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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마지막에 선 인류, 새로운 영성을 찾아야 한다

기사승인 2019.03.03  17: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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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무주의 시대에 지피는 영성의 불꽃 (4)

마더 데레사는 “나눔 없이 평화 없다”고 하였다. 소유, 소비 중심으로 살아가던 삶의 방식을 바꿔 이제부터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누고 우리 자신까지도 남과 나누는 나눔과 비움의 생활을 실천해야 이 세상에서의 평화가 실현된다고 말하며 실천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마더 데레사의 영성적인 태도를 배워 생활화해야 한다.

영성 추구의 극명한 대조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영성을 찾아라’라고 하는 시대적인 분위기와 시대가 요청하고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야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바이오” 제품이, 아니 ‘바이오’라는 말 자체가 유행하고 있다. BT(Bio-Technologie, 생명공학)이 마치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양 온통 바이오 리듬, 바이오 음식, 바이오 수면, 바이오 정수기 등 “바이오”를 붙인 것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지 못했던 과학적인 측면에 대한 막연한 갈망, 욕망이 표현되고 있는 일종의 집단 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

▲ 포스트모던 시대에 새로운 그리스도교 영성은 어떤 것일지 고민해 봐야 한다. ⓒGetty Image

하지만 서양에서는 요즘 “첸(Zen, 禪)”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힐링 소사이어티』의 저자는 미국에서 선을 가르치는 학원을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지금 이 “선”이라는 것이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은 너무나 과학과 기술에 찌들어 그 반대 급부로 그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서 첸(선)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서구의 과학을 쫓고 있고 그들은 동양적인 것을 선호하여 첸을 배우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 과학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직시하고 새로운 차원에서 인류가 놓여 있는 위기를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여전히 이성 중심적인 영성

이러한 새로운 영성을 강조한 서양 사람들로는 토인비, 하이데거, 칼 라너, 한스 큉, 카프라, 하비 콕스 등이 있고, 동양 사람으로는 마더 데레사, 간디, 한국 사람으로서는 류영모, 김지하 등이 새로운 영성의 시대를 예언·예감했다. 하이데거는 말년에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사람들이 생각하는 영성과 우리가 생각하는 영성은 그 차원이 틀리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새로운 영성의 시대를 예비하면서 영성적인 차원이 강했고 영성적인 삶을 생활화했던 그런 민족이 이 시대의 흐름에 앞서 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힐링 소사이어티』의 저자는 바로 한국적인 영성적 독특함을 미국사회에서 최대한 살리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하비 콕스가 생각하는 영성을 보면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여러분들도 알고 있듯이 60년대 『세속도시』라는 책을 출간하여 대단한 물의를 일으켰던 사람이다. 그가 90년대에 새로운 책을 썼는데 『영성․음악․여성: 21세기 종교와 성령운동』이라는 책이다.

여기서 그는 영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로고스(이성) 중심적으로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서양사람들의 한계다. 그들은 영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이성적으로 로고스 중심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려 한다.

바로 이 책에서는 인간의 원초적인 영성에 근거한 세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본다. 즉 방언기도와 같은 원초적 언어, 이적과 기적에 근거한 원초적 신앙심, 그리고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현존적 미래를 바라보는 원초적 희망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바로 로고스, 즉 이성, 언어(말)이다. 이러한 이성적인 차원의 영성만 가지고는 희망이 없다.

국내에서 많이 하고 있는 성령운동, 신앙부흥회라는 것을 보자. 그것은 거의 개신교의 것이고 이것은 대다수 미국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그것은 한결같이 언어중심, 로고스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방언이나 큰 소리로 기도하고 울부짖는 등 이 모든 것이 소란 속에서 말짱한 혼을 빼앗아 뭔가 영성적인 차원에 도달하려 한다. 이것이 전형적인 서구적인 영성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영성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차원이 간과되고 있다.

그래서 칼 라너(Karl Rahner)가 한국교회에 기대하며 희망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80년대 뮌헨 가톨릭 한인회의 초청으로 행한 강연에서 그는 20세기말, 21세기 기독교와 가톨릭은 이제 동양의 명상, 영성, 선, 침묵에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로고스중심, 이성중심, 언어중심이 그 로고스를 더 극단으로 몰고 가 트랑스(초월) 상태에 도달하려 해서는 안 되고, 이제 인류가 시도해 보아야 할 것은 그 반대 급부인 ‘침묵’이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도 영성의 첫 단계로 침묵을 강조하고 있다.

갈림길에 선 인류, 새로운 영성을 찾아야 한다

학문적으로 볼 때 인류(인간)의 출현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 진화의 역사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다. 인간은 우주진화의 꽃이다. 인간 속에 우주진화의 전 역사가 담겨(각인되어) 있다.

또 전체 인류의 역사는 인간 개개인의 발달, 성장 속에 각인 되어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먹고 자라며 배우고 꿈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려 버둥대다가 죽음에 이르는 이 개인의 삶의 과정 속에는 200만년에 이르는 인류역사가 녹아있다. 예를 들어 만년 전의 인류의 삶은 어린아이들의 삶에 비유할 수 있고, 그 당시는 씨족 또는 부족의 우두머리가 절대적이었다.

오천년 전에는 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신이 창조한 세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질서 잡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과정은 유아시절이라 할 수 있다. 근대는 의심과 비판의 정신이 불타오르는 사춘기라 할 수 있다.

현대는 아마도 40대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불혹의 나이인 40대에 인간은 흔들리지 않고 자기자신이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이성으로 이루어 놓은 이 많은 것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 하다.

그런데 50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인류는 갈림길에 놓여 있다. 인류는 지금 자기가 이루어 놓은 것에 도취되어 건강이나 미용, 문화생활에 눈을 돌리며 이제 좀 즐겨보자고 결단을 내릴 수 있다. 또는 이와는 다르게 그 동안 자기가 잊고 지냈던 다른 차원, 즉 신적인 것, 성스러운 것 등 영성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 나 자신, 내 가족, 내 나라, 지구 등등을 벗어나 우주적인 차원의 나를 생각하는 지천명의 나이인 50대가 있을 수 있다.

인류는 지천명의 나이로 들어서느냐 아니면 쾌락과 안위만을 좇아 모든 것을 즐기며 사는 허무주의냐 하는 기로에 놓여 있다. 인류의 역사가 각인될 그 삶을 개체가 50대의 영성적인 삶으로 채울 것이냐, 아니면 그것과는 다른 것, 즉 무한경쟁, 무한소비, 무한쾌락의 삶으로 각인할 것이냐에 따라 미래의 인류의 역사는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영성적인 차원, 즉 (무)無·공(空)·허(虛)에 마음을 열며 살았던 한국인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인류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한국인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눈을 크게 뜨고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의식한 시인 김지하의 시 “나이”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나이 먹는 것
차츰 쓸쓸해지는 것
혼자서 우주만큼 커져
삼라만상과 노닐도록
이승에선 그렇게 외로워지는 것.”
- 김지하, “나이, 『중심의 괴로움』 中에서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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