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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휴먼(Posthuman)시대의 종교, 어떻게 달라 질 것인가?

기사승인 2018.08.22  21: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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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신이 된 인간)』 1

본 책은 저자 하라리가 앞선 책 『호모 사피엔스』를 근거로 인류의 미래를 예견한 책이다. 『호모 사피엔스』를 통해 인류의 과거사를 연구했다면 이 책에서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역사를 살폈다. 이 두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은 의심할 나위 없이 진화론이다.

유대인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창조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창조와 진화에 대한 갈등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엄청난 량의 책을 쓰면서도 하루 2시간 씩 명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니 불교적 지향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도로서의 종교에 대한 관심은 한없이 적다. 그럼에도 하라리는 인간 진화의 역사를 낙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화의 끝이 인간을 더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축적한 지식(힘)을 행복으로 만들지 못한 인간(호모 사피엔스)의 어리석음을 질타했다.

그럴수록 저자는 예상되는 위기를 스스로 극복할 힘을 기르라고 충고했다. 이런 힘을 일컬어 저자는 영성이라 일컬었다. 『호모 데우스』란 책 제목 속에는 이런 양가적 특성이 잘 함축되어 있다. 소위 포스트 휴먼의 다른 말인 ‘神이 된 인간’, 이런 신(新)인류가 과연 어떤 역사를 만들 수 있을지를 본 책이 답한다. 얼마 전 자신을 동성애자로 커밍아웃 했는데 향후 이 영역에서도 많은 연구를 기대해본다.

1.

『호모 데우스』는 긴 서론과 3장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서론에서는 진화 과정에서 세상의 승자가 된 호모 사피엔스의 새로운 과제를 적시했다. 생존차원을 넘어 행복하기 위해 진화의 브레이크를 멈출 수 있는 힘을 기를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런 의제가 이어지는 석장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펼쳐진다. 첫 장은 이전 책 『호모 사피엔스』의 요약, 정리로서 인류의 세상 정복의 실상을 말했고, 2장에서는 인류가 세계에 의미(뜻)을 부여하는 과정으로서 주로 종교와 과학의 발전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마지막 3장에서는 정보 홍수 속에서 오히려 지배력을 잃어버린 인간의 미래를 염려하고 있다. ‘데이터교’의 출현과 4차원의 과학기술인 인공지능으로 무장한 인본주의의 폐해를 문제 삼은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힘(지식)을 축적한 인간이 그것을 행복으로 만들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 탓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에 맞서는 새로운 영성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지금껏 존재했던 제도로서의 종교와의 결별을 원하면서 말이다. 이런 저자의 문제의식이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모두에게 도전이자 기회로 역할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크다.

2.

생명 진화 과정에서 최후 승자가 된 호모 사피엔스, 이들이 겪고 해결할 과제가 적지 않았다. 기아, 역병, 전쟁 등이 자신들 생존을 항시 위협했던 까닭이다. 인류가 기아로부터 해방된 것은 참으로 기적이었다. 기아로부터 구원, 그것이 호모 사피엔스가 꿈꿔 이룬 최대의 사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굶주린 사람들이 여전한 현실에서 폭(과)식과 비만으로 인한 질병이 호모 사피엔스가 감당할 새 과제인 것이 예사롭지 않다. 인류는 전염병(감염)으로 수억 명의 목숨을 잃은 적도 있었다. 흑사병, 천연두 등의 질병으로 인류 멸절의 지경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이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했고 에이즈나 에볼라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인류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인간에게 치명적인 질병(병원균)을 창조하고 있다. 오로지 죽일 목적으로 질병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인류는 오히려 자연발생적 질병에 직면하여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다. 생존을 위한 전쟁을 통해 상당수 인류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인간 폭력으로 인구수의 감소 비율이 점차로 줄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농경사회에서 15%에 달했던 것이 금세기에는 1% 이하로 감소했다. 전쟁보다 자살과 병으로 인한 죽은 이들이 더 많아졌다. 지식이 가장 핵심적 경제자원이 되기 시작하면서 전쟁의 채산성이 떨어 진 것이 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전대미문의 (핵)무기가 개발되어 왔다. 지구를 12번이나 부술 수 있을 만큼 핵무기를 과다 보유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곳곳에서 발생중인 테러 역시 불안을 가중시켰다. 테러리스트들로 인해 세상이 정글처럼 변하고 있다. 보복의 악순환을 끊지 못하면 인류는 곧 파국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렇듯 기아, 역병, 전쟁을 극복했으나 인류는 여전히 불안하고 모순적이며 위태롭다. 무엇보다 생태위기를 자초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호모 사피엔스, 인류에게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경제를 통해 원초적 결핍을 해결했던 인류가 이후로도 성장만을 고집하고 선호한다면 파국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기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고 상대적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를 저자는 불멸, 행복, 신성이라 했다. 이는 노화(老化), 곧 인간의 자연적 한계를 폐기하려는 몸부림이겠다.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데우스’로 변형되고 싶은 것이다. ‘성장’ 신화가 더 큰 야망을 탄생시킨 결과이리라. 반(反)생태적으로 자신들 미래 역사를 쓰고자 하는 호모 사피엔스, 저자는 이들의 내일을 크게 염려한다.

