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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ve ‘Cholsoo Lee’(이철수를 구하라)!”

기사승인 2023.09.01  14:4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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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프리 철수 리>와 <함께 부르는 노래>(유재건, 범우출판사, 2009) 1

▲ 차이나타운 총격 사건 용의자들. 5번 숫자를 들고 있는 사람이 이철수이다. 그는 당시에 머리카락이 짧고 콧수염을 길렀다. 하지만 목격자의 증언은 이철수의 체구와 달랐고, 머리카락이 어깨 길이였으며, 콧수염은 없었다. 또한 중국인이라는 거였다. 하지만 경찰은 중국인과 한국인을 구별하지 못했고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철수를 체포했다. ⓒ커넥트픽쳐스
이것은 이철수란 사람의 이야기라네
그의 경우는 흔히 있는 것
너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네
(중략)
미국 땅에서의 낯선 일들은 그의 설 자리를 빼앗아버렸고
차이나타운에서의 한국인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네.
빈민가에 갇힌 철수는
무엇이 되길 원했을까?
무엇을 보길 원했을까?
보아야 할 것들, 들어야 할 진리, 찬양해야 할 삶이 넘쳐야 할 거리에서
총소리가 울렸네, 한 사람이 싸늘하게 죽어갔네
세 명의 관광객 증인의 확실치 않은 기억은 그가 범인과 비슷하다는 것,
그러나 우리 모두가 비슷한 거 아닌가?
한 건 끝내야 할 경찰은 철수의 손에 수갑을 채웠네.
- ‘철수의 노래’ 중에서(작사·곡: 제프 아다치 외 5인), <함께 부르는 노래>, 146쪽.

무더위가 한창이던 어느 여름날, 다큐영화 시사회에 갔다. 마음 같아서는 시원한 바람 쐬면서 쉬고 싶었지, 두 시간 거리를 움직이는 게 꺼려지는 날씨였다. 하지만 그전에 취재 일정이랑 겹쳐서 한 번 취소한 적이 있었는데, 다시 초대해주신 교수님과 자리를 마련해주신 커넥트픽쳐스 대표님의 성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에큐메니안의 얼굴도 있고 말이다. 결론은! 가지 않았으면 많이 후회할 뻔했다. 게다가 그 모든 여정에 함께 하셨던 김성수 권사님(고 유재건 장로님의 아내)까지 직접 뵈었으니, 의미가 컸다.

한국 이민사 중 가장 센세이셔널한 것으로 손꼽히는 이철수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철수 리>(감독: 하줄리·이성민, 배급: 커넥트픽처스)는 ‘이철수’라는 인물과 그를 구명하기 위해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거의 50년 전 사건을 지금 이 시대에 다시 들춰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여주고 있었고, ‘철수’는 또 다른 ‘나’의 모습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어리석었던) 나처럼 어떤 핑계를 대고 영화보자는 권유를 거절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유혹에서 이기고(흐흐) 꼭 보시기를. 안 보면 분명 후회한다구요!

시사회라고 해야 번듯한 극장에서 하는 건 아니었고, 10여 명 둘러앉을 수 있는 공간에서 모니터로 감상하는, 지극히 소박한 자리였다.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이어서 매우 익숙한 이름이면서도(초등학교 시절부터 교과서에 자주 등장한), 먼 미국 땅의 낯선 ‘철수’라는 사람에 관한 영화였다. 더군다나 ‘이철수 사건’이 발생한 73년도에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었고, 자라면서도 들어본 기억이 없어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충격이 컸고, 그동안 왜 몰랐었나 하는 자괴감까지 들었다. 그때만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철수만이 아니라, 곳곳의 어느 땅에서도 여전히 ‘철수’가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에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낫 길티(Not Guilty)

▲ 면회 중인 이철수와 이경원 기자 ⓒ커넥트픽쳐스

탕! 탕! 탕!!!

1973년 6월 3일 오후 6:30분 경,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갱단(와칭파) 고문인 입이택이 피살당했다. 가해자는 현지인, 관광객 등이 있는 거리 한복판에서 입이택을 향해 권총으로 3발을 쏜 후 권총을 버리고 도망갔다. 경찰은 그걸 증거품으로 수거했고 목격자를 조사한 후 한국인 이민자 ‘이철수’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6월 7일이었다.

