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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삶

기사승인 2025.01.08  03: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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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진실, 사랑(요한1서 5:6-13)

202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해 마지막 달 12월에 정치적 격변이 시작되었으나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터에, 바로 지난 주일 아침 있어서는 안 될 항공기 참사가 벌어져 착잡한 심정 가운데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엄중한 사태의 의미를 더욱 실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1서의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진실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새해 첫 주일 처음 주어진 말씀이자 동시에 교회창립 25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 말씀으로 한정하면, 언뜻 보기에 그 첫머리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 하는 의문을 자아냅니다. “그는 물과 피를 거쳐서 오신 분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다만 물로써 오신 것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셨습니다. 성령은 증언하신 분입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1:6).

여기서 물은 모든 복음서가 증언하듯이 예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진 진실을 상징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임재하셨다고 복음서는 증언합니다. 피는 예수께서 고난을 겪고 십자가 위에서 흘린 피를 나타냅니다. 인간으로서 몸을 지니고 있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간으로서 삶을 사신 역사적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분명하게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한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앞의 말씀에 이어 헤아려 볼 때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낳아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분이 낳으신 이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5:1~5)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구현한 예수야말로 구세주라는 믿음입니다.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닌 오직 사랑으로 세상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역설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땅에서 삶을 사시고 고난을 겪으신 예수께서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의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역사적 예수의 삶 자체를 부정하고 신비한 영적 존재로서 예수를 믿고자 하는 잘못된 믿음에 대한 대응입니다. 이른바 영지주의적 믿음 또는 가현설을 따르는 믿음의 잘못을 일깨우고, 온전히 몸을 지니고 피를 흘린 그분이야말로 성령께서 보증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역설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잘못된 믿음을 지적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영원한 생명의 길을 따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더불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 또한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서신을 보내는 목적이 바로 그 진실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 영원한 생명이 무엇일까요? 흔히 상상하듯 그것은 개별적 존재의 목숨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별적 존재의 죽음은 오히려 온 생명의 지속 가운데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현상일 뿐입니다. 이 말씀은 온 생명을 지속 가능하게 해 주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진실이 뭘까요? 요한복음이 일관되게 말하고, 그 뜻을 이어받는 요한서신이 일관되게 말하듯,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이루는 삶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진실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6~21).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드러냈기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은 예수 안에서 드러난 사랑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삶을 이루는 사람은 빛 가운데 있으며, 그 삶을 거부하는 사람은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바로 앞서 요한서신 또한 분명하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4:7~8).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삶을 이루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에 동참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일찍이 교리주의에 묶인 교권에 맞서 신앙양심의 자유를 외쳤고 불의한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 옹호 대열의 선두에 섰던 장공(長空) 김재준 목사님은 그리스도교 복음의 진실을 “생명·평화·정의”로 집약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보편적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제시해 줄 뿐 아니라 오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바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 사랑은 영생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다. ⓒGetty Images

첫머리에 내건 ‘생명’은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궁극적 지향점을 말합니다. 장공은 일찍부터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역설했습니다. 생명은 그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단적으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장공은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통찰에 힘입어 범우주적 생명 진화의 원동력을 ‘사랑’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생명의 본성을 사랑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서로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당기고 싸안는 힘입니다. 그 사랑이 생명의 원동력이라 할 때 그 생명은 한갓 개체의 목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의 총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평화’는 온전한 생명으로 존재하는 사랑의 관계를 한층 구체화한 의미를 지닙니다. 밀쳐냄으로써 갈등하는 관계가 아니라 당기고 싸안음으로써 생명이 온전히 존속하도록 하는 조건, 그것이 평화입니다. 특별히 그 평화는 다양한 연결망 가운데 있는 집단과 집단의 관계의 온전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장공은, 사람은 그 사람의 사랑하는 범위만큼밖에 위대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사랑의 범위를 우주적으로 확대할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사랑의 범위를 한정된 집단의 범위로 제한함으로써 전쟁과 갈등을 일으키는 삶의 현실을 넘어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정의’는 평화로운 생명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을 말합니다. 정의는 올바른 인간관계를 뜻하는 것으로, 그것은 집단적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개별적 관계에서도 철저하게 지켜져야 하는, 모든 관계의 출발점입니다. 상대에 대한 존중, 상대의 몫에 대한 정당한 인정이 정의의 요체입니다. 배타적 권력의 독점과 배타적 물질의 독점은 그 기본을 무시한 데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장공은 그 기본원칙이 무너진 역사적 현실에서 예언자로서 정의를 이루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생명·평화·정의”는 단순한 병렬이 아니라 의도된 배열로서, 최고의 보편적 가치에서부터 보다 구체화된 가치의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우리들의 몫을 그 역순으로 일깨워줍니다. 지상의 평화, 궁극적으로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에 이르는 출발점은 곧 이 땅에서 정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때 그 순서는 “정의·평화·생명”이 됩니다. 사랑으로 완성되는 우주적 공동체, 그것이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지향하는 궁극적 이상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그 진실에 다름 아닙니다. 그것은 궁극적 이상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가장 직접적인 관계 안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5:4). 너무나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로일 뿐입니다. 사랑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결단을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의 한계 안에 가두어 둘 것인지 그 범위를 넘어설 것인지 헤아리는 지혜와 마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여 세상에 악이 발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데 굳이 결단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방해하는 장벽이 가로 놓여 있을 때입니다. 역시 한국 민주화운동의 선구 가운데 한 분인 박형규 목사님은 그 상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이웃사랑도 할 수 없다.” 이웃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 불의한 정치권력과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2024년에서 2025년으로 이어지는 추운 겨울 저마다 손에 든 밝은 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는 사랑의 온기, 사랑의 열기를 느낍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진 못한 이들이 휘둘러댄 권력에 고통을 겪고 탄식했지만 순식간에 좌절의 탄식을 거두고 밝은 소망의 노래를 함께 부르게 되었습니다. 서로 믿고 사랑하는 삶을 이루고자 하는 모두의 마음과 뜻이 모인 결과입니다.

지난 주일 아침 무안공항에서 벌어진 제주항공기 참사에 우리는 다시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불의한 정치권력이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무너뜨리는지 목도하고 있는 와중에 불의한 사회적 시스템이 어떻게 사랑하는 이들을 갈라놓고 비탄에 빠지게 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며 우리는 모두 비통해하고 있습니다.

사고의 직접적 원인은 정밀한 조사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그 사고의 거시적인 원인은 모를 바 없습니다. 인간의 삶보다는 이윤을 추구를 앞세운 무리한 운행, 쉴 틈도 없이 일해야 하는 노동조건 가운데서 빚어졌을 정비 불량이 그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 악조건이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리는지 우리는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을 온전히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 불의하고 악한 삶의 조건을 넘어 서로 믿고 사랑하는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서로 믿고 사랑하는 삶을 스스로 살아갈 뿐 아니라 그 삶을 방해하는 조건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로 딱 25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복음의 참뜻입니다. 그 뜻으로 지금까지 일관하게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그 뜻을 지키고 구현하기 위해 헌신해 온 모든 이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2025년 새해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헌신이 더욱 빛나기를 바랍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기쁨이 더욱 넘쳐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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