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창조(창 1,1-2,3; 계 21,1-7)
▲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흙으로부터 창조하셨다. ⓒGetty Image |
성서가 처음과 끝이 세상의 창조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탐구의 대상이 된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일입니다. 이 세계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는 사람의 노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계의 기원에 대해 사람이 묻고 또 묻는 것은 존재의 기원에 대한 답변이 자기 이해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그에 대한 답변은 하나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답변들이 있다는 것은 때로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때로는 편견을 낳기도 합니다. 특히 자연과학의 답변은 과학의 합리적 설명능력 때문에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있는 것을 설명하고 이용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있게 한 자가 있는지, 있다면 누구인지에 대해 물을 이유가 없습니다.
과학은 ‘그’의 이름을 우연이라고 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과학은 있는 고려청자의 재료와 제조법을 찾아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만든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또 가질 이유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답변이 유일하거나 절대적이지도 않습니다.
성서는 세상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있게 한 이에 대한 증언입니다. 창조는 대변화 사건입니다. 창조 이전의 세계는 창조 이후의 세계와 달리 어둠과 물 그리고 빈 땅으로 구성된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하나님 없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은 마치 독수리가 새끼들이 나는 연습을 할 때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위에서 지켜보듯이 물 위에서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 세계가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밖 영원에 계신 분이십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그 어둠을 향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변화를 꾀하셨고 변화를 일으키셨습니다.
빛의 생성은 어둠의 소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빛을 기뻐하시며 빛을 어둠과 분리시키시고 어둠과 빛이 순환하게 하십니다. 이로써 빛 창조는 곧 시간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 날은 영원 가운데 한 날이지만 그 이후 날들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함께 영원으로부터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현재 어둠은 많은 경우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지만, 시간 속에서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알리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시간은 끝나고 다시 영원이 시작됩니다. 이제까지와 다른 것은 빛을 관장하던 해와 달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영광이 되고 그의 어린 양이 등불이 된다는 점입니다. 어둠은 끝이 납니다. 시간적으로는 영원에서 시간으로, 시간에서 영원으로 옮아간다면, 어둠과 빛의 관점에서는 어둠에서 어둠과 빛으로, 어둠과 빛에서 빛으로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또한 과학의 전망과 다른 점입니다. 그에 따르면 세상의 끝은 빛의 소멸 곧 어둠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만들어가시는 세상의 모습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후 공간을 만드십니다. 물과 물을 나누어 ‘하늘’을 만드시고 땅을 나누어 바다와 육지를 만드십니다. 시간 속에서 공간이 만들어졌고, 하나님은 각각의 공간을 채워나가십니다. 하나님은 그 하나를 만드실 때마다 창조자로서의 기쁨을 느끼시며 만족해하십니다. 세계 창조는 이처럼 하나님에겐 즐거움의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속으로 들어오시듯 공간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즐거움의 시공간입니다. 비어있던 공간들이 다 채워졌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특별한 것을 생각하십니다. 빛을 관리할 천체들을 만드셨던 것처럼 이 세상을 관리할 자 곧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천체들보다 더 특별한 이유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이 관리자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어떤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를 땅의 주민들 곧 생명체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체들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이처럼 놀라운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 일을 평화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평화의 축제로서의 상생이 세계 창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요 꿈입니다.
모든 생물체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를 볼 수 있는데, 사람은 불행하게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사람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보지 못했고 통치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실제든 상상이든 어떤 형상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우상입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었던 탓에 하나님께서 뜻하셨던 평화는 사람 때문에 파기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고 자연을 약탈하는 비평화의 세계가 하나님 앞에 펼쳐졌습니다. 눈물과 한숨이 마르지 않는 세상입니다. 자연의 보복을 이야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위치를 부정하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는 시대입니다. 창조질서가 사람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 결과의 일부가 오늘 우리가 겪는 코로나19와 기후변화일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할까요? 이러한 세상에 새세상이 가능할까요?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회복된 세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그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끝내시고 새세상을 열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현재를 버리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새세상을 이루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그 아들을 통해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창조가 처음 세상을 열고 또 마지막 세상을 여는 일이라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안에서의 새창조이며 새로운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인정하는데서 그 나라가 시작되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계의 화해가 시작될 것입니다.
너와 그에게서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를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세계를 보존하는 자가 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있고 하나님의 평화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창조절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새창조가 우리와 세계 안에서 시작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