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수 칼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 7.징계를 받을 때에 참아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8.모든 자녀가 받은 징계를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아들이 아닙니다.(히12:6-8;새번역)
FOR THOSE WHOM THE LORD LOVES HE DISCIPLINES, AND HE SCOURGES EVERY SON WHOM HE RECEIVES." 7.It is for discipline that you endure; God deals with you as with sons; for what son is there whom his father does not discipline? 8.But if you are without discipline, of which all have become partakers, then you are illegitimate children and not sons. (Hebrews12:6-8;NASB)
석가모니 붓다께서 도를 터득하신 후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를 대상으로 하신 첫 설교를 일컬어 사성제四聖蹄라 부릅니다. 네 가지 고귀한 진리라는 뜻인데요.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괴로움의 소멸(滅)과 소멸방법(道)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고․집․멸․도라 하는데요. 이 네 가지는 서로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늙고 병들어 죽는 과정 속에서 살아갑니다. 생·노·병·사의 인생코스를 일컬어 석가모니는 둑카(dukkha)라 불렀습니다. 이를 일반적으로 고苦로 번역하는데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기인식이라 하겠습니다. 이 네 가지 고통 외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야 할 때 그리고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고통이 따르게 되지요. 고제苦蹄가 인간존재의 실상입니다.
어디에서 이런 고통이 생기나요? 집착이지요. 무지에서 옵니다. 변화의 세계 속에서 불변한 것을 찾고, ‘내 것’이 본래 없는데도, 있다는 생각에 빠져 그것에 사로잡히거나 매달리는 것이 집착입니다. 집착은 사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산이지요. 집착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는 가르침이 집제集蹄입니다. 생긴 것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생멸生滅은 자연의 이치지요. 고통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고통은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고 사라진다는 믿음을 일컬어 멸제滅蹄라고 합니다. 고통을 소멸시키는 방법에는 여덟 가지 길(八正道)이 있다는 것이지요.
첫째는 정견正見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이지요. 우리는 세상을 색안경을 끼고 봅니다. 검은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이 온통 검게 보입니다. 빨간 안경을 끼면 어떻게 보이나요? 온통 빨갛게 보입니다. 종북終北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면 어떻게 보이나요? 세상 사람이 온통 종북 세력으로 보이지요. 우리가 선글라스를 벗고 세상을 보는 있는 그대로 보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정사유正思惟입니다. 바르게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바른 생각을 하면 우주의 바른 기운이 몰려오고요. 사특한 생각을 하면 우주의 부정적인 기운이 몰려옵니다. 예수께서도 회개(metanoia)를 외쳤어요.(막1:15) 회개는 다른 게 아니지요. 생각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을 하는 것이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삶이라고 했어요. 함석헌도 생각을 바르게 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습니다. 생각이 사람이고, 사람이 생각입니다.
정어正語입니다. 바른 말이지요. 예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셨는가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했어요.(마15:11) 항상 말조심하고요. 바른 말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생각한 것이 입으로 튀어나오게 되어있어요. 말하고 나서 생각하면 후회하게 돼요. 생각하고 나서 말하면 실수를 줄일 수 있어요. 말은 반드시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남을 비방하는 말이나 이간시키는 말을 하면 그것이 결국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화가 나면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 천천히 말해야 인간관계의 파손을 막을 수 있습니다.
바른 생각, 바른 말에 이어 이치에 맞는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를 정업正業이라 합니다. 직업의 귀천을 떠나서, 직업을 고를 때 이웃과 사회에 유익이 되는 떳떳하고 건전한 직업을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를 정명正命이라 합니다. 항상 자기를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옳은 일에는 물러서지 않고 열과 성의를 다하여 정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뜻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 정념正念인데요. 하늘 뜻(天命)을 찾고, 천명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항상 생각과 몸을 단정하게 하는 태도가 정정正定입니다.
