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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어떻게 복음주의를 재형성시키고 있나

기사승인 2018.03.17  00:4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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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 Still Evagelical에 대한 서평

소위 SNS에서 이웃으로 지내고 있는 이정필(Jungpil Lee)님의 타임라인에 흥미로운 글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The Atlantic(https://www.theatlantic.com)이라는 인터넷 신문의 “How Trump Is Remaking Evangelicalism”(트럼프는 어떻게 복음주의를 재형성시키고 있나)라는 기사를 완역한 글이었다. 소위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어 당선된 것으로 회자되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로 인해 복음주의 진영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한 책(Still Evangelical?)에 대한 기사였다.
이에 편집자는 이정필 님께 연락을 취해 번역본을 개재할 수 도움을 요청했고 동의를 얻어 개재하게 되었다. 편집자가 이 기사를 주목하게 된 것은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탄생에 큰 밑바탕이 된 한국 개신교의 변화를 예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서였다.
기사 원문은 <How Trump Is Remaking Evangelicalism>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다.
다음은 이 기사를 번역하게 된 동기와 자기소개이다. 번역 기사를 허락해 주신 이정필 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제가 중앙일보와 문화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지만 떠난지 17년이 됩니다. 이후부터는 계속 조그만 사업을 하는 중입니다. 블로그(www.jpthegreenfuse.com)를 하나 만들어서 3년 정도 운영했지만 그것도 손을 안 댄지 5년이 넘었네요. 갑자기 3년전에 회심한 기독교인이 된건데, 저도 저 자신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네요.^^
기독교로 회심 후 “복음주의”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용어적으로는 초대교회와 종교개혁 당시를 아우르는 시대적 의미가 달랐고, 20세기 후반에는 북미 개신교의 한 종파로 사용되어 더더욱 혼란이 컸습니다. 애틀랜틱의 최신 기사를 대하면서 “복음주의”는 여전히 난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트럼프 시대 미국 복음주의는 위기이자 기회임을 주장하는 이 기사가 흥미로웠고 그래서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가을 학기 프린스턴 대학의 기독교 학생들은 자신들의 동아리 명칭에서 “복음주의”(evangelical)란 단어를 삭제했다. The Daily Princetonian(데일리 프린스토니언)의 기사에 따르면 이 동아리의 책임자(director)인 윌리엄 보이스는 “이 단어(복음주의)가 갈수록 혼란스럽고 어감도 와 닿지 않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삭제 이유를 밝혔다.

이러한 추세는 미국의 수많은 기독교 엘리트 단체들 가운데서 소리 없이 퍼져가는 중이며 자칭 “복음주의자” 백인들의 지지로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 시대가 시작되면서 더욱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엘리트 기독교 지도자들이 출간한 “Still Evangelical?”이 주목을 받고 있다.) 남가주 소재 바이올라 신학대학의 앨런 예 교수는 이 책에서 “복음주의 기독교가 부정적 여론에 직면해있다.”고 단언한다.

▲ 한 여성이 라스베가스의 한 교회 예배 중에기도하고 있다. 라스베가스는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 운동을 중단했던 곳이다. ⓒCarlo Allegri / Reuters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래 “복음주의”라는 단어는 많은 논란을 키우면서 “보수적 기독교”와 “우익 종교”와 같은 다른 광범위한 용어들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결속력 있고 강한 영향력과 단단한 기반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항상 정치적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으며 모두가 쉬쉬하지만 두말할 필요 없이 백인 주류 집단이다. 안타깝게도 원래 의미와 동떨어진 것이지만 작금의 추세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주의자들이 서로를 어떻게 정의하든 복음주의는 앞으로 그 의미가 어떻게 인식되고 어떻게 불릴 것인가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따를 것이다.

