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선의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을 읽고
30년 교수직을 마감하며 저자는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H. 아렌트와의 대화 속에서』를 세상에 내 놓았다. 세월호 4주기(2018년 4월 16일)를 추모하는 마음을 한껏 담은 채로 말이다. 평소 세월호 현장을 많이 찾았었기에 아픔에 대한 심적 공감이 누구보다 큰 학자였다.
그러나 마음의 느낌을 글로 적는 일은 지난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섣부른 글보다는 아파하는 유족들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무엇이든 ‘답’을 하려는 신학의 못된 습성(?)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리라.
지난 해 세월호 3주기를 맞아 ‘세월호 작은 도서전’을 개최한 적이 있다. 관련 책 150여권을 모아 일주일간 부암동 현장 아카데미에서 전시하였다. 이들 중 30권 정도가 신학자들이 쓴 글이었다. 나찌 정권하의 아우슈비츠에 비견될만한 세월호 참사, 그에 대한 신학적 답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타 종교들에 비해 고통에 민감한 기독교의 자랑스런 일면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답’을 앞세운 탓에 감동은 덜했다. 세월호 앞에서 신학 자체의 되물음이 선행되지 못한 결과였다. 아픔과 고통에 대한 추사유로서 신학, 소위 세월호 以後의 신학은 자신에 대한 반성(성찰)과 함께 다시 탄생되어야 옳다.
1.
이점에서 본 책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은 한 중요한 공헌을 했다. 우선 여성 신학적 관점에서 세월호 고통을 읽었기에 본 책은 ‘답’을 앞세우지 않았다. 역경을 헤쳐 나가는 유족들의 경험과 삶의 지혜를 우선시 했고 그를 신학적으로 재사유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304명 어린 생명들의 죽음을 ‘끝’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 以後를 새롭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부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셈이다. 하느님에 대한 이해 역시 급진적으로 재구성되었다. 세월호 앞에서 무능(?)했던 신(神)을 구원하는 인간을 말했던 까닭이다.
그렇기에 본 책은 신학 책이면서 정치적 색조가 진하다. 특별히 부제인 ‘한나 아렌트와의 대화’가 본 책의 의미를 더 해준다. 아우슈비츠 사건을 겪고 사유했던 여성철학자 아렌트의 생각을 빌어 세월호 以後의 삶, 세월호 以後를 사는 크리스챤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는 까닭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책 서문에 아주 잘 들어나 있다. 평생 유교 전통과 더불어 한국 신학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는 여성신학자의 시각과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관점이 어우러져 여타 책들과 변별된 감동을 본 책은 선물한다. 세월호 시작에서부터 4주기에 이른 지금까지 썼던 글을 모은 것이라 글 마다 성향이 조금씩 다를 수 있겠으나 세월호에 대한 저자의 일관된 신학적 논거만큼은 분명하다. 이런 신학적 입장에 대해 호/불호를 지닌 독자들의 날 센 평가를 기대해 본다.
2.
말했던 대로 저자의 서문이 본 책에서 참으로 소중하다. 서문이지만 한편의 논문처럼 쓰여 졌고 한나 아렌트에 대한 시각을 핵심적으로 소개한 까닭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아렌트와 그의 스승 하이데거의 생각을 대별시켰다. 선생이 인간을 사멸성(死)으로 보았다면 아렌트는 탄생성(生)을 말했고, 각자의 본래성을 중히 여긴 선생과 달리 제자는 타자와의 행위능력을 강조했으며, 마지막으로 하이데거가 익명성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상(像)을 그렸다면 아렌트는 세계를 사랑하는(amor mundi) 인간을 노래한 것이다.
이런 대별은 세월호를 한국 여성신학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일을 용이하게 한다. 저자는 하이데거 사유를 서구 기독교의 마지막 모습이라 여겼고 아렌트를 그를 넘어설 대안으로 수용하였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는 세계에 대한 공적 책임을 강조하는 유교와의 연결고리로 작동한다. 천지를 낳고 살리는 마음(天地生物之心)이야 말로 유교의 핵심이라 여긴 탓이다. 아렌트의 세계 사랑이 한국 유교의 핵심과 잇대어 있다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 여기서 세계사랑은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총체적 일상과의 관계를 통칭한다.
