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의 계보학⑫
▲ 이정철 국민대 교양대학 교수 |
나는 적의 계보학을 생각하며 먼저 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본다. 적(敵)은 누구인가? 그들은 왜, 언제부터,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적이 되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적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이 글을 통해 적의 기원과 적대관계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로 ‘다시 얽힘’에 대해 간단히 논의하고자 한다.
초발적 적화와 반응적 적의
적의 기원에는 두 가지 방향성이 있다. 하나는 초발적 적화(敵化, enemization)이고, 다른 하나는 적화의 폭력이 낳은 반응적 적의(敵意, antagonism)이다.
초발적 적화는 대게 인위적이며 이기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상대로 인해 빼앗긴 것 같거나 혹은 상대가 나를 낮추어 보고 있는 것 같다는 피해의식, 상대의 것이 내 것이 되면 나는 더 크고 위대해지리라는 소유의식, 미움의 대상을 설정하면 내적 동요가 가라앉고 결속을 다질 수 있으리라는 조작의식 등을 통해 인간은 타자를 적화한다.
히브리 성서에 최초 인류로 묘사된 아담과 하와의 자녀 가인은 바로 이처럼 자신의 동생 아벨을 적화했다. 신이 아우의 제물은 받으면서 자신의 제물은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와 신의 꾸중으로 인한 수치(shame)는 결국 아벨에 대한 질투와 미움으로 변했다. 가인은 아벨을 결국 살해했다.
적화가 낳은 폭력은 다시 상대의 적의를 불러온다. 죽은 아벨은 자식도 없어 소리 없는 소멸로 끝났지만 (인간의 이기적 상상력은 얼마나 많은 동료-인간들을 울음도 아우성도 들리지 않게 땅 속에 묻어버렸는가!), 살아남은 자는 종종 적의를 거두지 못한다.
이러한 반응적 적의는 서보혁 선생이 묘사한 바와 같이 “적정 적대의식”의 선에 머무를 수도 있지만, 항상 그 적정선에 남아있지는 않는다.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의 영향을 받은 몽골 제국의 공격을 이겨낸 맘루크가 기독교인들에게 관용 없는 복수를 선언한 것처럼 폭력은 폭력으로 되돌아오는 불행한 사슬이 연결되기도 한다.
나에서 너로, 너에서 적으로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 누구의 적화가 초발적 적화인지, 누구의 적화가 반응적 적화인지 항상 손 쉽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쟤가 먼저 그랬어요.”라고 말하는 아이들 간의 다툼을 보고 선생은 누구의 잘못이 먼저인지 쉽게 알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현실사회에서 적은 처음부터 늑대로 다가오기만 하지는 않는다. 적은 처음부터 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툼은 흔히 작은 갈등, 이를테면 ‘티격태격’으로 시작되는데, 누구의 ‘티격’이 먼저인지, 어느 것 부터를 ‘태격’이라고 할 것인지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현실은 종종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티격’이 ‘태격’이 되고, ‘타격’이 ‘폭력’으로 넘어가며, ‘우리’는 어느 새 ‘남’이 되고, ‘남’은 어쩌다 ‘적’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적이란 장 보드리야드의 말처럼 늑대에서 바퀴벌레로, 바퀴벌레에서 기생충으로, 기생충에서 바이러스의 모습으로 점점 작아지는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적의 모습은 때로는 반대로 발전한다. 먼저는 자타가 구분되지 않는 ‘우리’에서, 작은 차이가 서로 부딪치고, 충격이 고조되면서 우리는 나와 너로, 우리와 너희로, 그리고 적과 적으로 분화해 나가는 것이다. 마치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처럼 말이다. 그렇게 보면 적을 바이러스니, 기생충이니, 바퀴벌레니 하고 표현하기가 조금 그렇다. 그들은 나의 일부였으며, 나는 그들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 Mariotto Albertinelli, 「The Sacrifice of Cain and Abel」 (1906) ⓒWikimediaCommons |
상호관계성과 비다공의 선
그렇다면 티격태격과 같은 작은 갈등과 적화의 차이는 무엇일까? 현실의 특정 사건을 기준으로 어디서부터 갈등이고, 어디서부터 적화인지 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개념적으로 갈등과 적화의 차이는 상호관계성의 유무에 있다. 적화는 너와 나는 더 이상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이를 위해 나는 관계철학을 잠시 논해야 하겠다.