“Still Evangelical?”는 현재 직면한 복음주의 정체성 위기와 관련해 새로운 개념을 정리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모두 잘 알려진 목사들이며 신학자들이고 교계 지도자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모두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저명인사들이지만 그들은 누구도 주류 언론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일그러진 복음주의만 계속 양산해내는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칭 복음주의자라는 기독교인들과 분명히 구분된다. 그들은 엘리트 집단이며 스스럼없이 진보적인 아이디어를 내새운다. 심지어 복음주의 교단의 논란거리가 되기도 하는 여성 목회자도 포함됐다. 비록 밑바탕은 강고한 보수주의자들이지만 트럼프를 지지하는 집단은 아니다. 이들은 지난 대선 당시 같은 기독교 형제자매들의 트럼프 지지로 인해 혼란에 빠진 기독교인들이다. 사실상 기독교의 변두리 인물이라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복음주의의 다양성을 반증하는 집단이다. 그들의 주장은 흔히 언론에 의해 획일적으로 보도되는 기독교 기사에 반해 더 넒은 범위와 깊이를 제공한다. 둘째 그들이 생각하는 복음주의는 복음주의가 나가야할 미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Still Evangelical?”에 담겨있는 한편 한편의 에세이는 현재 교회와 종교집단에 대해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현 상태의 기독교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미국의 진정한 복음주의”가 트럼프 시대의 혼돈 속에서 살아남는다면 결과론적으로 “여전히 복음주의자”(still evangelical)이기 때문이란 것에 동의한다. 그래서 돌아보면 “트럼프 시대는 (복음주의의) 변화를 위한 시련의 시기”였다고 내다보는 것이다. 현재 역시 복음주의자들의 지지로 당선된 트럼프가 미국정치를 재정의 하든 트럼프 시대는 미국 복음주의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복음주의자들은 규정하기 어려운 집단으로 잘 알려져 있다. 수많은 여론조사 기관들의 출구조사는 “당신은 스스로를 거듭난 혹은 복음주의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단 한 줄의 질문으로 조사 대상자의 복음주의자 여부를 판단한다. 이것은 대상자를 더 혼란에 빠트리는 질문이다. 이 질문의 답은 개신교도들과 가톨릭 신도들을 뒤섞어버리고 각기 다른 다양한 교단의 문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미국 역사속의 비백인 교회들의 특수한 차이점을 희석시킨다. 가장 최근에 실시된 Pew Religious Landscape의 조사에 따르면 특정 믿음과 예법, 그리고 기원을 공유하는 교회들과 교단, 6천2백만에 달하는 남부 침례교, 오순절교회, 비교파 기독교인들을 폭넓은 의미에서의 “복음주의자”라고 한다.

“Still Evangelical?”의 대다수 저자들은 복음주의를 신학자 데이비드 베빙턴이 주장한 “사각형”(4가지 특징) 이론에 의지한다. 베빙턴은 1989년 자신의 저서를 통해 복음주의자들은 ▲ 성경의 진리를 믿음의 중심에 두고, ▲ 십자가에서 희생된 예수의 용서에 집중하며, ▲ 회심 또는 구원의 경험을 강조하며, ▲ 세상을 향한 복음전도와 구제활동을 믿는다고 정리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또 세상이 그들을 어떻게 보는가로도 정의되며 2016년 미국대선 이후로 이 같은 정의는 특히나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 통계는 지난 1년 반 동안 계속해서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81%가 트럼프 지지자라고 말하고 있다. 재혼을 지지하고 카지노 도박 사업을 지지하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비종교인 뿐만 아니라 같은 기독교인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Christian Daily의 편집장 마크 갈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와 같은 대다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얘들 뭐하는 인간들이야’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며 트럼프 지지한다는 복음주의자들과 우리는 다르다.”

주류 언론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을 설명하는데 복음주의 속의 다양성을 간과했다. “Still Evangelical?”의 톰 린은 “소위 언론의 기름부음을 받은 ‘복음주의 리더’라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복음주의의 경향을 한가지로 정의하긴 어렵다. 복음주의 교회들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중앙으로부터 분산화 됐고, 특정 이름으로는 불리는 것을 주저한다. 1980년대 유력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미디어가 상상하는대로 자신들을 분류하는 것을 내버려둬 왔으며 그 그룹에 속하지 않으면 교회 플랫폼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 운동가 셰인 클레어본은 “Still Evangelical?”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 사회 많은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주의자들은 하나의 그룹으로 조명되고 정의됐고 백인 남자와 그들 문화에 의해 점령당했다. 사실 흑인계, 라티노계, 아시안 계, 인디언 계, 노년층과 젊은층 그리고 여자와 남자 등등 각기 서로 다른 색의 구성요소가 폭넓게 담겨있는 게 복음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언론은 이런 요소를 계속해서 무시해왔다.”

언론이 조명하는 복음주의자의 의미가 그들의 편견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클레어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들(언론)에게 총과 탄약을 줬다.”

