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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하나님의 몸: 전환, 기후 정의 그리고 영성

기사승인 2023.02.03  15: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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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 그리스도교 영성은 자연과 인간을 개별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Getty Image

지구, 하나님의 몸: 전환, 기후 정의 그리고 영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구, 하나님의 몸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표현은 이미 여러 사람이 지적해 왔고 강조해온  것이지만 ‘지구를 아니 우리의 삶의 현장을 하나님의 몸’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지난주 박현욱 형제가 창세기의 말씀을 중심으로 잘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중요한 단어는 전환입니다. 전환은 새해 첫날 말씀 나누기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지금 의 시스템,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일상적 삶의 체제로는 안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전환은 단순한 교정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어 걸어가는 대안적 삶을 의미합니다. ‘지구, 하나님의 몸’을 사랑하고 지켜나가기 위해 전환은 필연적입니다.

세 번째 단어는 기후위기입니다. 지구를 하나님의 몸으로 이해하고 또 이를 위해 전환의 삶이 필연적임을 깨닫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인류가 맞이하고 있는 최대의 위기, 기후위기로 인한 것임은 자명합니다. 기후위기는 우리에게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급작스러운 멸망을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후위기는 우리로 기후 정의를 향한 대안적, 변혁적인 전환의 삶을 살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아니 명령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단어는 영성입니다. 영성은 “삶의 모습을 결정짓는 근원적 힘”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떤 영성의 힘으로 뒤덮여 있는가는 우리 삶의 모습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환의 삶을 결정짓는 것은 영성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영성을 반드시 종교적 의미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한도에서는 기독교의 영성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영성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영성을 닮아가고 그 영성을 우리 마음에 담고 그 영성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결국 예수님의 영성이 나의 삶의 최대의 즐거움이 되는 것, 예수를 즐기는 것!, 이것은 한 기독교인이 도달하고 이룰 수 있는 최대의 단계일 것입니다.

한국 교회 메시지와 영성 변천의 역사

우리는 이처럼 여러 다양한 측면의 전환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영성의 전환은 가장 중요합니다. 어쩌면 우리 삶의 전환 출발점이 영성의 전환이라고 말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영성의 전환으로부터 출발하여 다른 전환이 가능해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영성의 전환에 있어서 핵심은 메시지 전환입니다. 결국, 메시지가 우리 영성의 모습과 삶의 행위를 결정짓게 합니다.

1960년대 말부터 한국 교회를 휩쓸었던 메시지의 내용은 기복이었습니다. 기복의 메시지는 우리 교회의 전도와 목회의 모습을 결정지었습니다. 교회의 목회와 개인 신앙의 모습에 있어서 일대 전환이 발생하였습니다. 

기복신앙(번영신학)의 메시지로 인하여 교회의 목회는 성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신학적으로는 교회성장학이 나타나 대형교회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대형교회가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성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간주했고 성공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실패한 사람들, 혹은 사회 아래 계층의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간주하는 현상이 발생하기까지 했습니다.

기복신앙이 한편으로 당시 가난에 찌들어 있던 한국 사회에 용기를 주고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는 긍정적인 요소로 평가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결국 오늘 한국 사회의 극심한 빈부 차이와 사회 소외계층을 향한 차별과 혐오의 씨앗을 잉태시켰다는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80년대 들어오면서 한국 교회는 교회성장학의 발달로 인한 (문화의 옷을 입은) 실용적 메시지가 주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실용의 목적은 또다시 성장과 번영이었습니다. 기복신앙의 세련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메시지로 인해 일대 전환이 발생합니다.

실용적 목회를 위해 예배의 형식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경배와 찬양 형식이 도입되면서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감성적 모임이 성행했습니다.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이 도입되어 젊은이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때 한국 교회가 내놓은 메시지는 주로 개인적 삶의 실현, 자기계발 메시지였습니다. ‘적극적 사고방식’과 신앙이 동일시되곤 하였습니다. 신앙은 순전히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한국 교회는 목회와 신앙에 경영학을 도입하게 됩니다. 마케팅을 비롯한 현대적 경영기법이 도입되면서 본격적으로 대형교회가 등장합니다. 교회의 실용적인 메시지와 자본주의 사회의 실용적 경영 메시지의 조우로 인하여 초대형교회가 등장합니다. 당시 세계 10대 대형교회에 한국 교회 7곳이 포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랄만합니다.

