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수 칼럼>
27.보라!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수고도 하지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의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28.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풀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지 않으시겠느냐? 29.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 (눅12:27-29; 새번역)
"Consider the lilies, how they grow: they neither toil nor spin; but I tell you, not even Solomon in all his glory clothed himself like one of these. 28."But if God so clothes the grass in the field, which is alive today and tomorrow is thrown into the furnace, how much more will He clothe you? You men of little faith! 29."And do not seek what you will eat and what you will drink, and do not keep worrying. (Luke12:27-29; NASB)
봄이오니 <예함의집>은 꽃동산으로 변했습니다. 산수유, 매화, 복사꽃, 배꽃, 사과꽃이 후곡마을 전체를 울긋불긋 꽃 대궐로 만들어놓았고요. 지금은 민들레, 애기똥풀, 영산홍이 <예함의집> 주변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습니다. 흰색 찔레꽃도 한창입니다. 치악산 자락에서 올라오는 남한강변의 아침 햇살도 아름답고요. 뒷산 옥려봉의 연두색 푸른 나뭇잎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도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해 줍니다. 며칠 전에는 뒷산에서 두릅을 많이 채취하여 어르신들께 공양했어요. 어제는 지금 막 올라온 뽕잎 새순을 따서 세 차례 덖어 그늘에 널어놓았습니다. 뽕잎차를 만들려고 합니다.
어제 행사 날에는 문을 열어두고 나왔더니, 제 주먹 크기의 파랑새 한 마리가 방에 들어와 하루 종일 놀다가 저녁네 날아갔습니다. 작년 행사 날에도 노란 새 두 마리가 제방에 들어왔었는데요. 아마 새들도 <예함의 집> 가족행사를 축하해주기 위해서 방문한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방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갔더라고요. 예배드리러 나오기 직전 새똥을 치우고 왔습니다.
제가 익숙했던 도시생활을 접고 이곳에 내려온 지 만 1년이 되었습니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은 시간이었어요. 아마 은퇴한 후 도시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면, 제가 지금처럼 이렇게 몸과 정신이 건강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평생 가래 때문에 힘들었거든요. 지금은 싹 가셨습니다. 어지간한 욕심은 다 놓고 살고 있습니다. 우주 경영의 공식인 양심의 결에 따라 살고, 우주의 씨알에 접속하는 시간이 늘어서인지는 모르겠는데요. 산과 같은 부동의 마음을 지닐 때가 많아졌습니다.
저는 지금도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스스로 묻곤 하는데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살고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가장 사람다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늙은이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이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이곳 <예함의집>에서 여러 어르신들과 1년 동안 함께 살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예함의집>이고요. 내가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들은 여러 어르신들이라는 것이었어요.
예수는 도시사람이 아니었어요. 시골뜨기로 태어나 촌뜨기로 자랐어요. 예수 고향인 나사렛은 갈릴리에서도 벽촌입니다. 자그마한 야산을 개간하여 만든 농촌마을이었는데요. 아마도 나사렛의 정경은 <예함의집>이 있는 이곳 후곡마을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시골길을 걷고 있었어요. 제자들의 걷는 모습을 보니 어깨가 축 처지고요. 무언가 근심걱정이 가득 차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걷고는 있는데, 수심이 가득하여 생각은 딴 데 가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예수는 간파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부름받기 전 제자들의 생업은 무엇이었나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거나 가족을 부양하는 가난한 어부들이었어요. 소작 일을 하여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예의 부름에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따라다니고 있지만, 제자들은 떠나온 가족들 염려 때문에 늘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늘 집안 걱정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가장의 책임을 팽개치고요. 부모와 처자식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었지요. 자녀들이 굶지나 않고 있는지, 아니면 입을 옷이 없어 헐벗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근심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마치 패잔병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낌새를 알아차린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무어라고 말씀하시나요? 때마침 하늘엔 까마귀 떼가 날아가고 있었어요. 까마귀 떼를 손으로 가리키며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공중의 날아가는 까마귀를. 저 새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는다. 거두어들이지도 않는다. 곡식을 쌓아둘 곳간도 창고도 없다. 허나, 하느님께서 저 까마귀들을 먹이시지 않느냐? 너희는 저 새들보다 훨씬 귀중한 존재들이 아니냐? 너희 중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네 수명을 일분일초라도 더 연장시킬 수 있냐?” “너희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먹는 것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고, 음식보다 몸이 더 중요한 줄 모르느냐?”
논길을 걷다보니 논두렁에 이름 모를 들꽃이 노랗게 그리고 붉게 피어있었어요. 들꽃을 손으로 가리키며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어요. “보라. 저 들에 핀 야생화를. 저 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허나, 온갖 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도 저 들꽃 하나만큼 아름답게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논두렁에 피었다가, 내일 불쏘시개로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느님께서 저렇게 입히시지 않느냐?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보라!”(Behold!) 그리스어로 ‘카타노에오’(katanoeo)인데요. ‘생각을 내려놓다.‘ 또는 ’생각을 끊다‘는 뜻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빠져있는 생각, 곧 염려근심을 끊어내는 말씀입니다. 온갖 집안걱정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보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만들어 빠져나오도록 합니다. 땅만 보고 걷던 제자들로 하여금 하늘을 쳐다보도록 주위를 환기시킵니다.
선불교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요. 지금 빠져있는 생각에서 빠져나오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제정신 차리도록 주위를 바꾸어주는 것이지요. 마음 챙김(Mindfulness)입니다. 중국 당나라 시대 임제스님(?-867)은 학인들에게 깨달음의 근본자리를 알게 하고자 일갈을 했습니다. ‘할!’이란 방편을 자주 사용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예수도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셨어요. ‘보라!’ 예수는 제자들이 빠져있는 생각을, ‘지금-여기’로 돌려놓고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소유의 삶이 있고요. 무소유의 삶이 있어요. 소유의 삶은 무엇인가요? 소유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삶인데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과 값비싼 것을 소유하는데서 존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어요. 주로 자아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살지요.
소유에서 삶의 의미를 찾다보면, 유무득실有無得失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데요. 살다 보면 손해 볼 때도 있고 이익 볼 때도 있지요. 손해 보았을 때는 좀 불편하게 살면 되고요. 이익 보았을 때는 좀 넉넉하게 살기도 하고 주변을 돌보며 살면 되지요. ‘이익이다, 손해다’의 이분법에 목을 매고 살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인생이 그만큼 고달프게 되지요. 무소유의 삶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요.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는 것이 무소유의 삶이지요.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이 필요하지요. 헌데,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지요. 단지 세상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갖추면 됩니다. 그것에 매이거나 목적 삼아 살아서는 안 되지요. 저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있어요. 돈이 많아 교만하지 않게 해 주시고요. 돈 없어 비굴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루 세 끼니 굶지 않고요. 비바람과 찬이슬 피할 수 있는 공감만 있으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는 마음으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자연은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지 않아요. 무소유로 살지요. 있는 그대로 살다 갑니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세상에 나올 때 빈손이었어요. 갈 때는 어떤가요? 마찬가지입니다. 빈손으로 가야합니다. 애지중지하던 것들도 다 놓고 가야합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열심히 돈을 버세요. 그러면 돈에 매이지 않고 인생을 주인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과거도 아니지요. 미래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입니다. 지금 어르신들은 어디에 계신가요? 이곳입니다. <예함의집>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근심 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파서 병원에 갈 걱정 하시나요? 아닙니다. <예함의집>에서 다 해결해주지요. 항상 만족하며 기쁨으로 사시면 됩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하게 사시는 여러분이 되길 빕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kmsi@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