하지만 세월호를 통해 들어난 교회는 세상에 대해 무기력, 무능력의 극치를 보였다. 그럴수록 세월호 以後 신학은 세상적 삶과 교회 내 구원과의 상관성을 논해야만 했다.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세월호 以後를 살려한다면 단연코 기독교의 앞날은 없다. 이를 위해 저자는 화석화된 하느님 이야기와 역할과 의미를 잃은 부활 등의 이야기에 갇혀 아무 것도 못하는 기독교를 해체, 재구성 한다. 저자의 여성신학은 바로 이를 위해 필요한 담론이다.
한마디로 전통적 神學을 ‘信學’으로 바꿀 것을 명한다.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는 神學이 아니라 서로를 믿을 수 있는 ‘信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통적 하느님 신앙을 믿음(信)의 학으로 바꿔 인간 역사 속에서 용서와 약속의 능력을 개발시키자고 역설한다.
3.
세월호 참사 발발 한달 후인 5월 하순 저자는 한국 교회 여성연합회가 주관한 정치 토론회를 위해 “세월호 참사와 한국정치 그리고 교회여성”이란 첫 글을 썼다. 이 글에서 저자는 세월호 사건을 불의한 정치와 경제의 합병 탓으로 규정했다. 여기에 종교마저도 힘을 보탰으니 사람들은 ‘이것이 국가인가’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자국민조차도 식민지로 삼았으니 말이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정부는 실패자를 무능력한 존재로 내쳤다.
하지만 참된 정치가에게 패자는 더 없이 중요한 법이다. 이들을 이끌고 가는 것이 정치일 터, 경영자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이 땅의 기독교는 결국 정치마저 실종시켰다. 기독교가 보이지 않는 하늘의 계명이 아니라 황금송아지만을 숭배한 까닭이다. 결국 세월호 참사는 이런 야합의 필연적, 논리적 귀결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럴수록 우리는 기독자로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 옳다. 이점에서 여성신학자인 저자는 일차적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는 능력을 키우라 권면한다. 정치란 타자와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일로서 지금처럼 종교가 정치를 버리면 세월호와 같은 폭력이 더욱 위세를 떨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종교에게 던지는 질문이 날카롭다. 지금껏 섬김만 받았던 교리들을 맘껏 토론되도록 허용하라는 것이다. 소위 상속된 교리는 속성상 ‘근본’과 ‘안정’을 바라는 경제논리와 쉽게 짝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저자는 어거스틴의 언술, ‘시작이 있기 위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말을 좆아서 인간의 노예성을 치유코자 했다. 현실이 어렵고 힘겹더라도 인간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탄생성‘의 존재인 탓이다. 저자는 이것을 신뢰의 그루터기로 여겼다. 그렇기에 인간 속 창발성의 망각은 세상을 등지는 일과 같다. 한국교회가 세월호 유족들에게 천국신앙을 강조했던 것 역시 탄생성의 부정과 맥이 닿아 있다. 지금 이곳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빼앗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신앙적 근본주의와의 싸움을 촉발시킨다. 세상과 대면키 싫어 혹은 새로움을 견디는 일이 힘겨워 도망가는 것을 근본주의의 속내로 보는 탓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자신을 새롭게 보는 ’성(聖)의 평범성‘을 주장한다.
아렌트가 말한 ’악(惡)의 평범성‘을 비튼 아시아적 혹은 유교적 발상이다. 교리나 조직으로 매개되지 않는 신(神)과의 직접적 소통을 적시한다. 여기서 聖은 ’탄생성‘의 다른 의미일 것이다. 이런 의미로 저자에게 神學은 자연스레 信學이 되었다. 유교가 말한 ’下學以上達‘이란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정이 이런 信學의 기초이자 근간인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4.
