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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쩌면 그렇게 폭력적이며 또한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기사승인 2024.05.17  02: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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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별과 혐오로 고통받는 이들을 기억하는 기도회(욥기 21:1~6)

▲ 최형묵 목사는 한·일·재일 URM-이주민 국제 심포지엄 둘째 날 아침 차별과 혐오로 고통받는 이들을 기억하는 기도회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연대를 통해 극복할 것을 주문했다. ⓒ이정훈
이 원고는 한·일·재일 URM-이주민 국제 심포지엄 둘째 날 아침 기도회에서 최형묵 목사님이 전한 설교의 전문이다. 설교문을 게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최형묵 목사님과 국제 심포지엄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고통 받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연대를 통한 극복을 강조한 이 설교문을 통해 우리의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교회의 역할을 고민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차별과 혐오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모으는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차별과 혐오로 고통을 겪는 이들이 엄존하는 현실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만, 또한 그 차별과 혐오가 심지어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현실에 더욱 마음 아파하며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차별과 혐오가 없는 세계를 이루기 위해 먼저 스스로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곤혹스러운 상황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그 상황 가운데서 욥기의 말씀을 마주합니다. 흔히 욥기 하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라는 구절부터 떠 올립니다. 더불어 그 주인공 욥을 인내와 순종의 표상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편견이요 착각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 경구는 욥의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면서 던진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세상 이치인데, 그러지 않은 걸 보니 욥에게 틀림없이 잘못이 있다는 것을 역설하는 대목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욥이 까닭 없이 겪는 고통이 욥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던져진 말로써 고통을 겪고 있는 욥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욥은 현실에서 통용되는 인과의 법칙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항변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기존의 법칙, 그 법칙을 용인하는 하나님에 대해 순종하며 인내한 것이 아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그런 법칙을 용인한다면 그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항변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겠다고 나선 주인공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진 재산을 다 잃은 욥은 이어 사랑하는 자녀들을 모두 잃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참담한데, 몸까지 몹쓸 병에 듭니다. 가진 것을 잃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데다, 자신의 품격과 인격마저 완전히 손상당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를 보고 달려온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겠다고 나서지만, 한결같이 위로는커녕 아픈 상처를 덧내는 말들만 뱉어놓습니다. 앞서 말한 그 경구로 집약되듯이, 그것이 마땅한 이치이거늘 그렇지 못한 걸 보니,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보라는 이야기들뿐입니다.

욥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항변하면서도,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으로 몸부림칩니다. ‘내가 왜?’라고 절규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가장 기쁜 생일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3장). 하나님마저 그날을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탄식하며 어머니는 어쩌자고 자신을 낳았는지 절규합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고 도무지 감당하기 어렵다는 탄식이요 절규입니다.

애초 고통을 겪는 욥을 위로하겠다고 달려오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알고 믿는 세계와 하나님에 대한 기존의 통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친구들은 끊임없이 욥의 잘못을 추궁합니다. 네가 잘못했으니 하나님이 벌주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지겨운 이야기가 반복될 때 욥은 더 큰 목소리로 외칩니다. 욥은 친구들을 향하여 자기 이야기를 정말 제대로 들어달라고 호소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그 첫머리입니다. 이로부터 욥의 이야기는 중대한 반전에 이르게 됩니다.

욥의 항변과 호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악한 사람들이 잘 되고 거꾸로 착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숱한 사례들입니다. 자 봐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디 착한 사람이 복 받고 악한 사람이 벌 받느냐, 그 반대 아니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욥의 그 항변은 자신에게 크나큰 반전이요 각성입니다. 이제껏 욥은 제발 자신의 고통을 헤아려달라고 했을 뿐이지만, 이 순간부터 욥은 타인의 고통에 눈길을 돌립니다.

나만이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세상 자체가 그렇게 잘못되어 있고 곳곳에 그렇게 억울하게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현실이 그렇다면 그것은 운명적 질서가 아니라 바로 그처럼 악행을 범하는 사람들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진실을 일깨웁니다. 사람들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그 부조리한 질서와 편견은 극복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삶의 공동체를 어떤 기준으로 판별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객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통의 체감 범위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고통을 겪지 않고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다면, 공동체는 그만큼 확장됩니다. 그렇게 확장된 공동체로서 세상은 훨씬 살만해집니다.

