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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가져오는 선한 사람

기사승인 2023.04.27  0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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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제사장의 삶(창세기 12,1-3; 베드로전서 2,1-12)

▲ Illustration of the consecration of Aaron and his three sons (1890 Holman Bible). ⓒWikimediaCommons

창세기 12,1-3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말씀이고 기회있을 때마다 설교본문으로 사용되기도 하므로 모두에게 익숙한 본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어떤 말씀을 만나느냐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또 줄 수 있으니 놀랍습니다. 베드로전서 2,1-12과의 만남도 그러한 예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만나 그 말씀이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행동의 계기를 마련해주기를 빕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자신들의 직접적인 역사 맨처음에서 듣는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것에 감사드리고 긍지를 느낄까요?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크게 하신다니 그 약속을 믿고 겸손해질까요? 복이 되라 하셨으니 복된 민족을 꿈꿀까요?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라 했으니 하나님께서 세상에 베푸시는 복의 매개체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숙고할까요?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들일 수록 더욱 더 무거운 책임을 느낄 것입니다. 이 말씀의 기본 의미는 아브라함과 그에게서 나온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에게 복이 되는 관계에서 그들의 존재이유를 찾는 것에 있습니다.

사람은 개인이든 국가든 관계 속에서만 자기 존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 관계는 다양하겠지만, 각각의 존재 방식이 타자의 존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따라 관계는 단순하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복이라는 말로 그 관계가 지향해야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그에게 복이 되라고 명령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목표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복이 되라고 하십니다. 약속 다음에 명령형이 나오니 이를 결과로 약화시켜 이해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령형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복은 무조건 하늘로부터 또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기치 못한 복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염두에 두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복이 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서로가 그러한 삶을 산다면 이미 그러한 삶의 세계는 행복한 세계요 평화의 세상일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상을 창세기 본문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그럴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이를 촉진할 수 있는 장치가 들어 있습니다. 그 장치는 바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비는 자에게 축복을,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리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보호하는 장치일 뿐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복이 되는 길을 안내하는 장치입니다.

성서에서 이런 삶을 살아간 사람을 꼽으라면 요셉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이집트를 비롯해 가나안 지역을 가뭄으로부터 구했고 이집트는 야곱과 그의 후손에게 삶의 자리를 제공했습니다. 이 시간이 그다지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서로를 살리는 일이 이렇게 일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보면 유감스럽게도 서로에게 축복이 되는 길을 서로 사양하는 듯합니다. 그러한 약속과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 길을 끝까지 외면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서로를 살리는 살림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은 아니지만 베드로는 같은 책 3,8-9에서 한 마음이 되고 불쌍히 여기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복을 빌라고 합니다. 상식적인 그러나 쉽게 따르기 힘든 이 마음가짐과 행동양식이 분명 그 길을 가는 방법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또 그렇지는 못해도 최소한 그와 닮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베드로전서 2,1-11은 1-2 권고(a), 3 권고 이유=자비(b), 4-5 거룩한 제사장(c), 6-8 산 돌과 버린 돌(d), 9 왕같은 제사장(c), 10 긍휼(b), 11-12 권고(a)의 교차법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형식의 초점은 권고에 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고 순전한 삶을 살며 비방하는 자들조차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가까이는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마 5,16을 연상케 하고, 멀리는 너희가 진리와 평화를 사랑하면 많은 백성들이 야훼를 찾고 야훼께 은혜를 구할 것이라는 슥 8,18-23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경험했기 때문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거룩한 제사장의 삶을 살고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 길입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이어주는 자이지만, 여기서 제사장은 구약에서와 달리 제의적 의미의 제사장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사람들이 야훼에게 향하도록 하는 의미의 제사장입니다. 그러한 삶 때문에 거룩한 제사장으로 일컬어집니다.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그러한 자로 인정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은 신분이 아니라 그러한 삶을 드러내는 말이며, 그러한 삶을 살도록 이끄는 동인입니다. 때문에 과거의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이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거대한 계획 속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셔서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새로운 시작을 일으키셨습니다. 두 본문을 함께 읽을 때 그 시작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의 은총과 사랑으로 새땅에서 살게 된 것처럼 새세계를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럴만한 자들이 본래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제사장으로 사람들 앞에 세우셨습니다. 그와 함께 그 앞에서 사는 자에게 요구되는 삶의 모습이 선한 삶입니다.

선한 삶은 시대를 넘어 줄기차게 계속되는 모습도 있습니다만 시대마다 시대의 요구가 동일하지 않으므로 같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복을 가져오는 선한 삶은 무엇입니까? 전쟁 위기와 기후 위기, 효율을 내세우며 무한경쟁을 강요함으로써 초래되는 삶의 파괴 위기, 인간의 노동력과 지적 능력을 대체하는 기계에 의한 인간 상실의 위기 등으로 점철된 위기의 시대에 선한 삶은 그 위기들을 부르는 힘들에 저항하는 일들을 당연히 포함할 것입니다. 그 위기들은 다가오는 위기일 뿐 아니라 이미 많은 희생자들을 만들어내고 있어서 이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품는 일 역시 성서가 말하는 선한 일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우리의 삶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가시고 선한 길을 가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러한 삶의 방향을 따르는 것이기를 빕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모퉁잇돌을 무시하고 버렸던 자들처럼 그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선한 일을 함으로써 위기의 사람들에게 위기 극복의 복을 끼치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눈을 밝혀 그가 세우시는 위기극복의 모퉁잇돌을 지나치거나 무시하는 일이 없기를 빕니다.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선한 일을 함으로써 복이 되라는 명령을 수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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