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동학의 좌도 김개남은 우도 전봉준과 어떻게 다른가

기사승인 2024.12.30  22:38:53

공유
default_news_ad1

- “묵은 세상을 엎고 새 세상을 만들어 자주의 나라로”

▲ 전봉준(사진 왼쪽)과 김개남(사진 오른쪽)

사람의 마음속에 한울님 있으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 하라’는 것이 수운 최재우 선생이 주장하신 동학의 근본이다. 세상에 하찮은 인간은 없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그 존엄을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존재가치가 달라진다. 남원에는 동학을 잇는 사람들의 숨결이 요천수가 흐르듯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남원동학에 미친사람 귀농자 이동진

내가 남원에 와서 만난 가장 파워 풀 한 사람은 이동진이다. 그의 농장은 아영면 아막골 성터 아래에 있었다. 신라와 백제는 아막성 전투에서 승패가 가름하다시피 한 치열한 곳이다. 여기에서는 남원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남원식칼의 소재인 주석철이 나오는 곳이다. 그리고 전설적인 민담의 주인공 흥부의 묘가 있는 곳이다. 그리 크지 않은 농장은 기울어져 있어서 농사짓기에 장단점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일손이 부족하다고 연락이 오면 이웃과 함께 가서 초속잠을 캐거나 더덕을 보살피는 일을 도왔다. 내가 일하는 것은 시늉이지만 그는 늘 감자를 몇 박스 씩 실어다 주었다. 그를 만나려면 산동면 아이쿱에 귀농자들과 자연 퇴비 만드는 실습장에 가야 했다.

이동진은 노동하여 먹거리를 생산하고 나누기에도 바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남원동학> 발자취를 찾느라 분주한 모습이 선하다. 동학강좌를 열어 전문가들을 끌어들이고 원광대 교수들과 토론을 하고 모든 자료를 모아 수 십권 분량을 USB에 담아 나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남원동학을 공부합시다.” 남원은 호남동학의 효시이면서 발상지였고 사실상 동학혁명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은 고장이다.

따라서 남원은 동학의 2대 성지 중 한 곳이면서 동학농민혁명군의 2대 거점 중의 한곳이면서 2대 패전지 중의 한 곳으로서 동학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고장이다. 남원동학을 알아야 동학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다고 기염을 토하며, 그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계보를 만들며, 지금 살아있는 이들과 과거 어른들은 무슨 인연들이었는가를 파악하는 재미에 빠져있었다. 어떤사람을 만나 대뜸 “동학군에서 당신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의 대장이었다” 하여 그를 당황케 한 장면을 본적이 있다. 나는 이동진을 만나면 기차 화통 같은 에너지를 받으며 기분 좋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2020년 12월 6일 낙향해 자연농업연구 5년만에 트랙터 사고로 은하수를 건너버렸다. 믿어지지 않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흔히 듣는 <오늘 만나는 사람이 내 생애에 마지막 일 수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이동진 선생은 서울사대 불어교육과 학생 시절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시퍼런 긴급조치에 도전하여 ‘민청학련’으로 구속되어 15년을 받았다. 그 때 같은 죄목으로 15년을 받은 나와 함께 서울구치소에 수감 되어 있었기에 감방동기인 샘이다. 사실 이동진은 전교조의 이름난 투사이었다. 1989년부터 끈질기고 치열했던 합법화 쟁취 투쟁시절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부위원장으로서 옥고를 치루면서 ‘교육민주화운동’을 정착시켰다. 1998년부터는 한국 교사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전 세계 교육계에 알리는데 국제교원노조총연맹(EI)운동에 2015년까지 뜨거운 삶을 바쳤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수잔 홉굿(Susan Hopgood) EI 회장은 “그는 한국 교사 노동 운동과 한국 교육 시스템 개혁에 그의 삶을 바치셨다. 위대한 노조 활동가이자 진정 훌륭한 분이셨다. 저는 그런 친구를 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의 사망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그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라고 애도의 서신을 보내왔다.

