, 절망으로부터 희망으로의 반전은 바로 그 삶의 경험과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치즘의 광풍이 온 사회를 뒤덮고 교회마저 그에 굴복했을 때 끝까지 저항하였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의 기도를 다시 환기합니다. 본회퍼 목사는, 다수의 교회가 ‘독일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나치에 굴복한 상황에서도 마르틴 니묄러, 칼 바르트 등과 함께 ‘고백교회’를 이끌며 신앙을 지키고 사회를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오늘 파시즘의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이 그 이름을 오용하고 있는 기가 막힌 현실에서 다시 그의 기도를 환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님은 저처럼 가난하고 비천했으며, 옥에 갇히고 동무들에게까지도 버림받았습니다. 주님은 인간들의 모든 비통함을 아십니다. 제 안에, 제 고독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 누구도 제 편이 되지 않을 때, 저와 함께해 주시고 저를 잊지 말고 찾아주십시오. 주님은 제가 주님을 알고 주님께로 향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오니, 도와주십시오.”(디트리히 본회퍼, 『저항과 복종』, 270, * 기도말 수정: 최형묵)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과 그대로 겹치며 공명하고 있습니다.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던 1944년에 작성한 고백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익숙해진 “선한 능력으로”의 가사를 또한 음미해 봅니다. 1945년 4월 9일 새벽 독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교수형으로 서른아홉의 생을 마감하기 전 1944년 12월 19일 베를린의 차가운 지하감옥 안에서 약혼녀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Maria von Wedemeyer)에게 쓴 편지 말미에 붙은 시로, 지그프리트 피에츠(Siegfried Fietz)가 곡을 붙인 노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선한 능력에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싸여서 보호받고 위로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한 기자는 시인 김수영의 시 “절망”을 인용하며 12.3 이후 오늘의 세태를 말합니다(이세영, “윤석열은 가도 파시즘은 남는다”, 「한겨레신문」, 2025.2.28.).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기자는,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독단과 무사유에 빠져 있지만, 그들이 맘대로 부릴 수 있다고 여기는 체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그 권력자들의 광기를 막아낼 수 있었던 현실을 은유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악은 결코 전능하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덧붙이면, 구원의 의외성을 말하는 것이기보다는 절망스러운 사태 가운데서도 살아 있는 희망이 반성 없는 세계를 무력화하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사태를 노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의 사회와 교회의 상황을 보면 정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란 세력에 대한 심판은 이뤄져도 사람들을 갈라놓고 불안을 가중하는 음험한 파시즘의 광기가 사그라들 것인지 걱정입니다. 지난 27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탄핵 인용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함께했습니다. 그때 마주친, 탄핵 반대를 외치는 이들의 눈빛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에서 어찌 그런 광기 서린 눈빛이 가능할까 섬뜩했습니다. 그것도 신앙을 명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광기 어린 행동에 나서는 것을 보고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능력에 끝까지 의지하기 바랍니다. 혐오와 차별의 언어에 휘둘리지 않고, 포용과 환대의 언어로 사람을 마주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언행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절망스러운 사태 가운데서도 희망을 키워나가는 길입니다. 두려움의 좁은 공간이 아니라 자유의 드넓은 땅에서 하나님을 믿고 사람을 신뢰하는 세계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