그 후 한국 교회는 권력을 갖게 됩니다. 교회는 가난한 교회를 벗어났습니다. 교회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을 해방하러 오신 예수님이 설 자리를 잃어버린 권력 집단이 되었습니다. 메시지가 오늘 우리의 모습을 결정짓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 한국 교회가 내놓은 메시지는 철저하게 교리적-문자주의적 메시지라는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의 메시지는 교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큰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교리를 벗어나거나 혹은 교리적으로 의심을 살만한 메시지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교리-문자주의적 메시지는 일대 전환을 가져옵니다. 교회 안에서 질문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질문 없는 신앙이 좋은 신앙으로 간주합니다. 신앙은 교리에 순응하고 순복할 뿐 아니라 일말의 의심도 없이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앙 행위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신앙은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교리 수긍으로 바뀌게 됩니다. 생활현장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되는 교리 논쟁이 주를 이루게 됩니다. 이단-삼단 시비가 교회 행위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등장합니다. 모든 것을 이단 논쟁으로 몰고 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최근 한국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관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성 소수자 문제입니다. 퀴어-문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퀴어에 대해서는 사람들 간에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해석의 문제 혹은 문화 기타 다양한 차원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 문제를 이단 문제로 취급합니다. 종교 교리의 문제로 해석해서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소수자 문제가 왜 교리 문제가 돼서 이단-삼단 논쟁을 해야 합니까?

사실 퀴어 문제는 그렇게 논쟁할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공부가 필요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좀 알고 나서 뭐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공부를 안 하고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근거도 없는 가짜 뉴스에만 매달리면서. 교리-문자주의 신앙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교리-문자주의적 메시지가 우리를 그렇게 변하게 했습니다.

두 번째로 교리-문자주의적 메시지는 한국 교회를 철저하게 폐쇄적이며 (과거지향을 넘어서는)과거매몰적 집단으로 만들었습니다. 역사의 발전과는 상관없이 자기 세계를 지켜 가는 것이 신앙이라고 간주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교회를 신성한 단체로 생각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종교사회학에서는 이를 부족화(tribe) 현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부족화 현상과 더불어 부족과 또 그 부족장에 대한 신성화 작업이 얼마나 깊게 형성되어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신성화된 부족(교회)과 그 부족의 장, 족장(族丈, 성직자)의 행동과 말에 대해서 절대적인 순종을 하며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정당화됩니다. 신언(神言)이며 신행(神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성화된 부족(교회)과 그 부족의 장, 족장(族丈, 성직자)을 향한 공격은 신적인 존재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 이에 대하여 열렬하게 방어하거나 공격하는 현상을 보입니다.

교리-문자주의적 메시지는 우리의 신앙과 교회 목회의 모습을 전환 시켰습니다. 영성의 전과 더불어 교회와 신앙 행위의 전환에서 메시지 전환은 핵심임을 다시금 보게 됩니다. 

예수와 메시지 전환

예수님이 사셨던 당시의 종교, 유대교의 모습은 오늘 우리 기독교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유대교는 민중의 삶의 현장과는 철저하게 유리되어 있었습니다. 유대교가 내놓는 메시지는 유대 민중들과는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믿으면 믿을수록, 종교에 신실하면 신실할수록 더욱 억압적인 삶을 살게 되는 모순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1장의 자신이 가진 온 재산 두 렙돈을 성전에 바쳤던 “남편 여윈 궁핍한 여인”의 경우는 당시 유대교의 억압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기록이기도 합니다.

유대교의 기원은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억압받던 히브리 사람들을 해방한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다시 말하면 억압으로부터 해방사건이 히브리 사람들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신앙을 갖게 했고 그것이 발전해서 결국 유대교를 형성하게 이릅니다. 유대교의 기본적인 동기는 해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유대 민중들에게 해방이 아닌 억압기재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요?

마태복음 5:17-18절 그리고 21-22절의 말씀은 그것을 메시지의 왜곡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종교가 억압기재로 작동하는 당시에 이 상황을 전환하려고 하신 일은 메시지 전환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본래의 의미인 해방 메시지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억압적 메시지에서 해방적 메시지로의 전환이 그것이었습니다. 메시지 전환 없이 이루어지는 형식의 전환은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일명 “산상수훈”에 속해 있는 기록입니다. 17절부터 48절까지 이어지는 부분은 율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라는 형식하에서 예수님이 하신 율법에 대한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억압적인 메시지를 뒤집고 계십니다, 율법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들어왔던 율법 이야기를 넘어서십시오. 그것을 뛰어넘고 벗어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들려주는 율법 이야기를 들으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분노, 음욕과 간음, 이혼과 간음, 맹세에 대한 교훈, 보복과 원수 사랑에 관한 율법의 지적합니다. 메시지의 전환을 시도하고 계십니다. 메시지 전환 없이 유대교가 본래의 모습, 다시 말하면 출애굽 해방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신앙과 삶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을 수는 없습니다.

