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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토브(ﬤי־טוב)

기사승인 2020.01.17  18: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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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한국당의 문제적 사유 구조

유비(類比) 논리(analogy)는 기본적으로 설명의 논리이다. 일상의 경험을 이용하는 설명이므로 가장 편리하고 쉬운 설명의 방법이다. 이것과 저것을 비교해 설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비적 설명은 과학적 탐구가 추구하는 인과적 설명 또는 원인 설명과는 다르다. 과학적 설명인 원인 설명은 원인 사건과 결과 사건의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발견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연 법칙 또는 인과의 법칙을 전제로 하는 과학적 설명은 연역 논리적 설명이 된다.

따라서 과학적 설명을 ‘연역적-법칙적 설명(deductive-nomological explanation)’이라고 한다. 이러한 과학적 설명은 법칙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리고 또 연역 논리적이기 때문에 확실하고 설득력이 있다. 과학의 힘과 과학에 대한 믿음은 이런 과학적 설명의 힘에 있다.

다만, 지배 법칙이 발견되지 못한 현상에 대해서는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과학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문제 영역들을 남겨둘 수밖에 없는 한계성이 있다. 과학의 발전이 언젠가는 그런 영역들에 대해서도 과학적 설명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의 발견은 언젠가 이러한 설명이 가능하게 되리라는 믿음의 실현이었다.

유비, 인간의 사유 구조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 상태에서 쉽게 설명해 보는 것은 대체로 유비적 설명이다. 비유로 설명하거나 유비 관계로 설명해 보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서 법칙에 근거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유로 설명하게 된다.

비슷한 상황을 비교하면서 비슷한 원인으로 설명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유비 논리적 설명이 의존하는 유비 관계는 다양하다. 그것은 구조적 유비일 수도 있고, 형태적 유비일 수도 있다. 기능적 유비일 수도 있고, 목적적 유비일 수도 있다. 속성적 유비일 수도 있고, 성향적 유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상태적 유비일 수도 있고, 상황적 유비일 수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유비 관계를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유비 논리적 설명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장 쉬운 설명의 방법이면서 동시에 가장 빗나가기 쉬운 설명 방법이 된다. 유비적 관계에 근거한 설명이 유비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다른 측면들을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유비(逆類比, disanalogy)’의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제시된 유비적 설명을 역유비적 관계에까지 확장시켜 볼 때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명이 되지 않는 새로운 문제만 파생시키는 결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신학적 유비는 성서로부터

이러한 유비 설명이 가장 많이 이용되는 곳은 신학 분야이다. 말할 수 없는 존재, 즉 신 혹은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 유비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 내 현상으로부터 시작해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방식으로 오랫동안 신학의 한 방법론으로 애용되어 왔다.

이는 20세기 신학의 아인슈타인이라고 칭해졌던 스위스의 개혁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도 즐겨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물론 그는 로마가톨릭신학자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유비를 신학의 방법론으로 사용했다. 이른바 ‘신앙의 유비(Anologia Fidei)’이다.

바르트가 이 신앙의 유비를 발견한 것은 ‘안셀름’을 연구하는 가운데 찾았다. 즉 이해되어야 할 그 대상에 적합한 언어구조와 사유구조가 주어진다고 보았다. 계시를 통한 접근, 즉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고 그 자체 안에서 사유구조를 찾은 것이다.

하나님의 유비

창세기 1장은 전통적으로 ‘창조’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리고 일정한 문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나님의 말씀-실행-하나님의 평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가령 창조의 첫째 날은 이렇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빛이 생겼다” -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는 형식이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과 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된다. 하나님의 창조가 전통적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든, 이미 이것도 오래된 학설이지만, “유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든, 하나님의 평가는 비교 대상이 없이 “좋았다”라고 평가하신다는 점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평가할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인간의 평가는 유비적 사고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것과 저것을 비교해 좋고 나쁘고를 말한다. 일상의 예이지만, 어떤 물건을 보고 동일한 물건들 내에서 이것저것을 경험한 것에 따라 좋고 나쁘고를 평가한다는 말이다. “이 회사 휠체어는 저 회사 휠체어에 비해 무게가 가볍지만 힘이 더 좋아 비탈길을 올라가는데도 좋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사고 체계는 유비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게 정설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물 자체를 그 자체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이게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것을 비교할 때, “이것은 나쁘고 저것은 좋다.”라는 고정관념이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사고 체계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비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님에도 유비라는 사고방식 자체를 뛰어넘으라는 불가능한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 다시 바르트와 성서로 돌아가 보자. 바르트는 “이해되어야 할 그 대상에 적합한 언어구조와 사유구조가 주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성서는 하나님의 평가를 기술하면서 전혀 비교 대상이 없음에도 “좋다”고  평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놓고 있다.

장애인은 나쁘다는 유비 사고가 문제다

이해찬 더불어 민주당 대표의 언급과 이를 비판하는 자유한국당의 논평에서 마음껏 장애인 비하를 일삼는 모습을 보았다. 장애인 인권단체들과 유관관계들은 일제히 비판의 논평을 쏟아내고 있다. 이해찬 대표의 사퇴까지 종용하고 있고, 당연한 요구로 보인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의 유비적 사고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기자가 길고 지루한 이론적 서론을 쓴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인간의 유비적 한계를 넘어서라는 한 천재 신학자의 연구와 성서를 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 어떤 비교 대상 없이도 그 자체를 선하고 좋다고 평가하시는 눈을 가졌으면 한다는 것이다. 몸의 불편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좋지 않다는 관념 자체가 박혀 있는 것을 벗어나야 한다고 성서는 말씀하신다. 바르트에 따르면 무엇인가를 이해할 때 그 대상에 적합한 언어구조와 사유구조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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