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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공의를 원하는 민심과 천심

기사승인 2023.05.06  23: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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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기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와 위로>

▲ 하나님과 백성이 원하는 왕의 덕목은 정의와 공의이다. ⓒGetty Images
네가 백향목으로 경쟁한다고 왕으로 다스릴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고 마시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았더냐? 그 때에 그가 형통했다.(예레미야 22,15)

왕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의 정책이나 결정 또는 선택 하나하나가 그의 백성에게 미칠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노릇 제대로 했다는 왕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성서에서도 그런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말하고 있는 왕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입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때부터 예언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는 비판적인 예언을 그친 적이 없지만 그가 보기에 요시야는 그래도 긍정적인 면이 있는 왕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과 비교할 때 더욱 더 그렇습니다.

여호야김은 이집트 느고 왕의 개입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외세에 눌려 지낸 그가 내적으로 취해야 할 태도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어도 바람직한 것은 있을 것입니다. 내부의 통합으로 외세를 극복하려는 노력,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외면했거나 아니면 잘못된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건축사업을 벌렸고 그것도 호화로운 아마도 왕궁(의 부속건물?)을 지었습니다. 이는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러면 그 과정이 정당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보면 정반대로 불의한 방식입니다. 공의롭지 못한 방식이란 일꾼을 고용하고 품값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13절).

백성들의 아우성 소리가 빗발치듯 하늘을 향하는데, 여호야김은 집의 아름다움과 고급스러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가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바빌로니아 연합군의 막강한 힘에 대항하기 어려운 탓도 있었겠지만, 백성의 지지를 제대로 받지 못한 탓이 더 클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 요시야를 경쟁상대로 삼은 것은 그 방향에 따라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는데, 그는 건축사업으로 경쟁하려 했고 그것도 불의하고 부당한 방식으로 그리 해서 권력을 강화하려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권력의 기초는 정의와 공의이고, 뿐만 아니라 그것이 형통과 번영을 낳는다고 예레미야는 역설합니다.

여호야김의 건축사업은 자기만을 위한 것이기에 형통과 번영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강조되는 것은 형통과 번영이 공동의 것이어야 함을 함축합니다. 그럼으로써 백성의 지지를 얻을 때 권력은 강화되고 안정되며 외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선대 왕인 요시야에게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여호야김은 이스라엘의 마지막을 여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고 정의와 공의를 시행하심으로 사랑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고 정의와 공의로 그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의 정치가 유난히 더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그러한 현실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는 오늘이기를. 정의와 공의로 나타나는 사랑이 우리의 것이 되는 이날이기를.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감싼 정의와 공의의 내일을 이준과 태후와 아이들과 민아에게 열어주시는 지금이기를.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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