프레드 반 레이우먼(Fred Van Leeuwen) 전 EI 사무총장은 “너무나도 슬픈 소식이다. 내가 전교조를 안 만큼의 시간 동안 그를 알아 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 오랫동안 나에게 그는 전교조 자체였다. EI에서 전교조의 목소리는 그를 통해서 나왔다. 그는 오랫동안 전교조의 합법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결국, 그는 전 세계 교원노조로부터 전교조에 대한 엄청난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양질의 교육과 교사들의 복지를 위한 투쟁에 그의 삶을 바쳤다.”라며 슬퍼했다.

남원동학의 좌도 김개남은 우도 전봉준과 어떻게 다른가?

남원은 수운선생이 관에 i길 때 은적암에 숨어들어 동학을 완성하고 광한루 옆 서형칠의 약방에서 몇 사람에게 자기의 깨달음을 강론한 중요한 발상지 중의 하나다. 수운선생의 도는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주문을 외우며 無極大道(무극대도)가 이루어지는 인류가 맞이할 개벽세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하느님을 모시라는 <侍天主>(시천주) 신앙에서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라는 <事人如天>(사인여천)으로 발전하였으나 동학을 실천하고자 하는 농민군이었기에 후에 <동학농민혁명군>으로 역사적 정리를 하였다. 그 안에서 <전봉준 중심의 우군>과 <김개남 중심의 좌도>로 일란성 쌍둥이로 갈린다.

박정희 대통령의 위수령파동으로 대학에서 강제 제적된 <71동지회> 회원들이 손호철 교수를 따라 김개남 현장탐구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불같은 혁명의지를 가지고 <斥洋斥倭>(척양척왜), <輔國安民>(보국안민), <除暴救民>(제폭구민) 구호를 외치며 봉건체제를 타도하고 일본 등 제국주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함께 일어선 동지이다. 그러나 많은 과정에서 그들은 행동을 달리하고 갈등으로까지 돋보인다.

태인의 지금실 마을에서 자란 동무들

개남이란 이름은 동학입교 후에 호칭된 별호인 것으로 추측되는 가운데, 김개남은1853년 9월 15일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원정마을에서 김대현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여 지금실로 이주하여 중농집안의 문중들과 어울려 자랐다.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전라도 고창 당촌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전봉준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 이사를 다녔다. 그러던 중에 전봉준 아버지가 이 마을 서당 훈장으로 오면서 전봉준보다 두 살 위인 김개남은 임병찬등과 한마을에서 살았다. 한 마을 동무들이었다.

전봉준은 그 후 지금실을 떠나 고부에 한동안 자리 잡았고 김개남은 동학에 입교하여 최시형의 보살핌을 받았다. 전봉준은 김개남보다 늦게 동학에 들었는데, 김개남, 손화중 등의 주선이 있었다고 추측한다. 그러기에 서로 교감하며 살면서 무장 봉기에서 힘을 합하였다. 

전봉준은 1894년 초 고부에서 일대 봉기를 일으커 조병갑을 징토한 후에 훈련이 안 된 농민군이 도망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할 무렵 평생 동지인 김개남, 손화중 등이 호응해와 지휘체계를 정했다. 백산대회에서 총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에 김개남, 손화중이 추대되었다. 이들 연합부대는 황토현 싸움에서 이겨 승승장구 전라도 일대를 휘고 돌아온 기세로 전주성을 점령했다.

전주성에서 중앙군과 맞붙어 여러 날을 버티다가 끝내 관군과 농민군은 화약을 맺고 전주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각 지역에 집강소를 두고 농민군 스스로 행정을 맡아 다스렸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이 무렵부터 방향을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곧 전봉준은 일단 전주에서 물러났다가 뒷날 기회를 엿보아 재기하자는 주장을 폈고, 김개남은 내친걸음에 서울로 쳐 올라가야 한다는 강경론을 편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김개남은 강경파, 전봉준은 온건파로 지목된 것이다.

