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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은 기술과 과학에서 어떻게 아랍과 그리스를 앞질렀는가

기사승인 2021.01.16  23: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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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 생태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들 ⑵

작년 11월 즈음은 올겨울에 대한 기상에 대한 해외 기사 하나를 읽게 되었다. 그 기사의 요지는 2012년 이후로 2020년 한해 동안 북극 빙하가 최대로 녹았기 때문에 올해 겨울은 한파가 예상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측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매서운 한파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기상 이변은 인류가 직면한 생태계 위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하루이틀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태계 위기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몇 가지 원인으로 간단히 정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태계 위기의 원인을 세계관의 문제로 파악하려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가르침 특히 기독교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비판한다.
이는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기독교 신학자들은 인간의 편리와 복지를  향상시킨 것은 자연을 비신격화하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가르친 기독교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즉 기독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하나님의 이름과 명령으로 정당화 했던 것이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기독교의 태도를 비판하는 최초의 글이 발표되었는데, 그 글의 저자는 미국의 역사학자 ‘린 화이트(Lynn White, Jr.)’였다. 린 화이트는 1967년 Science지 155호에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3월10일, 1203-1207)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오늘날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인 뿌리는 바로 기독교 신앙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기독교는 인류가 직면한 생태계 위기에 대하여 무거운 죄책감의 짐을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연은 인간을 섬기는 것 이외에 다른 존재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는 기독교의 통념을 거부할 때까지 우리가 겪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는 계속 악화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앞으로 세 번에 걸쳐 린 화이트의 고전적인 논문을 번역해 게재한다. 고전을 통해 다시 한 번 생태계 위기를 돌파하는 개신교가 되기를 바란다. - 번역자 주

서양의 기술과 과학 전통

현대의 기술과 현대 과학 모두 서양의 것이라는 사실을 굳이 말하는 것은 바보스럽게 보일 정도로 분명하다. 서양의 기술은 전세계, 특히 중국에서 그 기본적인 요소들을 흡수했다. 그러나 일본에서건 나이지리아에서건 오늘날 어디에서도 성공적인 기술은 서양의 것이다: 예를 들어 의학에 있어서는 알-라지(al-Razi), 광학 분야에 있어서는 이븐-알-하이샴(ibn-al-Haytham), 수학에 있어서는 오마르 카이얌(Omar Khaiyyām) 등은 기술과 통찰력에 있어 고대 그리스인들을 능가했다. 사실 그 같은 천재들의 대부분의 저작들은 원래의 아랍권에서는 사라져 버리고 중세 라틴어 번역들로만 살아남아 이후의 서양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과학자들의 피부색과 언어를 떠나 모든 의미 있는 과학은 그 스타일과 방법에 있어서 서양적이다.

두 번째 사실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최근의 역사적 연구에 의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기술과 과학 모두에 있어 서양의 지도력은 소위 17세기 과학혁명이나 18세기 산업혁명보다 훨씬 오래된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사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고, 그것이 묘사하고자 하는 것, 즉 두 개의 길고 독립적인 중요한 발전단계를 모호하게 할 뿐이다. 늦어도 약 1000년경에-아마도 200년 정도 더 일찍 잡아도 될 것 같은데-서양은 제분 이외의 산업공정에 수력을 사용했다. 12세기 후반에는 풍력 사용으로 이어졌다. 단순한 시작이었지만, 범상치 않은 일관된 양식으로 서양은 동력 기계, 노동절약 장치, 자동화의 기술을 급속하게 확장시켰다. 이러한 것들에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은 14세기 초에 등장했던 두 가지 형태인 추시계와 같은 자동화 역사의 가장 기념비적인 업적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중세 후기 라틴 서쪽은 숙련이 아니라 기본적인 기술적 능력에서, 정교하고 세련되고 미학적으로 탁월한 자매 문화인 비잔티움이나 이슬람을 능가했다. 1444년 이탈리아에 간 위대한 그리스 성직자 베사리온(Bessarion)은 그리스 왕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서양의 선박과 군대, 섬유와 유리의 우수함에 놀랐다. 무엇보다도 그는 통나무를 켜고 용광로에 풀무질을 하는 수차의 장관에 충격을 받았다. 분명하게 그는 근동 지역에서 그와 같은 것을 본적이 없었다.

