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식에서 감사로(시편 41:1-3)
▲ Edvard Munch, 「Death in the Sickroom」 (1893) ⓒWikipedia |
1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2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
들어가는 말
부활절 일곱째 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은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며 믿음 안에서 살아갈 때, 삶에서 어려움을 겪는 순간, 힘든 순간, 역경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은 극복되고 이겨낼 수 있게 되며 기쁨의 순간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게 되는 이유입니다. 부활절기의 마지막 주일, 그리스도 부활을 생각하며 우리의 삶에서도 날마다 부활의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인생에 관한 불교의 유명한 우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섰다가 숲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의 앞에서 사나운 코끼리가 돌진해 옵니다. 그는 코끼리를 보고 도망갈 길을 찾았으나 피할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엉겁결에 덤불 속으로 뛰어들고 보니 거기에는 깊은 구덩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앞뒤 잴 겨를도 없이 갈대 줄기를 붙잡고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져 당장의 위기를 모면합니다.
한숨을 돌리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구덩이 바닥에는 잔뜩 독이 오른 뱀과 전갈들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위를 쳐다보니 자신이 잡은 갈대의 뿌리를 쥐들이 갉아 먹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성난 코끼리가 주변의 나무를 마구 들이받아 쓰러뜨리고 있었습니다.
코끼리가 쓰러뜨린 나무에는 벌집이 있었는데 나무가 쓰러지며 벌집에 있던 벌 떼가 그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면초가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태에 놓여있을 때, 쓰러진 나무에 달려있던 벌집에서 한 방울의 꿀이 우연히 그의 입술을 적십니다. 그리고 그는 달콤한 꿀에 취해 자신의 위급한 처지를 잠시 잊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고통스러운 상황인데 입술에 떨어진 꿀로 인해 고통을 잠깐 잊어버린 상태, 꿀의 향과 맛에 잠시 취해있는 상태가 바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 싯다르타가 인간의 삶이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식한 후에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그렇기에 불교에서 인생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는 어떨까요?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 구원, 복에 집중합니다. 그렇기에 고난보다는 기쁨과 사랑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바라고 있다면, 구원을 바라고 있다면, 복을 바라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나 구원이나 복이 아니고서는 극복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기독교의 기본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인생은 고통스럽다는 데에 기반하고 있는 듯 합니다.
시편을 읽다보면 느끼게 되는 생각도 이와 같습니다. 시편에는 시인의 고통이 담긴 글들이 너무도 많이 나타납니다. 오늘은 시편이 왜 이렇게 많은 탄식과 아픔을 담고 있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시편 1권
150장에 이르는 시편은 크게 다섯 개의 묶음으로 구분됩니다. 우리는 이를 1권부터 5권까지 나눠서 부르고 그 안에 담긴 시들은 각각 편으로 구분합니다. 각 권에 속하는 시가 몇 편부터 몇 편까지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각 권이 시작되는 시 앞에 권수를 적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제1권은 1-41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은 시편 제1권의 마지막 시입니다. 학문적으로 시편의 양식에 관한 연구는 오래 진행되어왔습니다. 시의 양식을 분류하고 그 시가 어떤 상황 속에서 낭독되거나 읽혀졌을지를 밝혀내는 작업입니다.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상당히 다양한 양식을 발견할 수 있지만, 크게는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거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찬양 시편, 자신의 고통을 탄식하거나 이에 대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탄원 시편, 왕의 앞날을 축복하거나 왕의 길을 노래하는 제왕시 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시편 제1권에 관한 설교에서 탄원시와 감사, 찬양시가 어떤 순서로 배열되어 있고, 이러한 편집 구성이 보여주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펴보니 시편의 구성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 합니다.
탄원시나 찬양시와 같은 표현은 지금의 학자들이 붙여놓은 표현입니다. 시편을 엮어놓은 이들이 지금과 똑같은 방식으로 150편의 시를 구분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또 탄원시나 탄식시라고 해서 꼭 고통에 관한 내용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22편과 같은 시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여기까지는 탄식시 또는 탄원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의 후반부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양입니다. 탄식과 탄원, 그리고 찬양이 하나의 시 안에 모두 들어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속한 시편 41편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자들 중 일부는 이 시를 감사시로 분류하기도 하고, 일부는 탄식시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두 가지 요소가 함께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편 제1권에 대해 살펴볼 때, 각 시의 양식이 무엇인지를 따지고 그 양식이 어떤식으로 배열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보다는 시편 제1권 전체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시편의 다른 권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제1권에는 탄식과 탄원, 감사와 찬양이 계속 섞여서 나타납니다. 하나의 시 안에서 이것들이 섞여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편 제1권 안에 탄식과 감사는 계속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이것이 시편 제1권이 이야기하는 사람의 삶,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삶은 끊임없는 탄식의 연속입니다. 탄식할 일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계속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감사와 찬양입니다.
고통과 감사의 순환
오늘 본문은 탄식과 탄원이 끊이지 않는 삶에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줍니다. 1절에 나타난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시편 41편의 시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 이것이라고 생각한 듯 합니다.
11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시기에 원수가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 그것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삶’ 하나로 규정할 순 없습니다. 그보다는 11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에 그 사람은 다시금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을 올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탄식할 일이 생겨나는 삶입니다. 평탄대로를 걷는 삶, 꽃길만 걷는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복이 있습니다. 탄식이 감사와 찬송으로 바뀌는 복이 있습니다.
고사성어 중에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편이 이런 새옹지마와 같은 인생을 노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들이 탄식에서 감사로 바뀌는 삶을 누린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자신들이 누려왔던 기쁨이 탄식으로 변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인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 한 번도 안다녀본 사람이라도 아마 그것이 어떤 삶인지 다 알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보단 내가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이 편하고 좋게 느껴지니까 그 삶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에서 어려움과 고통은 끊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과 고통의 사슬을 끊고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시게 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