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의 계보학⑨
이 글은 기독교세계(2024년 2월호)에 게재된 것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 저자 주 |
▲ 이형규 교수 |
평화중재자들은 인종, 민족, 종교적 적대감 같은 ‘정체성 기반갈등’(identity-based conflicts)이 ‘이익 기반갈등’(interest-based conflicts) 보다 그 해결이 훨씬 복잡하며 어떤 다른 갈등보다 더 파괴적이라고 말한다. 현재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은 정치-경제적 이익을 위한 갈등이라기보다는 정체성 기반갈등의 모습을 띠고 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그리고 미얀마와 소수민족 갈등, 아니 중국과 미국의 갈등도 경제적 측면에 더해 이념과 가치 같은 오래된 문화-문명적 갈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휴전이나 경제적 배상처럼 일시적으로 갈등을 해결하여도 정체성 기반갈등은 다시 반복되는 특징이 있기에 좀 더 근원적인 변화를 요청한다. 피해자들에게 회복의 능력과 자기인정을 북돋아 주며 갈등과 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능력을 키우고 그 위에서 도덕적 발전의 기회로 삼아 미래에는 상대의 관점을 더 잘 이해하게 하여 장기적으로 갈등을 예방하는 ‘평화능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갈등중재학자인 존 폴 레더락(John Paul Lederach)은 진정한 화해를 위해 개인, 사회, 국제적 차원의 영적훈련을 요청한다. 대부분의 정체성 기반갈등들은 대개 잔인한 폭력을 경험하며 강화된 오랜 적대감이 개인 안에 내면화된다. 단순히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 평화정착 후를 더 유의해야 한다. 갈등의 예측, 갈등의 전개 양상 디자인, 문화분석 같은 능력을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성서의 가인과 아벨, 사울과 다윗의 관계처럼 적의 시작은 정신의 한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역으로 모든 사람 안에 신의 형상이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적도 나의 조력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국제정치학자 스콧 애플비(R. Scott Appleby)는 전쟁 속 종교의 피할 수 없는 두 모습-평화를 위한 전사와 폭력을 위한 전사-을 지적한다. 전자의 종교적 관용을 훈련받은 비폭력 종교전사들은 정의와 평화의 가공할 전사들이라고 말한다. 마틴 루터 킹(MLK)과 박사과정을 함께했던 보스톤 대학(BU)의 사회윤리학자 폴 디츠(Paul Deats)는 2003년 부시정권 때 미국의 이라크 공격 전날 83세의 노구를 이끌고 보스톤 시내에서 반전시위대의 맨 앞에 서 있었다. 신문 부고는 ‘진정한 평화주의자’(A True Pacifist)였다고 그를 소개하였다. 디츠는 종교인들이 전쟁과 갈등 속에서도 화해를 만들어 내고 마지막 까지 포기하지 말고 폭력의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보스톤 인격주의’(Boston personalism) 사상에 기반한 평화주의가 킹과 디츠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 현재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은 정체성에 기반한 갈등이기에 해결하기가 더욱 어렵다. ⓒGetty Images |
인격주의는 미국 외교정책에도 영향을 끼쳤던 라인홀드 니버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현실주의’(Christian realism)에 비해 학계에서 인기가 많지 않았다. 기독교현실주의는 그 시대 미국의 대외확장 정책과 맞물려 ‘좋은 폭력’으로 ‘나쁜 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는 즉 폭력을 통해 폭력을 제어해야 한다는 윤리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당 전쟁론’의 폭력의 이중성은 폭력의 끊임없는 반복을 낳을 뿐이라고 킹은 비판하며 ‘비폭력 저항’운동을 이끌며 인격주의를 사회문제에 실천적으로 적용하였다. 흑인시민권운동은 전쟁 후 인종차별정책들에 막혀 사회질서가 그 밑동부터 흔들리던 미국의 근원적 갈등을 치유하며 적대적이었던 백인과 흑인 간 양보와 화해를 만든 평화운동이었다.
인격주의는 인간 ‘인격’에 대한 강력한 믿음과 그것의 신적 기원을 믿는다. 인격의 실재함의 믿음 없이 현대 인류 문명은 존속할 수 없다. 모든 국제법에 우선하는 ‘세계인권선언’이 바로 자크 마리탱과 엠마누엘 무니에 같은 프랑스 기독교 인격주의 철학에 근거함은 당연한 귀결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인권선언 1조). 이것이 근거가 되어 2차세계대전 ‘홀로코스트’처럼 인권을 억압하는 불량국가에 대한 인도주의적 개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권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의 주권은 제한될 수 있다. 오늘날도 세계 도처의 전쟁터에서 고문과 대량학살 같은 일을 자행하는 국가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외교-군사적 제재는 인격주의에 기초한 것이다.
인격주의자들은 비폭력 저항을 추구한다. 비폭력저항은 비겁한 전략이 아니라 적대적 악의 세력에 맞서는 용기 있는 행위이다. 적을 무찌르고 모욕을 주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궁극적 목적인 ‘사랑받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적을 우정과 이해로 이기는 방법이다. 갈등 해결 이후 즉 갈등의 궁극적 목적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 비폭력 저항이다.
따라서 공격은 직접적으로 악을 행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의 힘과 권력을 향한다. 물론 가해자를 향한 복수나 증오심의 거절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합당한 증오도 나와 사회의 영혼을 병들게 하기에 멈춰야 한다. 50-60년대 흑인 인권운동 그룹들은 늘 데모하기 전날 혐오와 적대감으로 가득 찬 백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제거하고 억제하는 훈련을 하며 적절한 비폭력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토론을 하였다.
어떻게 하면 적대자들의 이성과 선한 마음에 호소하고 설득할 수 있을까? 비폭력 저항운동은 방법론적으로 엄격해야 하며 정교한 기술들을 요청한다고 킹의 스승 하워드 서먼(Howard Thurman)은 늘 강조하였다. 악과 싸우다 타인을 속이고 증오심 가진다면 우리도 어느 순간 거짓말쟁이가 되어 있을 것이며 그들과의 도덕적 차별을 잃게 될 것이다. 선한 시민이 되기 위해 따뜻한 마음뿐만 아니라 함께 잘 살기 위해 필수적인 훈련들인 타인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능력, 용서를 구하고 또 베풀 수 있는 능력, 서로 오해하지 않고, 존중의 불평등을 줄일 방법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렇게 찾아낸 비폭력 저항의 방법들과 기술들을 마스터해야 ‘사랑받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서먼은 믿었다. 인격주의자 서먼과 킹은 비폭력 저항을 통해 냉소적 불신과 회의주의를 멀리하면서 결국 우주는 정의의 편이라는 미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적과 함께 갈등 이후에도 평화를 지탱해줄 사회의 영혼을 만들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형규(한국외국어대학교 연구교수) leehk6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