세계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나는 네가 있어 존재하고, 우리는 그들이 있어 존재한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은 구분될 수 있지만, 분리될 수 없다. 앞선 이명호 선생의 글은 연기법(緣起法)을 설명하는 인드라망 세계관을 통해 나와 너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제석천의 그물에 달린 구슬들은 말하고 있다. “내 안에 너 있고, 너 안에 나 있다.”
서양에서는 유기체철학을 주창한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이러한 관계적 우주론을 잘 설명했다. 그는 존재의 가장 작은 단위라고 할 수 있는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는 모두 주변의 현실적 존재들에 대한 인식(prehension)과 합생(concrescence)을 통해 형성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다시 주변의 모든 실체적 존재들의 생성에 기여하는 하나의 데이터로 수용됨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내적연결의 관계로 이어져 있음을 설명했다. 즉, 인드라망의 보배 구슬들이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있는 끝없는 관계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적화란 이러한 내적연결성, 상호관계성을 부인한다. 실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야 나는 너를 마음대로 가질 수도, 밟을 수도, 짓이길 수도 있는 것이다. 너는 나의 일부가 아니라 바퀴벌레고, 기생충이고, 바이러스여야 한다. 그래야 너를 미워하고, 죽여도 되기 때문이다. 너와 나 사이에 비다공(非多孔, nonporous)의 선을 긋고, 비상호적 관계를 맺는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그대(thou)’가 아니라 ‘그것(it)’이 될 때, 우리는 단순한 갈등 관계에서 적대의 관계가 된다.
적대관계를 풀어내는 다시 얽힘의 원리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적대 관계가 너와 나의 분리로 인한 것이라면, 적대 관계의 해소는 결국 다시 얽힘(re-entanglement)으로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북한과 대화하고, 종교 간에도 끊임없이 대화해야 하는 이유다. 끊어진 줄은 다시 잇고, 그어진 선은 구멍을 뚫어 필요한 것이 오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은 일방적일 때가 많다. 한 쪽은 계속 이으려 하는데, 한 쪽은 계속 잘라낸다. 한 쪽은 안으려고 하는데, 한 쪽은 때리기만 한다. 그럼 계속 맞기만 해야 하는가? 예수는 맞고 한 대 더 맞으라 말한다. 석가모니는 맞았다고 상심해 말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즉, 이들은 모두 폭력의 연쇄사슬(혹은 원영상 선생의 표현처럼 “업의 악순환”)을 끊고, 다시 얽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반응적 적의가 아니라 충격을 흡수하는 스펀지와 같은 수용적 사랑(receptive love)이라고 말한다.
수용적 사랑은 수동적 굴복과 무기력한 희생과는 다르다. 수용적 사랑이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며, 변화를 위해 용서와 희생을 선택하는 더 크고 용감한 힘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간디는 이러한 사랑을 “가장 크고도 겸손한 힘”이라고 표현했으며, 비폭력은 약하거나 소심한 것이 아니라 “강한 자들의 적극적 행동”이라고 말했다. 관계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수용적 사랑은 상대가 단절한 연결성을 회복하는 거의 유일한 적극적 행동이다. 내가 받아들임으로 우리는 다시 연결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수용적 사랑이 추구하는 다시 얽힘은 영원(永遠)과 초월의 세계에 침전하여 오늘의 폭력에 눈을 감는다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랑은 수용 자체가 저항이다. 불의 앞에도 끊임없이 상대의 적의에 적의로 반응하지 않고, 나는 너와 관계없다고 단절을 선언하지 않는 그것이 저항이다. 나의 얼굴은 끊임없이 상대에게 설득적으로 말한다. 괜찮지 않아. 하지만 나는 너를 포기하지도 않아.
이정철 교수(국민대 교양대학)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