15세기 말에 이르러 유럽의 기술적 우월성은 서로 적대적인 작은 민족들이 나머지 세계를 약탈하고 지배하고 식민지화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이런 기술적 우월성의 상징은 서양의 가장 약한 국가 중 하나였던 포르투갈이 동인도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100년 동안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와 알부케르케(Albuquerque)의 기술이 과학의 지원이나 영감을 거의 받지 않은 순수한 경험주의로 세워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일상적인 이해에서 보자면, 근대 과학은 코페르니쿠스와 베살리우스(Vesalius)가 자신들의 위대한 저작을 출판한 1543년에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인체 구조론Fabrica』과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와 같은 체계가 하룻밤 사이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그들의 업적에 전혀 누가 되지 않는다. 독특한 서양의 과학 전통은, 사실, 11세기 후반 아랍과 그리스의 과학 저작물을 라틴어로 옮기는 대규모의 번역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예를 들자면, 테오프라스투스(Theophrastus) 등과 같은 사람들의 주목할 만한 책들이 과학에 대한 서양인들의 왕성한 의욕을 피해가기도 했지만, 200년이 채 되지 않아 사실상 그리스와 이슬람의 모든 과학 저서를 라틴어로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책들은 새로운 유럽의 대학들에서 열심히 읽히고 비판되었다. 비판을 통해서 새로운 관찰과 사고가 등장하고 옛 권위들에 대한 불신이 늘어났다. 13세기 말 유럽은 더듬거리는 이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세계적인 과학적 지도력을 움켜쥐었다. 뷔리당(Buridan)이나 오렘(Oresme)과 같은 14세기 스콜라 학자들의 독창성을 부정하는 것은 이들에 근거하고 있는 뉴턴,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의 독창성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않다. 11세기 이전에 과학은 라틴 문화권에서는, 심지어 로마시대에서조차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1세기 이후부터 서양문화에서 과학 분야는 끊임없이 성장해 왔다.

서양의 기술과 과학 운동 모두가 중세에서부터 자신의 고유한 성격을 획득하고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에, 중세의 기본적인 전제와 발전을 검토해 보지 않고서는 기술 및 과학의 본성과 그것이 현재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 아랍과 그리스로부터의 기술과 과학이 소개되기 전 유럽에서 농법으로 이용되었던 쟁기 ⓒGetty Image

인간과 자연에 대한 중세적 관점

최근까지만 해도, 농업은 ‘진보된’ 사회에서조차 주요 직업이었다. 따라서 경작 방법에서의 어떤 변화는 매우 중요했다. 두 마리 소가 끌던 쟁기들은 흙덩이를 뒤엎지는 못했고 단지 긁었을 뿐이다. 그래서 십자형 쟁기가 필요했고 논은 대체로 정사각형 모양이 되었다. 공정한 시각에서 보자면, 근동지방과 지중해 연안의 잘 부스러지는 흙과 반건조 기후에서는 이 농법이 잘 맞았다. 그러나 그런 쟁기는 북유럽의 습한 기후와 습기가 많은 토양에서는 부적절했다. 시작은 불분명하지만 7세기경 북유럽 농부들은 밭을 일구는 수직날과 떼를 깍아내리는 수평보습, 그리고 그것을 갈아엎는 볏을 가진 전혀 새로운 종류의 쟁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쟁기와 흙의 마찰이 너무 커서 두 마리가 아닌 여덟 마리의 소가 끌어야 했다. 이 쟁기가 거의 전폭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십자형 쟁기가 불필요해졌고 경작지도 긴 띠 모양이 되었다.

지표를 긁는 쟁기질을 하던 시기에는 경작지가 한 가족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단위로 분배되었다. 농가의 생존은 기본 전제였다. 그러나 어떤 농부도 새롭고 더 효율적인 쟁기를 사용하기 위한 여덟 마리의 소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농부들은 자신들의 소를 모아서 큰 경작팀을 만들고 기여도에 따라 일군 밭을 나누어 받았다. 따라서 땅의 분배는 더 이상 가족의 필요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땅을 가는 동력기계의 능력에 기초하게 되었다. 땅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전에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였지만, 이제는 인간이 자연의 착취자가 되어다. 세계 어디에서도 농부들이 그와 같은 농기구를 발전시킨 곳은 없다. 자연에 대해 무자비한 근대 기술이 북유럽 농부들의 후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뭔가 통하는 점이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착취적인 태도는 서기 830년 이전의 서양의 그림 달력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옛 달력에서 달은 수동적인 의인화로 나타난다. 중세의 스타일을 정립한 새로운 프랑크족의 달력은 매우 다르다. 이 달력은 경작하고, 수확하고 벌목하고, 돼지를 도살하는 등의 주위 세계에 대해 위압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과 자연은 별개이며, 인간이 주인이다.

이런 새로운 모습은 더 큰 지적인 패턴과 조화를 이루는 것 같다. 생태계에 대해 사람들이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들이 주변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데 달려 있다. 인간의 생태계는 우리의 본질과 운명에 대한 믿음, 즉 종교에 의해 깊숙이 조건 지워져 있다. 서양인의 눈으로 볼 때, 이 점은 인도나 스리랑카와 같은 곳에서 매우 분명하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중세의 조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교사상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는 우리 문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신적 혁명이었다. 오늘날에는 어떻든 우리가 ‘탈-기독교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유행되었다. 분명히 우리의 사고와 언어의 형태는 전반적으로 비기독교적이 되었지만 내가 보기에 본질은 놀라울 정도로 과거와 유사하게 남아 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습관은 고대 그리스-로마나 동양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영원한 진보라는 암묵적인 신념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것은 유대-그리스교적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공산주의자들이 그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다른 기반 위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는 이슬람과 마찬가지로 유대-그리스도교의 이단이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약 1700년간 살아왔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기독교라는 원리를 배경으로 살고 있다.

린 화이트/이정훈 typology@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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