목격자의 진술은 이철수를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범인은 키가 더 크고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길었으며 중국인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이철수를 체포했고 범인으로 몰아갔다. 비슷하게 생겼다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였다. 거기에 현지 경찰은 해결하지 못하고 쌓여 있는 사건들로 인해 압박을 받고 있었고, 한 건이라도 해결해서 체면을 만회하고자 했다. 그 거미줄에 철수가 걸려든 것이었다.

6월 28일, 이철수는 살인혐의로 기소됐다. 그리고 다음 해 4월 재판, 6월에 첫 공판이 열렸는데, 목격한 증인 3명만 출두시켜서 일사천리로 재판을 진행했다. 7월 10일, 이철수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트레이시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 후 1977년 10월에 이철수는 교도소 안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피살자도 같은 교도소 안에 복역 중이었는데 아시아인을 혐오하는 백인이었다. 이철수는 지속적으로 그에게 괴롭힘과 생명의 위협을 받았는데 그날은 상황이 심각했다고 한다. 이철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어를 하다가 그를 죽이게 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재판이 열리게 되는데 살인으로 판결이 나면 캘리포니아주에 부활된 새 사형법에 따라 10년 만에 처음으로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기사가 신문에 나왔다. 이 기사로 인해 이철수 구명 운동의 최고의 동지가 되는 유재건 변호사와 이경원 기자가 뭉치게 되고 11월 18일, 듀엘 교도소에 있던 이철수를, 첫 면회하게 된다.

나는 천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악마도 아닙니다

면회에서 이철수는 말한다. 자기는 악마도 천사도 아니지만, 차이나타운의 살인범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는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이도, 믿어주는 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 변호사와 이 기자는 철수와 첫 대면을 하면서 이야기를 들은 후 확신하게 되었다. 철수는 절대 살인범이 아니다!

새크라멘토의 3총사-유재건, 이경원, 랑코 야마다

▲ 이철수 구명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이들은 미국 곳곳에서 사건을 알리며 모금을 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가운데 유재건 변호사, 오른쪽 랑코 야마다.&#8203; ⓒ커넥트픽쳐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퐁계 갱단원을 죽인 와칭계 살해자가 경찰에 검거되자 변호사 비용을 갹출해 구명운동을 벌이기로 했는데, 변호가 비용 걷은 돈을 고문이었던 입이탁이 착복하자, 아무리 선배이지만 맛 좀 보여줘야겠다고 같은 단원끼리 시비가 벌어져, 와칭 단원이 죽였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날 현장에서 진범을 목격하고 누군지 식별도 할 수 있었으나 생명이 위험해서 발설을 하지 못하고 있는 증인을 찾아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듣게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진범이 엄연히 활보하는데, 철수는 살인자가 돼서 평생을 감옥에 있게 된단 말인가? 이런 불공평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이 기자와 나는 너무 놀라서 한동안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그럼 랑코가 그를 만났다는 말인가요?”
- <함께 부르는 노래>, 92쪽(유 번호사와 이 기자, 랑코 세 명이 처음으로 함께 만난 날).

면회를 마친 그들은 73년에 이철수를 변호했던 힌츠 변호사 사무실에 있는 재판 기록을 자세히 열람했다. 2개월이 걸렸다. 그러면서 그 당시에 누락됐던 증인과 증언들, 의심쩍은 부분들을 찾아냈다. 다시 한번 이철수의 무죄를 확신하게 되었다. 여기에 한 명 더, 일본 이민 3세 랑코가 합세한다. 랑코는 친구인 철수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인범으로 잡힌 걸 알게 되자 그를 구하기 위한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무산되었다. 철수를 변호하겠다는 변호사를 구할 수 없었다. 비용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난하고 영어 못하는 사람들을 변호해주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직접 법대에 들어갔다.

유재건, 이경원, 랑코, 이 세 사람은 새크라멘토에서 만나 이철수 구명을 위한 결의를 다지고 ‘프리 철수 리’ 운동을 위한 계획을 짰다. 곧 후원회가 만들어지고 미국 곳곳에서 사연을 접한 한인들, 특히 한인 교회에서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진행했다. 그 소식을 들은 한국교회에서도 힘껏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70년대에 이미 ‘어벤져스’가 있었다. 그것도 아시아인으로 이루어진!

