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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수탈의 대명사 탐관오리 조병갑

기사승인 2021.07.31  13: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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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혁명에 나타난 망국노 민영준과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은 처벌을 받았는가? ⑶

▲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에 세워진 조선의 대표적인 탐관오리인 조병갑의 선정비

전형적인 탐관오리 조병갑(1844~1911)은 1892년 4월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농민들을 여러 가지 명목으로 가혹하게 착취하였다. 이에 견디지 못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1893년 11월에 거사하기로 하고 사발통문을 작성하였으나 그들은 거사 이전에 조병갑을 찾아가 항의하다 쫓겨났다. 그러는 사이에 11월 30일에 조병갑은 익산군수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고부의 돈맛에 젖은 그는 고부를 떠나지 않고 전라감사 김문현을 찾아가 유임을 요청하였다. 그런 내막을 모르는 전봉준과 사발통문 작성에 참여한 농민들은 12월에 다시 그에게 과중한 세금에 이의를 제기하며 선처를 호소하였다.

조병갑은 고부에 머물며 자신이 익산군수로 발령을 받을 때 후임 고부군수로 발령 받은 이은용을 전라감사를 시켜서 자퇴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 연이어 발령 받은 신임군수 5명도 신병을 빌미로 사퇴하게 만들고 1894년 1월 9일 드디어 재임명을 받아 고부 군수로 재 부임하였다.

조병갑의 재부임에 분개한 전봉준은 1월 10일 농민들을 이끌고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과 함께 수탈에 가담한 무리들을 처단하고 무기고를 열어서 총과 창과 탄약을 거두었다. 옥문을 열어 죄가 없는 원통한 죄수를 들을 방면하고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그 때 조병갑은 이미 전봉준과 농민들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관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고부의 은모라는 자의 집에 숨어 있다가 순창을 거쳐서 전주로 도망을 쳤다.

2월 15일에 고부농민봉기가 조정에 알려져 조병갑은 파면을 당하였고 그 대신에 박원명이 부임하였다. 박원명은 봉기를 일으킨 농민들을 선무하고 위로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전봉준도 조병갑을 축출하고 양식을 확보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농민 무리를 해산하였다. 그리하여 첫 번째 봉기는 3월 1일에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 후, 안핵사로 온 이용태가 봉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선처를 한 박원명을 꾸짖고 그가 한 일을 다 번복하며 백성들을 반역죄로 적용하여 죽이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병갑처럼 부자들을 협박하여 뇌물을 거두었으며 고부봉기의 주모자를 색출하고자 혈안이 되어 동학도를 과도하게 탄압하였다.

고부 봉기 참여자들과 친인척들이 이용태의 지나친 학대와 폭력에 직면하여 해결의 방법이 다시 봉기하는 일 밖에 없다고 판단한 전봉준과 지도자들은 3월 20일 <창의문>을 선포하고 무장에서 거사를 일으켰다. 4월 2일에 고종은 홍계훈과 경군을 파견하였으나 동학농민군은 황토현 전투, 황룡강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4월 27일에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4월 14일, 이용태는 봉기한 백성들을 선무하지 못하고 난폭하게 다스려 제2의 봉기를 일으키게 만든 죄로 경상도로 유배를 당하였다. 4월 20일에 의금부는 봉기의 도화선이 된 조병갑을 공주에서 잡아서 의금부 옥사에 가두었다.

그러나 고종은 탐학한 관리 조병갑보다 “백성을 나라의 근본”이라고 말하는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방자하고 무례한 생각과 행동을 더 끔찍해하였다. 못난 조선 왕은 창의문의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을 해치면 나라는 필연적으로 쇠잔해지는 것이다.” 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고종은 그들의 봉기를 왕위에 대한 무엄하고 무모한 도전, 반역으로 받아들였고 못난 선조가 명에 군인을 요청한 것처럼 4월 30일에 청군을 요청하였다. 청나라 군사는 5월 2일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천진조약에 의하여 일본군도 5월 6일에 잇달아 인천에 상륙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청과 일본의 전투장이 되었고 조선은 망국의 시간표 속에 들어갔다.

박종인의 ⎾매국노 고종⏌, 204쪽에 의하면 5월 4일에 고종이 죄인 조병갑의 국문을 명하였으며 “죄인 조병갑은 횡령만 아니라 학정도 많으니 더 엄하게 조사해 멀리 귀양을 보내라” 고 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조병갑의 죄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첫 번째 공초에서 전봉준 장군은 법무아문 관원의 질문에 “정당한 금액 이외에 수만 냥을 기혹하게 거두어들인 죄를 말한다. 그가 계속해서 대략이라고 하며 밝힌 조병갑의 죄는 첫째, 민보 (만석보) 아래 백성들을 동원해 강제로 보를 쌓고 700여 석의 세금을 거둔 것과 무상으로 황무지 경작을 허가하고 강제로 세금을 징수한 것이었다.

둘째는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간에 불화한 죄와 음탕한 행위를 일삼고 노름을 했다는 죄목을 부자에게 뒤집어 씌워 엽전 2만 냥 이상을 강제로 징수한 것이었다. 셋째는 태인 군수였던 부친의 비각 건립을 위해 1000냥 이상을 수탈한 것이었다. 넷째는 백성들에게 대동미 16말을 정백미로 거두고 정부에 상납할 때는 추미(조악한 쌀)로 바꾸어서 남은 정백미는 군수가 차지한 것이었다. 다섯째 둑을 쌓을 때 다른 산에서 수백 년 된 나무들을 마구 베었으며, 둑 쌓는 일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보수를 지급하지 않고 강제 노역을 한 것이었다.