3.

이처럼 21세기의 호모 사피엔스는 ‘不滅’, ‘不死’에 도전하게 될 것이다. 죽음과의 전면전을 필사적으로 치르고자한다. 지금껏 종교는 죽음에 대해 관대했고 긍정적으로 여겼다. 물론 죽음을 죄의 삯으로 본 인습화된 기독교의 경우는 조금 다르겠으나 그 역시 살아생전 죽음자체를 없이 할 생각은 애시 당초 없었다. 죽음 없는 종교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죽음은 해결되어야 할 기술적 문제가 되어 버렸다. 예수 재림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기술적 문제로 죽음에서 면피되려 할 것이다. 이제 인간의 살 권리에서 종료(마감)일이 사라졌다. ‘죽음해결’이 과학의 주력 사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전공학, 재생의학, 나노기술의 발달 덕으로 말이다. 늦게 잡아 2200년경이면 본 사안이 해결될 것으로 낙관한다. 하라리는 2050년 쯤 되면 은행 잔고가 넉넉한 사람들 중 다수가 불멸을 시도하게 될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 경우 예기치 못한 사회적 문제가 불거질 것이다. 자기 계발을 언제까지 해야 되고 부모/자식 관계는 어찌 변화될 것이며, 젊은이들과의 일자리 경쟁 등... 그럼에도 인간 생명의 신성성, 과학의 무한 발전,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이 삼위일체 한 몸 되어 죽음과의 항전을 감행할 것이다. 천국에서 지복을 누린다는 말을 믿고 종교 생활하는 이들에게 지금 여기서의 不滅/不死는 더 큰 매력일 수밖에 없다.

이어서 저자는 21세기 인류가 맞닥뜨릴 두 번째 의제로서 ‘행복’을 들었다. 사실 종교인들 다수는 내세의 지복 이상으로 현생의 행복을 구한다. 이/저승의 좋은 것 모두를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물질적 성취로만 행복이 채워질 수 없다. 빈국의 사람들 행복 지수가 부자나라보다 높은 것이 그 반증이다. 자살도 서구 부국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 그렇기에 진정한 행복은 老化 없애는 것 이상으로 얻기 어려울 수 있다.