한동안 자신의 고통 때문에 탄식하며 절규하며, 어쩌면 고작해야 자기연민에 빠져 있던 욥은 이제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며 기존의 허구적 논리에 항변하기 시작합니다. 더 큰 목소리로 더 자신 있게 세상의 부조리, 그 부조리에 매여 있는 하나님을 향하여 항변합니다. 이제 그 항변은 단순한 항변이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항변이요, 따라서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만큼,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희망의 언어가 됩니다. 이 점에서 지지치 않은 욥의 항변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 잘못된 믿음을 바꾸는 우렁찬 희망의 함성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세상을 잘 알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다는 친구들이 아니라, 세상이 온통 부조리로 가득하니 이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느냐 물음을 던지며 하나님께서 그런 세상을 정당화해 줄리 없다고 항변한 욥이었습니다. 욥기의 진실은 세상의 부조리와 잘못된 믿음을 무너뜨린 욥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친구들이 욥에게 사과하면 비로소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용서해 주겠다고 한 말씀(욥 40:8)은 정말 통쾌하기 그지없습니다.

기존의 편견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것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고통을 겪는 욥은 외칩니다.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이 내게는 유일한 위로이다. 내게도 말할 기회를 좀 주어라. ··· 내 곤경을 좀 보아라.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가 막혀 손으로 입을 막고 말 것이다.”(욥 21:2,3,5)

고통을 겪는 이들의 호소를 듣고 그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마주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어떤 세계관이나 그에 따른 편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넘어서 고통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을 인간으로, 생명을 생명으로 마주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삶의 기쁨을 누리는 세계가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놀랍도록 발전하고 풍요로운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는 만큼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은 심각해지고, 불공정한 상황에 처한 이들의 고통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해야 할 정치는 오히려 기득권 체제를 강화하고자 적대와 혐오의 논리로 사람들을 편 가르는 데 급급할 뿐입니다.

사회적 편견은 강화되고 타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 가운데 분노감도 꽉 차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의 참극은 두말할 것 없거니와, 어쩌면 평범한 일상의 삶터마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지 모릅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상대를 동반자로 여기기보다는 적대자로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만연한 차별과 혐오가 이를 말해 줍니다.

세계의 절반을 이루는 여성에 대한 차별, 성차별이 여전합니다. 절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들은 오히려 사회적 소수자로 전락했고 그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심각할 뿐 아니라 다수의 노동자들이 정당한 노동권의 보장은커녕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 이들도 다수입니다. 이주 노동자들은 인간으로서 기본권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적 소수자들은 사회적 편견으로 고통을 겪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 죄인의 낙인까지 받아야 하는 현실 가운데 있습니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이 비장애인에게 불편함을 초래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요구는 다수의 편의를 명분으로 묵살되고 있습니다. 사회적 참사를 겪은 가족들은 이미 가족을 잃은 슬픔에 더하여 죽음을 정치화하는 불순세력으로 비방을 받으며 가중되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이 겪는 고통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들의 호소에 응하여 연대하는 이들마저 비방받고 고발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임보라 목사는 ‘이단자’의 낙인을 안았고, 이동환 목사는 ‘출교’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 일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고 실현해야 할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기에 우리는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교회가 사랑의 복음을 구현하기는커녕 오히려 차별과 혐오의 낙인을 찍는 데 앞장서고 있으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우리는 이 참담한 현실 가운데서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먼저 듣고 그 현장을 온전히 직시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그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며,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를 나누고 연대하기를 바랍니다.

마침 이번 주간은 광주항쟁 44주기를 맞이합니다. 광주항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이 화제가 되었을 때 작가 한강(韓江)은 그 작품을 이끈 동기를 한마디로 말했습니다.

“세상은 어쩌면 그렇게 폭력적이며 또한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이 물음을 이해하는 데 긴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저항을 무참한 살육으로 짓밟은 권력이 극단적인 폭력을 보여주었다면, 그 폭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이 연대하며 일군 ‘절대 공동체’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뜻을 땅 위에 이루는 실로 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고 숱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이 비극적인 현실 가운데서 그 아름다움을 구현하기를 바랍니다. 고통의 호소에 먼저 귀 기울이고 손을 내미는 것이 그 시작입니다. 그것이 차별과 혐오로 고통받는 이들을 기억하는 우리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렇게 고통의 호소에 공감하고 그 고통을 겪는 이들과 연대함으로써, 모두가 저마다의 아름다운 삶을 누리는 세계를 열어가는 데 우리 모두가 헌신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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