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주일에 벌어진 한국교회의 참사
▲ 10.27 광화문 기도회의 기조는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였고 차별과 혐오가 난무했던 정치집회였다. ⓒ연합뉴스 |
지난 10월 27일은 종교개혁 507주년 기념 주일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격문을 발표한 날을 기억하여 그 뜻을 기리는 주일이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개혁의 의미는 단지 새로운 종교로서 개신교가 탄생했다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를 여는 중요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신앙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각성은 놀라운 종교적·사회적 변화를 초래하였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가장 중심적인 사상의 원리는 사도 바울이 역설했던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로마 5:1)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원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가 일관되게 선포하는 정의의 원리를 함축한다. 그것은 기존의 체제가 보장하는 모든 자격을 철폐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자격이 결정되는 현실, 소유 여부 또는 능력의 정도와 업적 여부에 따라 자격이 결정되는 현실을 부정한 것이다.
그 대신에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의 길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누구에게나 마땅한 삶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뜻한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그 하나님의 정의가 이뤄진 세계의 현실을 명료하게 말해준다. 그 어떤 차별도 없는 정의로운 세계이다.
종교개혁은 그렇게 놀라운 진실을 환기하며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을 새롭게 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정신은 폐기되었고 교회는 또다시 위기에 처했다. 교회는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공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대신 자기의에 따른 공로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에 다시 사로잡히고 말았다.
2024년 10월 27일(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한국교회 2백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는 그렇게 타락한 교회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여 주었다. 그 기도회가 제시한 100가지 기도 제목을 관통하는 하나의 열쇠 말은 ‘차별금지법 반대’였다. 모든 사람이 존엄성을 보장받는 공평한 세상을 지향하는 법을 반대하자고 광장에서 대규모 인원이 집회를 연 것이다. 도대체 그런 교회를 세상이 어떻게 바라보겠는가?
취지문과 기도문을 보면, 그 기조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모든 성평등의 논리를 불온한 것으로 여기는 가부장적 가족주의, 적대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냉전논리의 반복 강화, 다양한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정죄하는 혐오주의, 출산율의 저하를 젊은이들의 잘못된 삶의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기며 구조적 차별과 폭력을 외면하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사실상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을 뿐 구조적 인식을 결하고 있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심각한 차별주의적 편견을 서슴없이 보여 주고 있다. ‘돈 모아 도와주자’는 방안 외에 뚜렷한 대책이 없어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가 불의한 윤석열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겠다는 의지를 부끄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이 임명됨으로써 국가인권위원회가 그동안 우리 사회에 저질렀던 수많은 악행을 하나하나 되돌리게 하시고...”(27), “자유민주적 통일의 방향성을 설정한 8.15 통일 독트린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대내외적 환경을 조성하시고...”(90) 하는 대목에 이르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그 집회를 주도하는 이들의 염치없는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그 기도 제목들은 한마디로 줄여 말하면 철저하게 각자도생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경쟁주의 원리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은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결국 각자가 자기 경영의 주체가 되어 삶을 헤쳐 나가라고 강요하는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에 기반해 있는 것이다. 굳이 일말의 선의를 헤아려 본다면, ‘열심히 사십시오. 교회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도일까? 선의로 깔아놓은 길이 지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 서양 속담을 곧바로 연상하게 한다.
오늘 우리는 모든 생명에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세계, 이 땅의 유력한 교회들과 그 지도자들마저 그 불의한 세계와 영합하여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현실 가운데 있다. 그 교회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종교적 열정과 헌신을 강조하고 있다. 가증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성회로 모인다 한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아모 5:23). 그 말씀의 뜻을 망각해 버린 한국교회에 과연 어떤 희망이 있겠는가? 소 여물통에 드러누운 개꼴에 우리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최형묵 소장(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chm1893@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