김개남은 일단 전주에서 나와 금산, 순창 등지를 다니며 벼슬아치와 양반 부호들을 잡아 매를 때리고 재물과 목숨까지 빼앗았다. 김개남이 휩쓸고 간 지역에는 양반들이 벌벌 떨었다. 김개남은 철저하게 복수를 하면서 봉건제도에 맞섰기에 천민들에게 우상이었다.

반면 전봉준은 각 고을을 다니며 좋은말로 설득하고 벼슬아치들도 타일러 자기세력으로 끌어드려 관리들과도 회담하며 담판을 지으려 노력했다. 혼자 몸으로 나주목사를 만나러 관아에 들어가 담판을 벌린 사건은 유명하다. 전봉준이 지나는 곳에서는 표면으로나마 양반들이 협조하는체했다.

그리하여 김개남은 많은 적을 만든 대신 천민들에게는 우상이 되었고, 전봉준은 별로 다른 세력들에게 미움을 받지는 않았으나 뜨뜻미지근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하니 김개남의 수하에는 노비, 백정 등 왕조시대에 가장 밑바닥에서 핍박받던 세력들이 주로 몰려들었고, 전봉준의 수하에는 주로 소작인, 소지주, 머슴 등이 몰려들었다.

원래 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양곡을 준비하고 무기를 모으며, 청일전쟁에서 청나라 군대가 이겨 일본군을 밀고 오면 농민군이 맞받아 양쪽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이 대원군과 밀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농민군으로서는 미숙한 전술이었고 정세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던 셈이다. 손병희와 이용구등이 합세한 주력부대는 북상하여 공주에 이르러서는 그동안 호응하지 않던 북접의 충청도 농민군과 합세하여 연합세력을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기록화. ⓒ한국문화재재단 월간 문화재 갈무리

우금치에서의 서로 다른 길

전봉준이 주력부대를 끌고 공주 우금치를 향할 때 남원을 차고앉은 김개남은 큰 뜻이 있다는 49일을 채우고서도 본대에 합류하지 않는다. 10월이 돼서야 김개남 장군이 농민군 정예 8천 여명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본대에 합류하지 않고 청주로 진출하여 일본군에 패하고 만다.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1만 명의 농민군은 경상도로 진출하기 위하여 운봉을 공격하나 방아치전투에서 박봉양이 이끄는 수성군과 민보군의 저항에 치명적 터격을 받고 동학농민혁명군의 2대 패전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기록을 남긴다.

우금치에서 죽창을 든 농민들은 무모하게 기관총을 난사하는 적을 향해 달려갔다. 관군 기록에 따르면 무려 40여 차례나 돌격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동학농민군은 부적을 붙이고 주문을 외우면 총알이 피해간다고 믿었기에 병사들을 다시 포화 속으로 몰아넣었다. 우금치 계곡 안은 농민군 시신이 산을 이루고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 전봉준은 해가 저물 무렵에야 공격을 중단했다. 나중에 전봉준은 우금치 전투에서 1만 명 중 500명만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잔류병들은 마지막으로 대둔산 가파른 형제봉에서 70여일을 항쟁하다가 살해되거나 자결하여 동학 농민전쟁은 막을 내렸다.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유효사거리 100m에 불과한 화승총으로 무장했고 그나마 총이 부족해 상당수는 죽창을 들고 있었다. 반면에 관군은 유효사거리 550m인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했고 일본군은 이를 가볍게 개량한 무라타 소총을 사용했다. 더구나 관군은 한양에서 개틀링 기관총과 야포까지 끌고 왔다. 이것들은 모두 조선왕 고종이 구입하여 지급한 것이다. 정읍전투를 마지막으로 전봉준은 손병희와도 헤어졌고, 몇몇 부하만을 거느리고 몸을 숨겼으나 회문산 피노리에서 고발로 체포되고 만다.