메시지 전환의 원칙들

예수님의 메시지 전환 시도에서 우리는 일정한 패턴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율법 자체를 부정하거나 폐기지 않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17a) 예수님은 유대교 안에서 태어나셨으며 그렇게 사셨고 유대인으로 죽었습니다. 종교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유대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유대교 전통을 떼어 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유대교를 떠나거나 혹은 거부하고 폐기하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의도는 유대교 율법의 완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종교)의 본래 의도는 해방입니다. 인간의 해방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자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안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다.”라는 것입니다. 종교(신앙)의 본질을 되찾음으로써 그것을 완성하고자 하십니다.

세 번째,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십니다. 율법의 조항을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해석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의 해석은 무엇보다도 가장 열악한 사람의 입장으로부터 시도됩니다.

이혼, 분노, 맹세, 보복의 경우를 살펴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율법 조항의 해석은 권력자, 부자, 지주 등 힘 있는 사람 상황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율법 조항이 민중들에게는 억압기재로 작동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뒤집습니다. 메시지 전환입니다.

2023년 메시지 전환

이런 의미에서 저는 2023년을 시작하면서 <지구, 하나님의 몸: 전환, 기후 정의, 영성>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며 특별히 모든 전환의 출발점, 메시지 전환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교리-문자주의적 메시지를 어떻게 오늘의 상황에 맞추어 재해석할 수 있을까에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교리를 넘어서는 메시지 전환을 시도해 보고자 합니다.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교리는 기원후 500년까지 기간에 형성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정해진 교리를 보면 대부분이 교회 권력 다시 말하면 로마 권력층 중심으로 규정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민중 중심이 아닌 권력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교리가 정해진 측면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권력층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교리는 당시 교회 권력에 의해 이단(異端)으로 규정되어 시만을 받곤 했습니다. 펠라기우스, 아리웃, 몬타누스, 네스토리우스 등의 예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들의 주장이 이단(異端)적이었을까요? 의문을 가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리(敎理)의 역사에서 이단으로 정죄 되었던 이들의 주장을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당시 이단으로 정죄 되고 사라졌던 이들의 주장에서 오늘의 상황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오늘의 교회 메시지 전환을 위한 동기를 발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교리를 폐지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유지해 오고 있었던 교리가 순기능(順機能)을 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교리 자체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라는 것을 감안 할 때 그것이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상대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교리의 유효기간이 끝난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메시지 전환 시도는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두 번째로 지금까지의 교회 메시지가 지나치게 교회, 기독교, 성경 중심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신학은 교회의 시녀라고 불렸습니다. “신학은 교회의 시녀이다. 그러나 주인의 치맛자락을 들고 뒤따르는 시녀가 아니라 주인 반걸음 앞에서 불을 밝히는 시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사회를 향하여 메시지를 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교회 혹은 기독교 변증의 측면이 강했습니다. 사회(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다양한 문제에 대하여 교회, 기독교 그리고 성경 중심의 메시지를 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다양하게 변한 사회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얻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교회, 기독교 그리고 성경 안에만 갇혀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질문이 발생합니다. 교회, 기독교와 성경을 폐지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기독교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그리고 뺄 수 없는 핵심입니다. 다만 무한하신 하나님의 메시지가 특정한 제도, 종교 혹은 경전과 특정한 형식 안에 갇혀 있을 수 없다는 성찰에서 우리의 메시지 전환 시도는 시작됩니다.

마지막으로, 메시지 전환 시도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메시지 문제입니다. (길희성 교수) 메시지가 변하지 않으면 교회는 갈 길을 찾지 못합니다. 우리 교회가 한국 교회의 메시지 전환을 위하여 목소리를 내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회적 참여도 열심히 계속하지만, 우리 교회가 한국 교회와 기독교를 위해 메시지 전환을 시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신 사명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가 여전히 교리, 제도, 전통적 기독교, 기득권, 교단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한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 교회는 평신도 교회로서 상대적으로 이러한 문제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1987년에 우리 교회를 창립하시고 지난 36년 동안 함께 하셨던 것이 바로 이런 일을 위한 것인지를 누가 알겠습니까?"(에스더 4:14)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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