대략 6천2백 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포괄적 의미에서의 복음주의자로 규정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이들은 신학적으로 인종적으로 그리고 정치적 입장에서 깊은 차이점을 갖고 있다. 이런 차이점들이 트럼프 이전까지는 그럭저럭 잘 지내왔다. 그러나 현재 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이들 사이의 갈등이 시작됐다. 갈리 편집장은 “복음주의자들 내부의 좌, 우파는 서로에게 당혹감을 드러내고 있다.”며 “그들은 현직 대통령의 행태 때문에 서로에게서 거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Still Evangelical?”의 저자들 중 상당수는 자신들이 정의하는 “근분주의자”로부터 “복음주의자”를 분리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여기서 “근본주의자”는 현재의 세속적 세상에 동화되길 거부하며 춤과 음주 도박 등을 금하는 것을 포함해 엄격한 사회 윤리적 코드를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이다. 제리 폴웰, 제임스 돕슨과 같은 종교적 우익 인사들이 이런 근본주의를 지지하는 가운데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기독교에 대해 거리를 두려한다.

덴버 신학대학의 마크 영 총장은 이렇게 말한다. “복음주의는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근본주의를 대신하는 것으로 부상했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복음주의 운동은 당시의 문화와 맞물려 더 지혜롭고 정통한 주류 개신교 운동으로 알려지길 원했다. 근본주의 교회들과 교파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반면 풀러 신학대학의 마크 레버튼 총장은 근본주의는 보수적 기독교인들 사이에서의 과도한 당파적 정치색을 넘어서게 한 근원이며 이 때문에 트럼프가 당선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근본주의는 신학적 매력을 갖고 있으며 사회적 순수성은 신학적 이념 속에 쉽게 녹아든다.”며 “복음주의가 정치권의 일부로 부상하거나 부상하길 원하면 원할수록 더 많은 복음주의자들로부터 외면 받는다. 이는 기독교 정통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지키고 방어하기 위한 행동이다.”고 근본주의를 대변한다.

현실 정치판에서 기독교인의 역할을 놓고 논쟁하는 것이 새로울 것은 없다. 복음주의는 본질적으로 밖으로 나아가길 원했고 정치적 활동은 그 역사가 깊다. 이들의 “행동주의”는 결국 베빙턴의 “사각형” 이론에서도 잘 설명되고 있다. 리버티 대학의 카렌 스월로우 프라이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복음주의자들은 낙태와 교육개혁, 성경적 결혼관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복음주의자들과 트럼프의 논쟁을 보면 이들이 과거를 망각하는 것처럼 보여 안타깝다. 결국 복음주의는 그 자체가 21세기 미국의 복음주의 전체를 보여주는 듯하다.”

“Still Evangelical?”의 많은 저자들은 지금 이 시대를 일종의 지렛대로 보는 듯하다. 마치 정치와 복음주의자들의 관계가 재설정되는 것 같은 입장이다. 달라스 제일침례교회 로버트 베프리 목사 같은 이는 폭스 뉴스에서 트럼프 옹호자를 자처하며 당파적 색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폭스 뉴스의 션 해니티를 자신의 교회에 초청연사로 세우기도 했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은 우파 기독교인들과의 거리를 두기 위해 아예 정치무대를 외면하려 한다. 자신들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지나치게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을 피하려는 것이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생활에 정치 참여 행동을 중요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갈릴 편집장은 “대다수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예수의 사람들로 여긴다.”며 “그들은 항상 부부생활과 부모로서의 역할에 전념하며 아이들을 사랑하고 열심히 정직하게 살고자 하고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과 주일 학교나 푸드 서비스 봉사를 나가길 원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수혜자의 여유다. 선거 결과에 대한 백인 교회와 이민자 기독교 공동체의 입장은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UCLA 차오 로메로 교수는 “라티노 공동체가 느끼는 분노는 너무나 크며 이런 느낌을 대다수 라티노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상대적으로 박탈감과 고통을 느끼는 라티노 공동체에 대한 복음주의 교회들의 무감각한 언행에 상처를 받는다.”며 “예수를 머리로 가진 지체들이 받는 고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라티노 공동체 일원들은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라티노 공동체는 트럼프 지지자(백인 복음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승리의 느낌을 전혀 공감할 수 없다.