본 책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글이 있다. 그 글은 짧지만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적 진리와 정의의 문제를 다뤘기 때문이다. 사실적 진리가 하나의 의견으로 둔갑하여 폄하되는 현실에 저항할 목적으로 썼던 글이다.
이 글에서도 한나 아렌트가 역시 중요하다. 주지하듯 아렌트는 인간 고유한 일로서 ‘약속’과 ‘용서’를 들었다. 말로 내뱉은 것을 지켜야 함에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은 까닭이다. 그렇기에 인간사에서 용서는 필히 거듭 요청된다. 용서가 없다면 세상은 유지될 수 없다. 인간사(人間事)는 약속과 용서의 되풀이라 말해도 좋겠다.
여기서 용서란 관계가 회복되는 일을 말한다. 과거(약속파기)를 접고 가해자에게 다시 약속할 수 있는 ‘현재’를 ‘선물’로 주는 행위가 바로 용서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적 진리이다. 사실적 진리자체가 조작되고 은폐될 경우, 용서는 가능치 않다. 이점에서 사실과의 정직한 대면을 세월호 유족들이 정부에게 요구한 것은 지당했다.
약속하고 용서하는 인간사, 곧 정치 행위에 있어 사실적 진리는 기본이자 전제이기 때문이다. 사실성의 포기야말로 정의 포기와 같다. 그렇기에 저자는 사실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탄생성의 부정이자 종교에 대한 배신이라 하였다. 사실적 진리를 천국신앙으로 호도한 기독교 역시 부활을 말할 자격을 잃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5.
이어진 글, “세월호 참사, 神은 죽었다. 나의 내면의 神은 이렇게 말한다.”는 본 책에서 가장 공들여 쓴 논문인 것 같다. 주지하듯 세월호 참사는 한국교회의 회복불가능성을 결정적으로 각인시킨 사건이 되었다. 참사원인을 알려는 사람들의 감각과 의식을 세사 밖으로 호도했으니 말이다. 교회에 대한 세월호 유족들의 절망은 극에 달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회 밖의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저자는 유족들을 절망으로 이끈 ‘그런 신의 죽음’을 선언했다. 세월호 현실에 무능력과 불가능을 들어낸 한국교회의 신앙양식을 뿌리부터 고민해보자는 취지였다. 인습화된 교회로부터 생명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면 용기 있게 교회를 떠나도 좋다고도 했다.
세월호 以後시대를 살면서 저자는 니체의 다음 말을 神의 언어로 들을 것을 권유한다. 정직한 기독교인이라면 ‘상당 기간 동안 기독교 없이 생활할 의무가 있다.’고. 여기서 저자에게 에티 힐레줌이란 한 유대인 여성의 이야기가 중요하다.(각주 1) 유대인 수용소 생활을 경험하면서 그녀는 군림하는 타자로서의 하느님, 명령하고 기적을 행하는 神, 나아가 인간 요구에 응답하는 존재로서의 절대자를 만날 수 없었다. 대신 그녀 자신의 내면 깊은 목소리, 곧 또 다른 자신으로서의 神을 체험했고 그 神은 참혹한 야만의 현장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도록 자신을 이끌었다. 무능력한 神을 돕는 또 다른 神이 인간 내면에 살아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절망의 순간에도 힐레줌은 자신에게서 탄생된 내면의 신을 만나 자신을 지켰고 이웃을 도울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갖고서 그녀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순간까지 이타적 삶을 살아냈던 것이다. 그 기록들이 묶여져 『사유하는 가슴(Das denkende Herz)』이란 책으로 출판되었다.
여기서 저자는 세월호 어머니들을 다시 생각한다. 나날이 포로수용소처럼 절망의 연속이겠으나 이런 하느님을 발견하여 끝까지 인간다움을 포기치 말고 역사 발전을 위해 짐을 져 줄 것을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이런 전제하에서 저자는 세월호 以後의 교회像을 교회로부터 내몰린 어머니들을 위해 제시하였다.