전봉준 장군은 이 외에도 죄가 많아 세세하게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1) 전봉준이 지적한 그의 죄를 살펴보면 그는 목민관이 아니라 명목적인 저수지 축조, 대동미 부정 운용, 가족관계를 이용한 협잡, 강제 노동, 높은 세금, 산림 남벌 등으로 백성의 돈과 나라의 재정을 약탈하려고 작심한 탐관오리였다. 그러나 당시는 고종과 민비가 관직 매판의 앞잡이였으며 부정부패의 총본산이었으므로 그의 죄는 다 묵인되었고 국고 횡령죄만 적용되었다. 그는 죄 값으로 전남 강진군 마량면 앞 바다에 있는 육지에서 가까운 섬,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은 “이에 피고의 행위를 대전회통 형전 가운데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서 관아에 변을 일으킨 자는 지체 없이 목을 벤다.”는 법률에 의거하여 1895년 3월 29일에 역적으로서 교수형에 처하였다.(2) 그리고 농민군에 참여한 자들과 그들의 친인척들은 연좌제 걸려서 사돈네 팔촌까지 유린당하였으며 양반과 유생이 주가 되어 만들어진 민보군에게 약탈과 고문과 학대를 당하였다. 당시 농민군의 친인척들의 피 맺힌 울음소리가 조선 필도에 사무쳤다.

그러나 조병갑은 부패한 군주 고종의 궁리와 재량에 의해 농민혁명의 주모자들이 교수형을 당한지 3개월 조금 지난 1895년 7월 3일 이용태를 비롯한 다른 탐관오리 259명과 함께 사면 복권되었다. 조규순의 서자이자 조두순의 서조카인 그는 같은 탐관오리인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사촌간이다. 그는 막강한 배경에 힘입어 1898년 양력 1월 2일에 대한제국 법부 민사국장에 임명되었다. 1월 7일 부터는 고등재판소 예비판사를 겸하였고 7월 11일에 고등재판소 겸임 발령을 받고 18일에는 판사로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에 서명하였다.(3)

고종은 갑신정변으로 역적에 몰렸던 서광범을 복권시켜서 법무아문대신으로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등을 재판하여 1895년 3월 29일에 사형을 언도하게 하였고 동학농민군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하는 조병갑을 시켜서 최시형을 사형시키게 만들었다. 명명백백한 양반 관료들의 죄악을 비호하고 형량을 감해주며 번복시키는 조선의 유교정치 이념은 자기모순으로 나라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노비와 천민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생활을 보장하지 않으며 착취와 유린을 일삼는 조선 양반을 향해 그들은 도망쳐 유랑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거나 민란으로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매관매직과 부패가 용납되는 사람들의 나라 조선에 저항하며 짐승처럼 죽어갔지만 그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부조리하고 모순과 폭력이 가득 찬 기존 세상의 변혁을 희망했던 그들의 꿈은 동학농민혁명의 자양분이 되었으며 소중화를 자처했던 조선을 근대의 세계로 몰아냈다.

망국노 민영준과 탐관오리 조병갑이 역사의 허리를 잘라도 그들을 지지하며 처벌하지 않았던 고종으로 인하여 조선의 2천만 백성이 식민지의 고난과 치욕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왜 우리 역사는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인가? 오죽이나 하면 윤효정이 「대한제국아 망해라」라고 했을까?

조선의 잔인한 계급제도와 양반관료들의 독선, 부패와 탐학에 소름이 끼친다. 왕과 관리, 양반과 유림들의 횡포와 학대, 약탈과 기만에 짓밟히며 저항하며 죽어간 우리 조상들의 삶에 경외감을 느낀다. 종이요 천민이라는 이유로 억울한 차별과 천대를 받으며 무던한 짐승처럼 참고 견뎌준 조상들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그런데 먼 훗날 어떤 우리 후손이 우리 시대의 사회와 역사를 보며 ‘어찌 그런 나라가 있었을까’ ‘어찌 그런 세상이 있었을까’ 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장담을 할 수 있는가?

미주

(미주 1) 김흥식 엮음, 『전봉준 재판정 참관기』, 27-28.
(미주 2) 김흥식 엮음, 『봉준 재판정 참관기』, 135-146.
(미주 3) 박종인, 『매국노 고종』, 205.

 

참고서적

• 김흥식 엮음, 『전봉준 재판정 참관기』, 서해문집, 2016
• 박종인, 『매국노 고종』, 와이즈맵, 2020
• 신복룡, 『전봉준 평전』, 들녘, 2019
• 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 다산초당, 2011
• 이광재, 『전봉준평전 봉준이, 온다』,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6
• 황현, 『매천야록』, 서해문집, 2017
• 이윤섭, 『세계 속 한국 근대사 2』, 필맥, 2012
• 조광환,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 살림터, 2014
• 김삼웅, 『녹두 전봉준 평전』, 시대의 창, 2013
• 이수광, 『우리도 몰랐던 근대사 비밀 29』, 북오션, 2014
• 조윤민, 『조선에 반(反)하다』, 글항아리, 2018

기타 인터넷

• 나무 위키, 「조병갑」과 「민영준」 항목
• 한족민족문화대백과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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