저자는 이를 진화의 탓으로 보았다. 인간 몸의 생화학 기제가 진화과정에서 번식을 위해 적응했을 뿐 행복을 위해서 그리하지 못했다고 했다. 생존과 번식에 도움 되는 것만을 유쾌한 감각으로 기억, 저장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행복을 위해 인간 몸의 생화학적 기제를 달리 조작할 필요가 생겼다. 향후 이런 시도는 사업적으로 대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화학적 행복추구는 인간을 기계로 여기는 누(累)를 범한다. 생화학적 행복추구를 규제하고자 정부는 ‘나쁜’ 조작과 ‘좋은’ 조작을 분리시킬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를 안정시키는 생화학적 조작은 장려하되, 이를 위협하는 조작은 금지할 것이다. 항차 유전자를 조작하는 일도 발생할 수밖에 없다. 쾌감에 대한 집착을 줄이는 불교적 명상법도 유효하겠으나 자본주의 구조 하에서 인류는 생화학적 해법에 더 많이 관심을 둘 것이다. 하지만 쾌감을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일들이 지구미래를 위해 적합하지 않을 것하다.

4.

不滅/不死와 행복의 추구는 결국 인간이 ‘神’되겠다(호모 데우스)는 욕망의 표출이겠다. 이는 생물학적 자연(기질)을 조작할 때 가능한데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그리고 비(非)유기체 합성이 인간을 神으로 업그레이드 시킬 때 가증하다. 그렇기에 저자는 사피엔스가 인류 진화의 끝이라 역지 않았다. 뇌 회로를 바꾸고 생화학 물질의 균형을 달리하면 초(超)인류가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기체를 비유기체 장치들과 융합시킨 사이보그 공학 탓에 인간에게 상상불허의 능력이 주어질 수 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생명자체를 유기적 영역과 무관케 만들 수도 있을 법하다. 생화학적 한계를 벗고 가상/비가상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까닭이다. 이런 격변 속에서 변하지 않는 상수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인류, 곧 심층적인 인간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 신기술은 인간마음 조차 재설계를 하고자 힘쓰고 있다. 성사될 경우, 호모 사피엔스는 역사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다. 물론 재설계된 마음이 어떤 세상을 만들지 지금으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인류 역사가 이런 방향으로 나갈 것이란 사실이다. 神이 된 인간, ‘호모 데우스’란 말로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존재가 우리들 미래의 모습이란 것이다.

이런 인간은 도구사용에서 뿐 아니라 몸과 마음능력 면에서 지금껏 알려진 신의 능력을 능가할 수 있다. 로봇(컴퓨터)과 융합된 소위 ‘기계인간’인 탓에 그를 ‘포스트’ 혹은 ‘트랜스’ 휴먼이라 일컫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진화에 브레이크를 밟을 것을 요구, 주문하였다. 하지만 성장이 그칠 것을 두려워하기에 브레이크에 발을 갖다 대는 이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不滅/不死, 행복, 神性의 프로젝트가 돈이 되는 무한성장의 아이템인 까닭이다.

본래 의학은 본래 표준이하의 사람(장애)을 치유할 목적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본의 힘을 얻고 자연 상태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존재할 것이다. 돈 없이 태어나 기계인간으로 업그레이드 못한 본래적 인간은 한없이 열등할 수밖에 없다.

본 책 결론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런 차별이 목하 인간과 짐승 간 차이와 비견될 수 있다니 기막힌 노릇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런 흐름을 멈출 것을 요구했다. 우선적으로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의 흐름이 ‘실수’일 수 있는 확률도 물론 작지 않을 것이다. 이런 미래를 예견했다면 인류는 자신의 선택을 달리 해야 옳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 지식은 무용지물이다. 어리석은 지식이 될 뿐이다. 그럼에도 빠르게 축적되는 지식으로 세상은 격변하고 있다. 어떤 세상이 우리들 미래가 될지 촉각을 세워 지켜 볼 일이다.

하라리는 본 책 『호모 데우스』를 집필한 목적을 예상되는 미래를 바꾸기 위함이라고 했다. 인간을 神으로 만드는 기술이 정작 인간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각인시키기 위해 저자는 본 책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누구이고, 인본주의가 어찌 세상을 지배하는 종교가 되었는지 그리고 기계와 짝한 인본주의의 꿈이 허망할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밝혀 냈다. 이들 주제가 3장으로 구성된 본론의 각각의 내용을 구성하였다.

5.