인간이 당하는 온갖 고통이나 괴로움은 무지와 집착에서 생기는 것인데요.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바르게 보고 생각하며, 바르게 행동하고 생활할 때,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관념종교가 아니라 생활종교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바름을 회복하는 길이야말로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비법임을 가르쳐주고 있어요.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서 자기에게 앞으로 당할 일을 밝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장로들, 제사장들, 율법학자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겪게 되고 죽임을 당할 일을 말씀합니다(21절). 그러자 베드로가 펄쩍 뛰면서 주님을 나무라듯 말하지요. "주님, 안됩니다. 그런 일이 결코 주님께 닥치지 않을 것입니다.”메시아는 절대로 고난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아마도 베드로는 당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대변했을 것이에요. 그 때 주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물러가라. 사탄아, 너는 내게 걸림돌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이어서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24절)
십자가를 거부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무어라고 꾸짖나요? 사탄이요 스캔들이라 하고 있어요. 사탄은 무엇인가요?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요.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거나 갇혀 사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무어라고 말씀하고 계신가요?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편이 무엇인가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어요. 고난을 받고 죽임당하도록 허락하셨어요. 이게 하나님의 구원방식이에요. 기독교의 복음이고 메시지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그리스도 외에 나는 그 무엇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어요(고전2:2).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필수입니다. 선택사항이 아니지요.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억울해도 져야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분하고 원통해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의미 없는 십자가는 없어요. 어떤 종류의 십자가이든 다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합니다. 내면의 성찰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어줍니다.
진주는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바닷가에 사는 조개 속에 어느 이물질異物質이 들어가게 됩니다.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럽겠습니까? 처음에 조개는 그 이물질을 밖으로 내보내려고 안간힘을 다 쓰지요. 헌데 실패하게 되면 어찌하나요? 결국 체념하고 말지요. 그리고 내면의 액液을 분비하여 그 이물질을 감싸게 됩니다. 움직일 때마다 거추장스럽고 성가 싫지요. 그 때마다 조개는 내면의 액을 분비하여 그것을 감싸고 또 감쌉니다. 그러다보면 조개가 자라면서 혹 덩어리도 저점 커지게 되지요. 사람으로 치면, 일종의 암 덩어리와 같은 것이지요. 보통 성가신 게 아닙니다. 그저 팔자소관이려니 생각합니다. 괴롭고 힘들 때마다, 조개는 참고 견디면서 액으로 감싸지요.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조개 속에 자란 혹 덩어리는 반짝이는 진주로 자라게 되지요. 안타까운 것은요. 조개는 자기가 아름다운 진주를 품고 있음을 모른다는 사실이지요. 그와 같은 인고忍苦의 삶을 통해서 조개는 자기보다 수 천 배의 가치 있는 진주를 키워가지요. 고통을 감싸 안는 아픔 속에서만 진주는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도 마찬가지에요. 까닭을 아는 고통도 있고요. 까닭을 모르는 고통도 있어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운명적으로 고통이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고 견딜 때, 그 고통은 진주보다 더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하게 됩니다. 억울하게 흘렸던 눈물은 반짝이는 보석이 되고요. 참았던 아픈 가슴은 아름다운 백합향기로 되지요.
요한묵시록 7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성도들을 바라보다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어린 양 앞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너무도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보였습니다. 그 때, 그가 주님께 묻지요. "저기 흰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어디서 온 분들입니까?” "저 사람들은 큰 환난과 역경을 겪어낸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어린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옷을 빨고, 하나님의 옥좌 앞에서 그 분을 밤낮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네.”
그렇습니다. 누구도 제 십자가를 지고 시련을 견디지 못한 신도들은 어린양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오라고 해도 나갈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면서 고난을 겪은 사람만이 그분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있습니다. 고난은 불행이 아닙니다. 징벌도 아닙니다. 저주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인의 진정한 가치는 언제 어디서 나타날까요? 바로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곳에서 나타나지요.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 생각에는 맞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도, 매를 드실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데도,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유 없이 매를 맞을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견책하시고, 당신의 아들에게 매를 드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매를 들듯, 하나님은 우리를 견책하신다고 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는 참고 견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한ㄴ 자녀에게 십자가 지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을 통해서만 인간은 영적으로 성숙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그 어떠한 아픔과 슬픔도,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목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서서 구경하고 있었어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지 못하고 쓰러지자, 그 때 시몬이 일진이 사납게 걸려들었습니다. 그 많은 구경꾼 중에 시몬이 재수 없게 걸려든 것이지요. 시몬은 십자가를 질 의사가 없었지요. 지고 싶어 진 것도 아니었지요. 그냥 재수 없이 걸려든 것뿐이지요. 그러나 시몬은 엉겁결에 진 십자가 때문에, 기독교 역사에서 칭송을 받는 인물이 되었어요. 그가 진 십자가는 화禍가 아니라 복福이었고요. 저주가 아니라 은혜가 되었던 것이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살다보면, 이유도 모르면서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회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 때 십자가는 영롱한 진주가 되어 우리의 삶에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할 것입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kmsi@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