전봉준은 일단 잡혀 관아로 넘어갔으나 일본군의 요구로 일본군에 인도되었다가 서울로 끌려왔다. 그는 일본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떳떳이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그와 함께 교수형을 받은 사람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이었다. 여기에 주요 농민군 지도자로는 김개남만이 함께하지 않았던 것이다. 임병찬이 괄목할만한 동학군 지도자였음에 틀림 없는 것은 지금도 임병찬 부대의 거대한 훈련장을 재현하고 있다.

김개남은 방아치 전투에서 패한뒤에 태인 너듸마을의 매부인 서영기 집에 잠거해 있었는데 이웃 종송리 임병찬이 김종섭을 시켜 송두용 집으로 유인했다. 그것은 종송리는 회문산의 지맥으로 너듸마을 보다 험하고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으니 더욱 안전한 곳으로 와 있으라는 것이었다. 임병찬은 김개남을 유인해 놓고 김송현, 임병욱, 송도용을 시켜 전라도 관찰사 이도재에 고발하였고, 이도재는 황헌주로 하여금 강화병 80명을 거느리고 새벽에 김개남을 잡아갔다.

120년전 12월 3일 김개남은 다른 지도자들과는 달리 재판을 받지 않고 즉결처분을 당하였다. 전주 초록바위에서 목이 잘리고 가죽을 벗겨 갈갈이 찢기어 전시함으로 그에게 당한 학대를 분노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동학농민군이 척양척왜를 부르짖었는데 김개남은 천주교도들이 피 흘린 순교자리에서 그의 피를 섞었다.

김개남 장군은 시신을 거두지 못해 묘소마저 마련하지 못하였으나 1995년 4월 거주했었던 지금실에 허묘와 묘비를 세웠다. 임병찬은 왜 김개남을 체포하는데 함정을 팠는가? 임병찬은 전봉준과 함께 왕도주의 였지만 김개남은 반봉건 개벽파이기 때문이었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이 반외세였음은 누구나 동의하지만, 과연 반봉건적이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근대적 개혁 운동이었다는 주장의 근거인 ‘폐정개혁안 12개조’가 1940년 출간된 오지영의 「역사소설 동학사」에 처음 등장했기 때문이다. ‘폐정개혁안 12개조’란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통해 실시했다는 개혁 정책으로 노비문서 소각 · 천인 대우 개선·청상과부의 개가 허용·토지를 평균하여 분작한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일부에서는 이를 소설가의 창작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일부에서는 「역사소설 동학사」가 회고록 성격의 글이라고 주장한다.

그 후 전봉준에게는 역적이라는 이름이 씌어져서 그 자손들도 압제를 받았으나 많은 사람들의 동정과 좋은 평판을 들었다. 이와 달리 김개남에게는 열렬한 혁명가적 칭송이 따르기도 했지만 너무나 많은 사소한 적들을 만든 탓으로 포악한 인물로 치부되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외모, 성격, 현실대응에서 달랐지만, 한가지만은 철석같이 같았다. 묵은 세상을 엎고 새 세상을 만드는 것, 그리고 외국 세력을 몰아내고 자주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중요한 차이는 전봉준은 왕을 중심으로 나라의 질서를 시스템화 한다는 왕도파이며, 김개남은 백성이 주인 되는 반봉건 개벽파 인 것이다. 이들의 행동 양식은 이후 여러면에서 궤를 달리한다. 우리를 안내한 손호철 교수는 “전봉준이 오늘날 운동권의 NL이었다면 김개남은 PD이다”라고 가름하여 이들 차이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120년이 훌쩍 지난 오늘도 우리는 같은 고민과 갈등 속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전봉준이던 김개남이던 역사의 과제에 직면하여 정직한 삶을 바친 것에 머리 숙인다.

1597년 남원성 전투가 외세의 힘을 빌어 향토와 국가를 방위하려다 순절하신 만인정신이었다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은 민중의 힘으로 백성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외세를 막아내며 부패한 정권을 개혁하려고 봉기한 혁명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두 수례바퀴 중에서 전라 좌도의 한 축을 남원이 감당하였기에 남원의 돌맹이 하나 풀 한 포기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해학 대표(사단법인 겨레살림공동체)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