이제 본 책 『호모 데우스』의 본론에 이르렀다. 이미 길게 서술된 서론에서 전체 내용이 잘 드러났기에 이하 3장의 내용을 가능한 한 짧게 요약해 볼 것이다. 물론 본 책의 3장 마지막 결론부분-‘호모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에 무게중심을 두면서 말이다.

저자는 7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를 ‘인류세(인류의 시대)’로 칭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인류는 독자적 생태계를 상호 연결시켰고 동시에 이들 생태계를 점차 파괴시키기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인류가 생태계 내의 독자적인 변인이 된 것이다. 단일 종으로 지구를 지배, 정복했고 나아가 파괴한 것은 인간이 유일하다.

인류세’를 거치면서 육상 포유류의 50%정도가 멸종되었으니 인류의 힘이 너무도 커졌다. 앞으로도 생태계 내 인간은 인류를 멸절시킨 과거 소행성 이상으로 지구를 파괴할 공산이 크다. 그렇기에 저자는 인류가 두려워 할 존재는 바로 인간뿐인 것을 역설했다.

물론 이런 인간의 위치가 단박에 획득된 것은 아니었다. 주지하듯 수렵채집 시대는 정령신앙(애니미즘)을 갖고 살았다. 이 시기에는 누구도 누구를 해치지 않는 공존의 삶이 가능했다. 생명체들 간의 본질적 차이(간극)을 인정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 성서는 애니미즘을 파괴했다. 인간을 특별한 신적 창조물로 보았던 결과이다. 인간의 동물성은 부정되었고 땅(자연)을 지배하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농경문화의 삶이 이를 잘 적시한다.

농업혁명은 야생동물을 가축으로 개량시켰다. 그로부터 생산물을 쉽게 얻을 목적에서이다. 야생으로부터 물려받은 동물의 본능, 욕구, 감정은 더 이상 고려대상일 수 없었다. 생명체는 우유나 고기를 생산하는 기계처럼 다뤄졌기에 말이다.

하지만 모든 동물은 나름 생존과 번식을 위한 생화학적 알고리즘(해결방식)을 갖고 있다. 그들 나름의 감각, 감정, 욕망이 이에 해당된다. 동물들 역시 먹이만으로 생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인류는 동물을 사육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소를 신성시 하는 인도인들도 예외일 수 없다. 그들의 최종 목적 또한 낙농이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생명의 신비를 강조하는 ‘동물신학’이 다시 등장한 것에 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농업혁명은 인간을 자연의 지배, 착취자로 만들었다. 이 시기에 생겼던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들이 이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자연을 지배, 정복한 인간은 神에게 수확(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면 되었다. 神/人 사이의 계약이 생명체들 간의 교감보다 우선시 된 것이다. 아마도 중세기 기독교가 대표적인 경우일 듯싶다.

이렇듯 동물을 침묵시킨 인류는 근대에 접어들며 과학의 이름으로 神마저 침묵시켰다. 자연과 신을 침묵시킨 인간의 고독과 독백만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동물과 교감했던 원시시대(인간도 동물이었다), 신과 소통했던 농경시대(하느님 창조의 정점으로서의 인간)와 달리 과학시대의 경우 인간 자신을 神으로 업그레이드시킨 탓이다.

종교가 神을 앞세워 농업을 발전시켰다면 근대 인본주의는 인간을 내세워 축산업을 촉진시켰다. 인간 목적을 위해 동물(가축)들을 기술적으로 통제, 관리하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정말 인간이 동물들에게 그런 짓을 할 권리가 있는 지를 저자는 되묻는다. 향후 슈퍼컴퓨터, 인공지능이 인간이 동물 다루듯 인간을 얕잡아 본다면 어찌 할 것인가를 걱정하면서 말이다. 세상을 지배한 인류에게 피지배의 고통을 상상, 가늠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6.