첫째는 사실적 진리를 밝히고자 삶과 배움 그리고 투쟁을 함께 하는 인간성을 위한 학습 공동체를 만들라 했다. 노들 장애인야학이 구체적 본보기로 예시되었다. 둘째로, 유족들 원하는 방식으로 투쟁의 방식을 정하라고 권했다. 외부적 강제가 아닌 유족들 원하는 방식의 삶을 살아냄으로써 세상과 맞서라는 것이다. ‘우리들 일상이 세월호’인 현실에서 이에 저항하는 지난한 삶이 지속될 터인데 삶을 살면서 싸우라는 뜻이겠다.
마지막으로 지금과 다른 세계로의 구원은 없고 다만 지금과 다른 삶이 있을 뿐임을 강조했다. 세월호 以後의 삶이란 천국이 아니라 함께 새로운 탄생을 위해 ‘하루씩’ 잘 살사는 삶 그 자체란 것이다. 하여 저자는 안산에서 이뤄지는 아버지들의 목공예, 어머니들의 합창활동 등을 대단히 중시 여겼다.
6.
본 책 중반 부에 실린 “세월호, 고통 속의 빛, 영생에 대하여”는 희생된 304명 학생들의 죽음 이후를 염려하며 쓴 글이다. 저자는 이글에서 죽으면 정말 끝일까를 심각하게 되물었다. 인습화된 부활, 천국 신앙으로 이후의 삶을 보장받았다는 확신을 갖는 것으로 족할지를 다시 질문한 것이다.
허나 여성신학자로서의 저자는 이를 부정했고 죽음 후의 영생의 의미를 새롭게 다시 캐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마음을 온전히 공감했기에 가능했던 여성 신학적 결과물이다. 유가족들의 육성 기록 『금요일에 돌아오렴』을 수없이 읽으며 어머니들의 절규에 담하고 싶었던 것이다.
“... 우리 딸 없는 세상에서....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없어요. 내 목숨 내가 어쩌지 못하니 살긴 하겠으나 진짜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다니...” 그래서 저자는 이런 어머니들에게 몸의 끝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님을 애써, 힘껏 그리고 새롭게 말해야만 했다. 하느님 존재와 정의의 물음을 죽음이후의 문제와도 연결시켜야 했던 것이다.
어머니 자궁을 벗어나는 것이 삶과 동시에 죽음이듯이 우리들 죽음 또한 새로운 삶일 수도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했다. 어미의 좁은 산도를 순조롭게 지나는 이가 있는 반면 난산(難産)을 통한 출생도 있는 바,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을 난산을 통한 하늘나라 입성으로 이해하자는 제안이다.
▲ 이은선 교수가 저술한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 ⓒ동연출판사 |
하지만 저자는 이에 머물지 않았다. 성서 속 부활 논쟁을 해석하면서 죽은 자가 아닌 산자의 하느님이란 말뜻을 새롭게 물은 것이다. 즉 산자의 하느님이란 말을 몸 적 개체성에 대한 집착마저 내려놓으라는 명(命)으로 이해했다. 너와 나를 나누는 몸 적 경계로서의 개체성 역시 죽은 틀에 대한 고집이란 것이다.
하지만 몸에 대한 집착, 더욱 난산(難産)을 경험한 몸은 천국에 대한 집착을 강화시킨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다수 어머니들 역시 천국서 죽은 아이 보는 것을 최상의 소원으로 여기며 현실을 버틸 정도로 말이다. 저자 역시 어머니들에게 자신의 생각이 무리일 수도 있겠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개체성 포기야 말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산자의 하느님 명령인 것을 역설한다. 재훈 어머니의 증언을 통해 이런 부활이 내세 뿐 아니라 지금 이곳서 실현된 것을 본 까닭이다. “... 그의 시간 속에서 재훈이와 재훈이가 아닌 아이들의 경계가 희매해 졌다. ‘우리 애’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 애들’의 이야기가 되고, 떠난 아이들을 말할 때 그것은 또한 어느 새 우리들 옆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된다...”
