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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대범 장로의 《교회 음악 산책》을 펴내며

기사승인 2023.01.27  15:4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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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대범 장로가 사랑했던 교회 음악과 교회를 생각해 본다

▲ 고 주대범 중앙루터교회 장로

우리가 많이 좋아했던 주대범 장로가 하늘 벗이 된지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난 1주기를 경황없이 그냥 흘려보낸 것 같아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어쩌면 그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 저는 핸드폰에서 주 장로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했습니다.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는 그와 이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70도 못 넘긴 짧은 생애였으나 그는 가족과 벗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겨주었습니다. 살아생전 틈틈이 썼던 유고를 모은 《교회 음악 산책》을 통해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책 언급에 앞서 친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습니다. 돌이켜보니 중고교 시절 우정을 쌓았으나 이후 간간이 소식만 전해 듣고 지내던 중 60줄에 들어선 나이에 몇 년간 뜨겁게 만났던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 그는 글 잘 쓰는 학생이었고 악기를 잘 다루는 멋진 친구였습니다. 동급생 누구보다 생각을 앞서했고 옳고 그름을 분간하며 처신할 줄 아는 의로운 존재였습니다. 가르치는 선생에게도 힘껏 이의를 제기하는 용기도 있었습니다. 힘이 약한 학생들의 대변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친이자 극작가였던 주태익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멘토이자 친구였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아버지의 재능과 심성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를 다시 자주 만나게 된 것은 나이 60이 될 즈음이었습니다. ‘길동무’라는 모임을 통해서였습니다. 교파를 초월하여 뜻이 같은 목사, 신학자, 장로들의 모임이었는데 친구는 자신이 평생 몸담았던 루터중앙교회로 우리를 초대했습니다. 그가 꾸미고 만든 도서관에서 그와 더불어 정치를 걱정했고 교회를 염려했으며 성직을 되돌아 봤습니다.

뒤풀이는 항시 장로인 자신의 몫이라 하며 언제든 지갑을 열었지요. 그 모습을 처남 윤인중 목사는 웃으며 기쁘게 지켜보곤 했습니다. 아마도 넉넉하고 품이 큰 누이를 생각하며 그리했을 것입니다. 그가 공들여 만든 첫 기타를 갖고 연주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몇 단계의 공정을 거쳐 깊은 소리를 내는 기타를 보며 학창시절 그를 부러워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미안했고 감사했던 일도 적지 않습니다. 그가 교회에서 작곡 발표회를 열었을 때 오기를 청했음에도 갑작스런 일로 응하지 못한 것이 지금껏 미안합니다. 그가 쓴 일기 곳곳에 적혀있는 그의 발걸음에 머리를 숙이고 싶습니다. 연극하는 큰 아이 결혼식에 참여한 소감을 적었고 출판기념회에서 신학자 이신의 예술혼에 공감했으며 광화문 블랙텐트 장을 함께 찾았으니 고마울 뿐입니다.

2주기를 앞두고 윤인중 목사와 늦은 나이에 주 장로와 막역한 친구가 된 최병천 장로와 만나 유고집 출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출판사를 경영하는 최 장로 덕에 어렵지 않게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음악 관련 글과 본인 삶을 기록한 상당 양의 일기를 모으면 책이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 저곳에 실린 주 장로의 글을 찾아 모아준 가족들의 수고가 컸습니다.

이에 주 장로를 사랑하는 지인들의 회고담을 잇대보자고 했습니다. 교회음악 관련 글이 중복된 탓에 일기는 양을 조금 줄였고 지인들의 글은 좀 더 많아도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여하튼 이렇게 만들어진 주대범의 《교회 음악 산책》을 그의 2주기를 맞아 세상과 교회에 내어 놓습니다.

음악에 대한 주 장로의 고백이 마음을 크게 울립니다. “평생 노래는 내게 복이었고 연약함을 이기는 도구였다”고. 그는 이런 고백을 갖고 작곡했고 40년간 성가대를 지휘했으며 <베델의 노래>를 엮어냈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는 입으로 결코 잘못 살수 없다고, 거짓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래 시를 쓰는 문학도가 되고 싶었지만 김수영을 보며 생각을 접고 교회음악에 전념했으나 그의 음악은 세상을 비판했던 시인을 닮았습니다. 신앙을 노래했으나 현실의 고통을 잊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그가 평생 루터교에 몸담았던 것은 음악 때문이었습니다. 농담반 진담반 주초문제의 자유로움 탓이라 했지만 종교개혁 이후 발전된 루터교식 회중 음악에 대한 관심이 컸던 까닭입니다. 그는 루터교인 J. S. 바하의 음악, 특별히 마태의 수난곡을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수난(Passion)을 ‘열정’이라 해석하는 신학적 센스도 지녔습니다. 수동적이기 보다 능동적 신앙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서양음악을 결코 추종하지 않았습니다. 영미 계통의 곡으로 가득 찬 찬송가의 문제점을 지적했으며 일시적 소비재로 전락한 한국교회의 경배와 찬양 풍토를 아프게 성찰했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노래한 흑인영가가 찬송가로 불려 질 수 있기를 바랐고 우리 소리인 판소리 찬양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언젠가는 오르간을 만들 계획을 갖고 오르간의 구조, 부품, 명칭 등에 대한 세밀한 연구도 해 두었습니다. 허나 그가 만든 오르간을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애통합니다.

그가 남긴 일기 속에서 우리는 목수 주대범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음악과 목수일, 그것이 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목수 예수를 생각하며 그런 자의식을 갖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작업장을 보여 주겠다고 했는데 저는 그곳도 찾지 못했으니 다시 미안할 뿐입니다.

목수는 낮은 자리에서 노동하는 존재지만 상상하며 창조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상상력이 없으면 목수의 노동은 그냥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는 물론 주변 곳곳을 찾아다니며 그는 손의 창조력을 발휘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침대를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일기 속에 담겼습니다. 그의 자녀들도 획일화를 거부하고 창조적 삶을 살고 있는 줄 압니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유무형의 자산이 다른 세상을 꿈꾸도록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거듭 분노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세상을 망치는 정치, 교회를 허무는 성직자들, 찬송가를 흥정하는 장사치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분노가 클수록 본인은 그만큼 더 많이 우울했을 것입니다. 그의 분노에 불편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의 분노가 얼마나 거룩한 것이었던가를! 그의 분노를 좋아했기에 우리는 그의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그의 친구가 되려면 그가 품었던 거룩한 분노에 익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선물로 남긴 이 책이 세상과 교회 그리고 우리들 삶을 바꾸는 은총의 도구가 될 것을 믿으며 펴낸이의 말을 갈음하겠습니다. 여러분을 1월 29일 오후 5시 출판기념회 장(중앙루터교회)에 초대합니다.

이정배 교수(현장아카데미) ljbae2016@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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