시카고의 은혜와 평화 커뮤니티 교회의 산드라 마리아 반 오스탈 담임목사는 “내가 돌보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히스패닉이다. 이들은 그들(백인 복음주의자)의 성경 속에서 사라진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트럼프가 만들어낸 인종 갈등이 교회를 더욱 분열시키고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본지(애틀란틱 4월호 커버스토리)의 마이클 거손 기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불편한 현실이 존재한다. 나는 복음주의자들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들은 인종차별주의가 미국 대통령의 결격사유가 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이며 그들에게서 도덕적 우선순위가 어떤 것인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Still Evangelical?”의 저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백인주류가 아닌 다인종 교회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2007년부터 2014년 사이 미국 가톨릭과 주류 개신교 그리고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미국의 라티노(히스패닉)계는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퓨 조사에 따르면 종교에 관심 없다고 말하는 백인들이 흑인계나 히스패닉 계 보다 더 많아진다고 한다. 100년 전 북미·유럽·호주 대륙이 전세계 기독교를 주도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는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미국의 수많은 백인 주류 교회들은 뒤쳐지고 사라져가고 있다. 반면 다인종 교회와 이민자 교회들은 성장세를 보이며 더 깊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Still Evangelical?”의 저자들은 백인 문화를 반영하는 서구 버전의 기독교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 오스팔은 이렇게 설명한다. “신학대학에서 나는 유니버셜 신학 헌신자들이 백인 복음주의자들인 것을 알았다. 이 헌신자들은 항상 외국어 번역 일을 하며 다른 나라에 교회와 신학대학을 세우며 교수들을 파송하고 글로벌 기독교를 가르친다. 이런 헌신자들이 글로벌 교회로부터 나오는 것을 아직 본적 없다.”

교회내 인종차별주의 확산의 원인이 트럼프의 선거결과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노스 파크 신학대학의 나성찬 교수는 “21세기 다인종 복음주의자들은 모두가 말하는 복음주의자 타이틀을 얻기 위해 수차례의 시련을 겪었다. 백인 기독교인들은 차별받는 다인종 복음주의자들을 향해 지원군 행세를 하지만 그 차별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모든 자아성찰과 비판으로부터 나타나는 복음주의의 모습은 하나의 커다란 분열상을 상징한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복음주의자들이 한 유형으로 묘사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 때문에 예수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줄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한다. 그들은 복음주의 정체성에 위기가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이런 문제의 위급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고민하는 기독교 지도자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갈리 편집장은 크리스천 투데이의 한 독자가 반트럼프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반박문을 소개했다. “그들(반트럼프 복음주의자)은 지멋대로이고 잘난척하는 거만한 사람들이다. 자신들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81%의 복음주의자)을 비성경적이고 매너 없고 교회를 모른다고 치부한다. 그래서 지들처럼 잘나고 지적인 사람들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야 말로 자기 주제를 넘어섰다는 것을 모르는 집단이다.”

트럼프가 만들어낸 비상식적인 상황 속에서 복음주의가 재탄생을 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2015년 퓨 조사에 따르면 56%의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이 스스로를 공화당원 또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타났다. 이는 몰몬교도를 뺀 나머지 종교그룹 중 가장 높은 수치였다. 복음주의 내의 소수파 리더들이 진보적 시각을 드러내는 가운데 그러한 진보적 운동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Still Evangelical?”의 집필진 중에서도 일부 반트럼프 성향의 저자들은 그런 진보적 신앙 운동이 미래의 복음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믿진 않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변화를 꾀하고 있다. 지금 그들과 그들과 생각이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복음주의 정치 참여 운동과 정체성, 그리고 내적 성찰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시도하고 있다. 진보적 복음주의 매체에서 활동했던 리사 샤론 하퍼는 이렇게 말한다. “빈약한 정치력과 내부 갈등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은 백인 보수주의자들에게 세상 모든 것, 모든 사람을 가지려 하지 말고 신이 되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신다.”며 “하나님은 그저 사랑하는 모든 인류에 합류하라고 하신다.”고 말한다.

반 오스팔은 이렇게 덧붙인다. “영적으로 죽어 나가는 백인 복음주의자들 살리기 위해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할 의향은 없다. 우리는 다 죽어야 하고 죽게 된다. 우리에게는 죽음에 이은 부활이 필요하며 그렇게 해서 부흥이 이뤄진다!”

Emma Green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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