이 말을 저자는 홀로코스트를 세상에 전한 작가 엘리 비젤의 말로써 다음처럼 풀어냈다. “자신의 삶과 활동은 자기 부모와 조상들이 삶의 온갖 고통 속에서도 죽음이 아니라 삶을 마지막 언어로 선택한 전통을 따르는 것 뿐”이라고 말이다. 자식뿐 아니라 하느님마저 살해되는 경험 속에서도 하느님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는 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후자의 하느님은 자기 내면에서 찾은 존재일 것이다. 이것을 저자는 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이자 산자의 하느님을 따르는 부활신앙이라 여겼고 유족들에게 이런 믿음이 전해지길 바랐다. 아니 어머니들을 이미 이런 믿음의 화신(化身)들이라고 믿었다. 엄마들이야말로 생명운동의 전사(戰士)들인 까닭이다.
7.
본 책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 후반부에는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3편의 글이 실렸다. 1주기로부터 3주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 때마다 한편씩 글쓰는 고통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위 책은 4주기를 위한 책이 된 셈이다.
각 글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세월호 참사와 우리 희망의 근거”, “부활은 명멸(明滅)한다-4.16일, 세월호 2주기의 진실을 통과하는 우리들”, “한국 생물(生物)여성 영성의 신학”. 이들 세 글들은 모두 세월호 현장에서 발표된 신학적 설교 문들이기도 하다. 여성신학자로서 세상을 향해 세월호를 증거 했던 결과물이다.
본고의 내용들은 앞선 글들을 상황에 맞게 발전적으로 부언한 성격을 지녔다. 이전 글들 보다는 신학적 체계를 더욱 온전히 갖췄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필자는 특별히 두 번째 글의 몇 대목을 소개하고 싶다.
저자는 거듭 사실적 진리가 정치에 의해 부정당하는 현실을 생지옥이라 표현했다. 그럼에도 이런 생지옥을 거치면서 신(神/信)을 증거 한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한다. 이런 일을 가능케 하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이고 내면의 신을 찾은 사람들인 탓이다.
그래서 저자는 반문한다. “그런데 교회는 어떠했는가?”라고. 불행히도 교회는 神을 잃고 믿음을 저버린 집단으로 전락했다. 반면 세월호 가족들과 김관홍 잠수사와 같은 이들로 인해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움트기 시작했다. 생지옥의 현실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유가족들로 인해 중보자 없는 새로운 공동체(信)가 시작된 것이다.
평범했던 사람들이 난공불략의 불가능성에 맞서는 주체적 사람으로 변한 것, 오로지 사실적 진리만을 위해서 그리 된 것은 우리 시대의 믿음(信)이야기이자 신(神) 담론으로 공히 자리 매김 될 것을 강조했다. 이런 전환은 인습적 神을 무색케 하며 교회 밖 구원의 산 증거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본 책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점을 강조했다. 확산되는 거룩 곧 ‘성(聖)의 평범성’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이를 일컬어 명멸(明滅)하는 부활이라고도 하였다. 이 말로서 저자는 부활의 유일회적 실체화 그리고 절대적 미래화에 방점을 둔 정통 신학과의 갈등을 말한다. 육을 부정하는 영적 차원으로서의 부활 개념도 배격하면서 말이다. 부활의 사사화(私事化), 그 공적(公的) 차원의 탈각을 염려한 결과이다. 그럴수록 저자는 부활은 단 한 번에 완성되거나 실체화될 수 없다고 강변한다. 지금 이 생(生)안에서 각자의 삶으로부터 과거와 미래 사이에 난 길을 매 순간 걸으면서 몸으로 체험되는 부활만 있을 뿐이라 했다.
실제로 세월호 유족들은 생지옥을 통과하며 지금 이곳서 여러 방식으로 아이들과 만났다고 고백하였다. 부활은 목숨을 건 기나긴 여정의 산물이다. 지금 이곳서 진실행위를 지속하는 과정속의 부활이 있을 뿐이다. 이런 부활을 저자는 ‘성(聖)의 평범성’과 일치 시켰다.