그러나 정말 인간이 동물보다 특별한 점이 어디에 있을까? 저자는 자연 속 인간이 지닌 광휘(光輝)를 다시 묻고 정의코자 했다. 지금껏 인간만이 불멸의 영혼을 갖는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동물들은 生魂과 覺魂은 있을지언정 靈魂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영혼이란 개념 자체는 진화와 모순된다. 진화는 본래 지속적 변화를 뜻하기에 실체나 본질과는 공속관계에 있지 않다. 호모 사피엔스에게만 의식(마음)이 있다는 말도 회자되었다. 하지만 의식적 경험이란 감각과 욕망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생화학적 알고리즘을 지닌 동물들 역시 의식 없다 말하기 어렵다. 모든 동물 역시 인간처럼 의식을 생성하는 신경기질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자의식’으로 주제를 바꾸면 어떤 답이 가능할까? 의식과 자의식 간에 질적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해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란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언어를 인간만의 유일무이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돌고래, 침팬지도 소통하는 방식들을 알고 있는 탓이다. 도구제작 능력을 인간 우월성의 근거로 드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지능과 도구사용 능력은 동물들에게서도 자주 발견된다. 협동력도 인간이 개미나 벌을 좆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독특한 능력을 ‘상호(間) 주관적 의미망’ 구축에서 찾았다. 주객을 넘어선 간주관적 실재로서의 인간, 바로 이것이 인간의 독특함이자 우월성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 역시 상호주관적 관계 망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만이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생각, 감정 그리고 감정은 단순히 생화학적 알고리즘 그 이상이란 뜻이다. 주지하듯 동물들은 객관적 영역 속에 갇혀있다. 이들의 의사소통은 객관적 실재를 기술할 뿐이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를 사용하여 전혀 다른 상상적 실재를 창조할 수 있다. 생명과학(인공지능)과 인문학의 분기점도 여기서 비롯한다. 게놈을 해독하고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만으로 미래는 밝혀질 수 없다. 세계에 의미를 부여했던 인간의 상상 물, 그 허구 역시 독해될 일이다. 따라서 생물학, 생명공학, 인공지능만으로 미래를 가늠할 수 없다는 저자의 충고와 고언을 중히 여겨야만 한다.

7.

그렇기에 『호모 데우스』 두 번째 장의 주제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로 되어 있다. 상호주관적 실재를 창조하는 인간의 상상력을 부각시킬 목적에서였다. 실재 없는 허구를 현실화할 수 있는 존재, 그가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본래 없던 신, 국가, 기업을 인간이 창조해 낸 것이다.

저자는 이런 인간을 ‘이야기꾼’(stotyteller)이라 칭했다. 인류 초기, 동서의 찬란한 신화 세계가 이런 이야기꾼들의 상상력의 결과물들이었다. 이어서 문자가 발명되었고 관료제가 인류 역사에 등장했다. 관료제 하에서 인간은 단순 상상의 차원을 넘어 문자를 갖고서 실재를 의도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관료들은 힘을 갖고 자신들 환상에 부합된 외적 실재를 설계했다. 이 체제하에서 인류는 허구일지라도 발생된 실제적 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런 시각에서 하라리는 유대인임에도 성서를 비판적으로 이해했다. 성서의 역사인식이 오류 투성이나 이에 기초해 작동되는 사회원리를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도 숱한 사람들이 아직도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고 있다.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유지, 존속 시키는 방편으로 성서만큼 응집력 있는 것이 아직은 없다. 문자화된 실재는 이렇듯 세상 시스템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상상 속의 허구가 그 자체로 목표나 잣대가 되어 여타 다른 내러티브를 부정, 배제하는 일이 빈번하니 걱정스럽다. 상상으로서의 종교가 사회통합적일 때 유의미하다. 다수의 내러티브가 부정되고 하나의 이야기만 절대화될 경우 – 유일신 론의 경우처럼 – 사회는 해체되고 만다.