“프리 철수 리” 운동이 시작하다

78년 3월에 샌프란시스코 후원회가, 4월에 로스앤젤레스 후원회가 발족했다. 철수의 구명 운동은 전 미주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인권단체들이 사건 해결에 참여했고, 재심 신청을 위한 모금 운동이 시작되었다. ‘철수를 구하자’(Save Cholsoo Lee) 배지, 티셔츠 등을 판매하고 영화, 콘서트, 댄스 파티 등을 통해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로도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미국 재판 역사상 재심은 희박한데도 불구하고 이철수의 제1 사건이 부당하게 진행되었다는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여기에는 함께 마음과 손을 모았던 수많은 한인과 미국 내 한인 교회와 한국 내 한국교회들, 여러 인권단체, 변변찮은 변호사 비용을 받고도 사건을 맡아준 인권변호사 와인글래스 변호사, 증인을 찾아낸 사설탐정 톰슨 등이 이뤄낸 ‘1만분의 1’ 기적이었다. 함께 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고백했다. 하나님께서 이뤄낸 기적이라고.

억울하게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까지 받은 동포 청년 이철수 씨의 기구한 운명을 보고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발 벗고 나서서 철수 구명 운동에 시간과 정열을 쏟아 바친 아름다운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동포들의 정성 어린 기도와 눈물 어린 변호 성금으로 힘없고 불행한 동포 한 사람이 불의한 억압에서 풀려나와 자유를 찾게 되는, 소설보다 더 극적인 얘기가 소개됩니다. 돈벌이보다는 정의를 사랑하는 변호사들, 한 사람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야 된다고 철저하게 믿는 사설탐정, 배심원들, 살인현장을 목격한 증인들, 언론인들, 사회사업가들, 의사와 교사들, 종교지도자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법을 배우고 직업으로 집행하는 판사들, 검사들, 형사들, 형무소의 간수들 그리고 형무소에 갇혀 있는 수감자들도 등장합니다.
- <함께 부르는 노래>, 프롤로그 중에서

판결이 나던 날, 눈물, 콧물이 뒤범벅된 이철수는 법정에 서서 울부짖듯이 말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죄가 없었습니다. 오늘의 이 승리는 제가 죄가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겠으나, 여러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권리와 자유는 지킬수 있는 힘이 있어야 지켜지는데, 저같이 힘없는 사람을 위해서 여러분이 힘써주신 덕분에 정의를 구현했습니다. 여러분, 다시는 이 땅에서 죄 없는 사람을 죽여 없애는 이런 억울한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승리를 축하합니다.”

철수, 철창 밖으로

▲ 재미동포 이철수 구명활동을 벌인 한국인들의 눈물겨운 실화 이야기를 담은 책. 이 책은 조국을 떠나 미국에 살고 있는 한 동포청년의 사형누명을 풀어주기 위해 발벗고 나선 한국사람들의 이야기다.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랍고도 의미있는 일화를 담았다. ⓒ정리연

10년 만인 1982년, 이철수는 첫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을 받았다. 83년에는 교도소 복역 중에 저지른 살인에 대해 사형 판결을 무효로 하게 되어 철수는 교도소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1983년 8월 24일 이철수는 완전 자유의 몸이 되었다. 자유인이 된 철수는 직장에 취직하기도 했고, 여러 강연에 초대되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영과 찬사를 받던 이철수는 언젠가부터 점점 잊혀졌고, 삶이 무료하고 건조해진 철수는 술과 마약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자신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 집에 찾아가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어떻게, 감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철수는 교도소에 익숙(?)해져 버린 10년이라는 시간이 쉽게 회복되거나 현실에 적응하는 게 녹록지 않았다. 늘 웃으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격려하고 감사를 나누던 철수였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누명을 벗고 일반인으로 돌아왔지만, 사회는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을테고 자신을 향한 수많은 플래시 뒤에는 고독과 적막함이 남았을 거 같다. 어렸을 때 엄마가 자신을 한국에 홀로 두고 미국으로 갔을 때처럼. 재혼한 엄마를 따라 미국에 왔지만, 엄마는 또다시 이혼했고 생계유지를 위해 종일 일해야 했다. 낯선 땅에서 거의 늘, 혼자 지내야 했던 철수가 느꼈던, 그런 감정은 언제 어디든 철수를 따라다녔던 거 같다.