따라서 부활은 의당 공적(公的)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부활은 한 사람에 의해 이뤄질 수 없다는 뜻이다. 모여 사는 일이 인간사(人間事)인 이상 부활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필히 존재한다. 이를 저자는 다중(多衆) 그리스도란 말로 풀어냈다. 예수만이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 자녀란 뜻을 담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부활의 사람들은 항시 변방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본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종교(신앙)인이라면 소수자로 살 것을 강조했다.
8.
이제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 마지막에 이르렀다. 말한 대로 저자는 세월호 참사 4주기를 앞에 두고 소수자의 거룩함(聖)을 천명했고 그 본분(性)을 말했으며 그로인한 세상의 변화(誠)를 염원하였다. 그에게 소수자란 본래 예수였고 전태일이었으며 세월호 유족들이자, 지금도 변방인 취급당하는 뭇 존재들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들 소수자들에게 상상, 환상하는 일을 맡겼다고 저자는 믿었다. 바른 상상을 통해 지금껏 보지 못한 것을 옳게 다시 보게 하는 일이 이들의 몫이란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 기존의 잘못된 상상과 맞서는 일은 필연적이다.
하여 저자는 소수자를 고독과 저항의 사람이라 정의하였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소수자, 국외자가 되는 길을 신앙의 이름으로 택하길 소망했다. 그리고 이런 소수자들을 돌보고 환대하는 공동체를 교회라 믿었다. 이런 소수자들을 안전하게 품을 수 있는 공동체가 과거 ‘소도’이자 지성소였음을 동서(東西)가 증언하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교회는 우리 시대의 소수자, 변방 인들을 밖으로 내쳤다. 성소수자들을 배척하고 악마 시 했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 큰 상상하는 이들을 내몰고 적대하는 일에 앞장선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향해 사람들은 ‘이것이 공동체인가’를 물으며 서로들 교회로 부터의 일탈을 권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저자는 책 말미 인터뷰 기사를 통해 ‘새로운 신학과 공동체를 인양하라’고 소리쳤다. 정작 교회가 ‘세월호’인 것을 모르는 교회의 눈먼 현실을 아프게 지적하면서 말이다. 세월호 以後 어떻게 새로운 신학을 논할 수 있을까? 세월호 以後 어떤 공동체를 세울 것인가? 다시 말해 세월호 以後 크리스챤으로 사는 모습이 어떠한 지를 본 책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세월호 以前의 전통적인 ‘답’으로 회귀하는 것은 분명 기독교를 죽음의 종교로 이끌게 될 것이다. 니체가 말한 ‘얼마동안’이 아니라 아주 긴 세월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자연스레 떠나게 만드는 악수(惡手)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본 책을 통해 묻고 싶다: 이러한 여성신학자의 도전이 부담스러운가? 일리(一理)있다 여긴다면 이제부터 ‘답’이라 여겼던 우리들 교리부터 진지하게 다시 토론해 볼 일이다.
독일서 아우슈비츠 以後신학이 생겼고 전후(前後) ‘슈투트가르트 고백문’이 나왔듯이 우리 역시 세월호 以後 신학을 우리 식으로 솔직하게 논할 시점이 되었다. 이를 위해 슈투트가르트 고백문 일부를 옮기는 것으로 독후감을 마감한다.
“...우리는 좀 더 용기 있게 고백하지 못했고, 좀 더 진실 되게 기도하지 못했으며, 좀 더 기쁜 마음으로 믿지 못했고, 힘써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한 것을 참회 한다...” 저자라면 이 고백문서에 다음 말을 덧붙였을 것 같다. ‘더욱 우리들(한국적) 방식으로, 여성적으로 생각하고 믿지 못한 것을 회개 한다’고 말이다.
각주 |
(각주 1) 이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울리히 백, 『자기만의 신』, 홍찬숙 역, (도서출판 길 2013)에 더 소개되어 있다. |
이정배 ljbae@mt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