근대에 접어들며 종교는 과학이란 새로운 실재를 접하게 되었다. 과학이 객관성을 내세워 종교가 창조한 허구적 실재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아가 최근 과학은 가상현실, 생명공학의 발전에 힘입어 과거 종교가 그랬듯이 실재를 허구적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실제와 허구간의 차이를 과학 스스로가 소별시킨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꾼’인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과학이 자신들 욕구를 채워주었기에 종교가 점차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런 정황에서 종교는 더 이상 제도이기보다 영적 수행의 여정으로서 역할 해야 옳다. 하라리는 이미 500년 전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해 이점을 시사했다고 말했다. 물론 루터가 믿음을 다시 성서(문자)에 묶어 놓음으로 중세를 벗어 날 수 없었으나 종교의 역할을 달리 모색한 것만은 분명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라리는 종교가 과학 연구에 윤리적 정당성을 제공하여 과학의 나갈 방향을 제시할 책임이 있다고 했다. 단지 자기진술을 윤리(진리)판단으로 바꾸어 사회에 혼란을 주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하지만 근대이후 과학은 포스트 인본주의와의 계약을 통해 종교의 새 형식을 창조해 낼 것이다. 말했듯이 점차 기존 종교를 무용(無用)화 시키면서 말이다.

8.

호모 사피엔스가 만든 ‘근대’는 일종의 계약의 시대였다. ‘힘’을 갖는 대신 ‘의미’를 포기하겠다는 것이 그 계약의 내용이었다. 근대 이전 사람들이 의미를 위해 힘을 포기한 것과 대비된다. 이것은 근대에 있어서 매력이자 동시에 위협이기도 했다. 지속적으로 힘을 추구했으나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탓이다.

▲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여기서 힘은 과학의 발전과 경제성장을 일컫는다. 이 둘의 동맹으로 인류는 성장을 좆는 불나방이 되고 말았다. 인류가 직면한 기아, 역병, 전쟁 역시 모두 성장을 통해서 해결코자 했다. 성장이 만병통치약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근대의 두 이념인 자본주의, 공산주의도 예외가 없었다. 지금껏 저 세상의 보상을 약속한 종교와 달리 특히 자본주의는 지상의 기적을 선전해왔다. 성서(종교)로부터 일탈하여 과학적 지식을 축적한 결과였다. 이 지식으로 인류는 거듭 새로운 에너지원을 발견했고 성장을 지속시켰다. 앞으로도 나노기술, 유전공학, 인공지능이 생산혁명(성장)을 거듭 주도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류는 생태계 붕괴라는 부메랑효과에 노출되었다. 진보와 성장이 지구 생태계를 파괴할 지경에 이르게 것이다. 하지만 성장 중독에 빠진 인류가 이를 늦추거나 멈출 수 있는 힘이 있을까? 오히려 과학 기술을 갖고 인류는 도피처, 곧 ‘새로운 방주’를 만들고자 한다. 더 나은 기술로 생태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음이 크다.

하지만 생태파국이 가난한 자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킬 것인 바, 기후적 부정의(不正義)가 심각해 질 것이다. 정작 이들 빈곤자들은 기후붕괴보다 자신들 집세걱정에 고심하니 생태정의를 위해 이들 힘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현실은 ‘뜻’을 내주고 ‘힘’을 얻은 근대 계약의 결과물들이다. 이런 근대의 위기를 구한 것은 새롭게 등장한 인본주의였다. 저자 하라리는 인본주의를 새로운 혁명적 종교라고까지 일컫고 있다. 어째서 하라리는 인본주의를 혁명적 종교라 부르는 것인가?

9.

근대는 ‘신의 죽음’과 ‘인간의 힘’이라 두 키워드로 설명된다. 이것은 의미의 상실과 힘의 획득이란 앞선 말의 다른 표현이다. 주지하듯 근대 이전까지 ‘신’은 체제 유지의 근간이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신은 죽었어도 사회는 유지되었다. 이제는 오히려 힘을 지닌 인간, 즉 인본주의가 체제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원인(힘)이 되었다.

