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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다르면, 풍경도 다릅니다”

기사승인 2020.02.20  16: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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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묵상하며

16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17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18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세기 3:16~19)

욕망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도 다릅니다. 숲이 화가에게는 피사체로, 장사꾼에게는 재화로, 정원사에게는 일거리로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니 눈을 뜨면 눈이 멉니다. 무엇인가로 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보지 못합니다. 사랑에 눈이 멀어 미움이 보이지 않고, 돈에 눈이 멀어 생명이 보이지 않고, 일에 눈이 멀어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역설입니다.

출산의 고통, 남편의 다스림, 수고로운 먹거리, 흙으로 돌아감, 이 모두를 범죄와 징벌의 틀로 보곤 합니다. 원죄라는 안경을 쓰고 하나님의 징벌로만 받아들입니다. 만일 전제를 바꾸면 어떨까요? 징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어떨까요? 익숙한 안경을 벗고 날 것 그대로를 다시 보면, 장사꾼의 안경을 벗고 화가의 안경을 쓰듯 다른 풍경이 보일까요?

ⓒAntoine Josse

가인과 아벨의 처참한 살인사건 이전에 죄(창4:7)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선악과를 먹은 결과 일어날 일을 말씀하시는 이 장면에서도 하나님이 징벌한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다는 표현은 출산의 고통에만 해당합니다. 그 외에는 인과관계의 결과로 표현합니다. 부모가 불장난하면 화상 입는다고 가르칩니다. 자녀가 그럼에도 불장난하다가 뎁니다. 이 경우 화상은 행위의 결과일 뿐 부모의 징벌은 아닙니다. 그처럼 먹으면 죽을 열매를 먹어서 땅이 저주를 받고, 그로인해 수고해야만 열매를 거두게 된 과정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행한 일이 초래한 결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본다 해도, 반드시 징벌로만 봐야할까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자녀입니다.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하고 본다면,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출산의 고통은 저주입니까? 자식을 향한 사랑을 더 깊게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출산의 고통을 저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출산하듯 에덴에서 자녀를 내보야만 했던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통로일 수는 없습니까? 고된 노동으로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현실, 그 역시 저주입니까? 사랑하는 가족을 땀 흘려 먹여 살리는 보람을 맛봅니다. 노동은 온 존재를 먹여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더 깊이 가닿는 길이도 합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도 삶의 영롱한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죽비일 수 있습니다.

징벌이라는 전제를 내려놓고 새로이 보는 풍경, 그곳에서 하나님은 냉혹한 재판관이 아닙니다. 안타까워하시고 아파하시는 사랑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자녀가 유한한 삶 속에서 의미 있는 삶으로 깨어나길 바라시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출산의 고통, 노동의 수고, 죽음의 한계를 통해 깨어나 사랑으로 살아가길 바라시는 마음은 왜 아닙니까. 자녀를 낳고 길렀던 하나님의 아픔과 사랑에 참여하게 하는 신비한 초대는 왜 아닙니까. 징벌, 원죄라는 틀을 내려놓고, 고통과 수고가 나쁘기만 하다는 편견을 내려놓고, 원수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면 더 더욱! 십자가에서 사랑을 알아보듯, 실낙원의 은총이 보입니다. 무엇보다 괴로운 일에 너무 쉽게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이름표를 붙이지 않게 됩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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