그래서일까. 철수의 웃는 얼굴에는 왠지 모를 슬픔이 섞여 있다. 그러다가 집에 불이 나면서 온몸에 화상을 입게 되었고 얼굴은 완전 딴사람이 되었다. 그는 비로소 지나온 시간과 작별하고 자신의 진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자유인이 된 후에 주변 사람들을 많이 힘들게 하고 괴롭혔던 거에 대해 후회와 반성을 한다. 늘 찾아 헤매던 몸과 마음이 안식할 수 있는 ‘집’을 찾았다고 할까? 그건 자기의 존재를 깨달음에서 오는 게 아니었을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시작하나보다 했는데, 철수는 좀 이른 나이에 하나님 곁으로 갔다. 영화의 모든 흐름이 감동적이고 눈물 났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았다. 사람들이 모두 알아주던 겉모습의 철수를 벗어버리고 ‘철수’만의 삶을, 얼굴과 몸은 불에 데었지만, 마음과 삶이 정화된 삶을 살아가는 ‘이철수’의 모습에서.

철수는 불우했다. 운명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냥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다가 어린 시절 엄마 손에 이끌려 이민자의 삶을 시작했다. 부푼 마음과 기대를 실현할 수 있다던 새 땅에는 철수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친구도 공간도 없었다. 그는 늘 흔들리고 방황하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묵묵히 버티면서 제대로 서 보고자 노력했지만, 그를 반기는 건 뒷골목과 그곳을 아지트 삼은 건달들이었다. 그의 꿈을 채워주는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어두운 뒷골목으로 사라지지도 않았고 불의한 일을 하지도 않았다. 철수는 자신의 영혼을 지켰다.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철수 리> 포스터 ⓒ커넥트픽쳐스

철수, 하나로 뭉치게 한 힘

시사회를 마치고 배급사인 커넥트픽쳐스의 남기웅 대표는 “시사회를 하면서 이 영화를 열 번 정도 봤는데도, 볼 때마다 감동이 되고 눈물이 나온다. 철수 구명 운동을 위해 온 힘을 쏟으셨던 유재건 장로님께서 이 영화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게 너무 안타깝다. 이 영화를 통해 한인사회와 아시안-아메리칸 사회를 중심으로 한 이철수 구조 운동 ‘프리 철수 리’ 캠페인이 다시 뜨겁게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은 저널리스트 출신의 두 감독 덕분”이라고 했다.

그날 자리에 함께하신 분 중에 영화 내내 눈물을 흘리는 분이 있어서 대체, 어떤 분인가, 궁금했는데 김성수 권사님이었다. 그때의 일들이 떠 올라 감정이 북받쳐서 제대로 말씀하기도 힘들어하셨다. 정말 많이 우셨다. 변호사인 남편 내조를 위해 이철수 구명 운동을 하면서 자녀들까지 돌봐야 했고, 생계를 위해 늘 직업의 자리에도 있어야 하셨다. 자녀들은 때로 웃으면서 “아빠는 우리 아빠가 아니라, 철수 아빠야~”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부모님이 얼마나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웠을까!).

김 권사님은 자신들의 집까지 담보로 잡고 이철수의 보석금을 만들기도 했다. 재판 때마다 방청객들을 뒷바라지했다. 낯선 땅에서 아내로, 엄마로, 운동가로, 노동자로 살아야 했으니 요즘 말로,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생각(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과 고민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김성수 권사님뿐 아니라, 그때 그 운동에 함께 했던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몸 한쪽을, 자신의 빵 한 쪽을, 월급의 한쪽을, 시간의 한쪽을 희생했다.

‘이철수’로 인해 자신과 가족들 먹고살기에 바쁘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흩어져 있던 한인들은 ‘한인커뮤니티’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모일 수 있게 되었다. 소수이고 외면당하던 한인들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고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철수’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철수’를 위해서, 철수인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자신의 삶조차 피곤하고 어려운 상황임에도 고난에 처한 다른 이웃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한편으로 이 사건은 반드시 우리 동포사회에 부정적인 면만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한푼 두푼 구호성금을 낸 동포들이나 법정이나 길거리에서 이철수 씨의 구호를 위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자신의 돈벌이보다는 이 사건의 구호를 위해 밤낮없이 뛰었던 변호사들은 바로 또 다른 영웅들이었다. 바로 이철수구명위원회 사람들이었다.
- <함께 부르는 노래>, 추천의 글(박원순) 중에서

정리연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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