하라리가 인본주의를 새로운 종교라 부른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인본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도록 권했다. 지난 세월 신과 자연(법)에게 해당된 역할이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다. 자기 밖의 우주, 곧 神이 인간에게 의미를 주지 않고 인간 경험이 우주의미를 창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신이 사라진 무의미한 세계에서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 근대인간의 사명이 되었다. 신에 대한 믿음 대신 인간 자신에 대한 믿음을 얻은 것이다.

이렇듯 인본주의는 인간 의미의 최종 원천이자 권위인 것을 설파했다. 윤리, 정치, 철학 등 모든 영역에서 일차적 중요성은 인간 내면의 감정이라 믿은 탓이다. 이제 신을 믿는 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 소리를 경청하는 것과 다를 수 없었다.

하지만 뭇 감정들이 상충될 경우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저자는 인본주의가 제시한 방식을 이렇게 소개했다: ‘지식=경험 x 감수성’. 이것은 지식 패러다임의 급진적 변화를 뜻한다. 중세의 지식이 ‘성경 x 논리’로 구성되었고 과학의 지식이 ‘경험적 데이터 x 수학’이었던 것에 비해 인본주의는 오히려 내면의 경험을 예리한 감수성으로 관찰할 때, 앎이 비롯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경험은 감각, 감정, 생각으로 이뤄진 주관적 현상을 말하며 감수성은 이들 셋에 주목하되 이들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적시한다. 이렇듯 경험과 감수성은 끝없는 고리로 이어져 서로를 강화시켜왔다. 감수성 없이 무엇을 경험할 수 없고 다양한 것을 경험치 않을 시, 감수성 계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본주의도 경험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 탓에 분열되었다. 인간경험을 의미와 권위의 최종근거로 여기는 점에서 공통적이나 경험들 간의 충돌을 해결하는 방식 차(差)에서 각기 달라졌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인간을 저마다 재생 불가능한 일련의 경험을 지닌 유일무이한 개인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예컨대 여기서는 시리아를 탈출한 난민의 경험과 독일인의 불안간의 모순을 해결할 길이 없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자기감정에 대한 집착대신 타인들 행동을 느끼는 일에 우선하며 자기 행동이 타자의 경험에 미치는 영향력을 강조했다. 자기 욕망보다 타인들의 필요와 경험을 우선시 했던 것이다.

이 밖에 진화론적 인본주의도 존재한다. 이들은 난민과 독일인의 갈등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갈등을 진화를 추동하는 원재료로 이해한 것이다. 경험들이 충돌할 때 최적의 경험이 나타나 이들을 조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최적자를 찾는 길만이 호모사피엔스의 쇠퇴와 멸망을 막는 길이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들 인본주의 모두 문제가 많다. 자유주의자들은 문화비교(우위) 논리에 빠졌고 사회주의자들은 정당(정치)에게 책임을 돌렸으며 진화론자들은 해결없이 오히려 혼란을 부추겼기에 말이다. 이런 성찰에 근거, 저자는 근대의 인본주의가 힘을 쇄진했다고 보았다. 20세기 접어들며 특히 자유주의자들은 핵무기에 우호적이었다. ’나를 공격하면 모두가 죽을 것‘이라 핵을 갖고 협박했던바 이들이 인본주의의 대세를 이뤘다.

21세기를 지나면서 이들로 인해 진보(성장)의 욕망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생명공학과 컴퓨터 알고리즘의 힘으로 ’몸의 불멸, 뇌의 행복, 그리고 마음의 ‘신성’이 다시 추구되고 있는 탓이다. 이를 일컬어 저자는 새로운 인본주의, ‘포스트(Post) 인본주의’라 불렀다. 이를 실현한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 간의 차(差)가 사피엔스(크로마뇽인)와 네안데르탈인 간, 아니 인간과 동물간의 차이보다 클 수도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앞으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문명은 수명, 행복, 힘의 극대화를 더욱 추동해 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포스트 인본주의 기술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겠다. 어쩌면 인본주의자들이 그토록 신봉했던 인간경험이 슈퍼의 상품처럼 그렇게 생산될 여지도 크다. 그럴 경우 이런 인본주의 세상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가?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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