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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를 보고 돌이 되지 않는 방법!

기사승인 2024.09.13  02:4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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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절 셋째주일/남신도회주일/한가위감사주일(출 20:1-17 롬 2:17-29 눅 7:36-50)

1. 메두사의 웃음?

오늘은 창조절 셋째주일이자 남신도회주일입니다. 이번 주에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한가위)이 있으니 한가위 감사주일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추석과 남신도회주일은 묘하게 긴장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남성들에게는 추석은 먹고 마시는 날이자, 가족을 만나는 기쁨의 시간이지만, 여성들에게는 음식 준비하고 설거지하는 날, 가족을 만나서 더 힘든 시간이 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페미니즘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번 202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철학자 세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출신은 다릅니다. 뤼스 이리가레(벨기에), 줄리아 크리스테바(불가리아), 그리고 엘렌 식수(알제리)입니다. 글쓰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입니다. 오늘 제가 소개하려는 학자는 엘렌 식수(Hélène Cixous)입니다. 그녀는 『메두사의 웃음』(1975)을 통해 ‘여성적 글쓰기(I'Ecriture féminine)’를 페미니즘 실천 전략으로 제시합니다. 그녀의 말을 들어볼까요? “메두사를 보기 위해서는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메두사, 그녀는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는 웃고 있다.”

▲ 피터 폴 루벤스 <메두사>(1618)와 엘렌 식수의 책 표지

메두사(Μέδουσα)라는 이름은 메두(Μέδου)라는 ‘지배와 보호’라는 뜻에 여성이라는 뜻의 사(σα)가 결합 된 이름입니다. 이러한 메두사 신화는 잘 아실 겁니다. 그녀를 쳐다보면 누구나 돌이 된다는 그리스의 괴물(?)입니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는 여성이 거세되었다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페르세우스와 메두사의 신화를 선택합니다. 그의 논문 「메두사의 머리」(1922)에서 그는 몸부림치는 뱀으로 이루어진 머리카락이 달린 메두사의 머리를 거세된 여성 성기의 상징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메두사에 대한 공포는 ‘거세 불안(castration anxiety)’을 상징한다고 주장했는데, 남자아이가 성인 여성의 성기를 보고, 성인 남성의 성기(남근)가 없다는 것에서 느끼는 공포라고 해석했습니다. 곧, 여성에게 남근이 거세되었기 때문에 공포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엘렌 식수는, 사실은 남성이 여성에게 거세의 상상적 힘을 부여했기 때문에 여성을 공포스럽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엘렌 식수는 프랑스의 해체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로고스중심주의(이성중심주의)’ 논의를 받아들여 거꾸로 뒤집습니다. 로고스중심주의가 남근중심주의(쉽게 말해 남성가부장제라고 보시면 됩니다)를 낳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남근중심주의가 로고스중심주의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식수가 보기에 남근중심주의는 ‘여성성’이라는 미지의 대륙에 대해 남성이 느끼는 두려움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메두사의 웃음』에서 엘렌 식수는, 메두사의 얼굴을 보는 자를 모두 돌로 만드는 ‘메두사 신화’가 남성의 두려움을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모계제 혹은 여성성에 대한 두려움이 남근중심주의, 곧 가부장 질서를 낳고, 이 남근중심주의가 로고스중심주의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서구 역사에 있어서 남성/여성, 이성/감성, 서양/동양, 백인/유색인, 중심/주변(혹은, 제가 첨가하자면 예루살렘/갈릴리, 유대인/이방인)에서 전자의 후자에 대한 우월성을 낳았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입니다.

2. 여성적 글쓰기

결국, 이 로고스중심주의적 이분법을 깨뜨려야만 여성이 남성의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엘렌 식수는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녀는 라캉에게서 얻은 ‘상징계’라는 통찰을 더 합니다. 라캉의 상징계는 언어로 이루어진 ‘상징적 질서’, 곧 우리가 사는 기존 ‘가부장 질서의 세계’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 로고스중심주의는 이러한 가부장적 상징계의 언어 구조 안에서 작동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죠? 따라서 남근중심주의/로고스중심주의를 깨뜨리려면 상징질서, 곧, 언어 질서를 바꿔야 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여성적 글쓰기’입니다. 이러한 여성적 글쓰기는 남성적 언어 구조를 바꾸는 실천 전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성적 글쓰기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인가요? 식수가 보기에 여성적 글쓰기에는 남성적 글쓰기가 지탱해온 억압적인 질서를 해체하는 해방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기존 전통과 다른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글쓰기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타자성, 곧 여성성을 발견하는 글쓰기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예언이 여성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겠죠? 기존의 억압적인 질서(왕정, 제국주의)를 해체하는 해방의 메시지가 그 안에 내재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식수가 말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은 생물학적으로 규정된 성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성적 글쓰기를 감행한 남성 작가로 식수는 셰익스피어를 거명합니다. 그녀의 말을 들어볼까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전통과는 다른 것을 해낸 시인들이 있다. 사랑을 사랑할 수 있는 남성들, 그래서 타자들을 사랑하고 타자들을 원할 수 있었던 남성들이 바로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한 남성들이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글쓰기는 관습에 저항한 주인공들을 보여줍니다(물론, 이것을 욕망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이 남성들은 자기 안에서 타자 곧 여성성을 발견해 회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는 여성과 남성을 모두 인간으로 해방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아름다운 메두사가 있습니다. 잃어버릴 것이 많은 이들은 메두사를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무수한 권력자, 남성들이 그렇습니다. 무언가가 너무 소중하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 다른 것을 똑바로 ‘보지 않기/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성적 글쓰기를 감행하는 남성은 보기 싫은 것도 열심히 봅니다. 보기 거북하면 물러서서 보고 그리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그것은 고대 세계의 위대한 어머니 여신이자, 지혜의 여신인 메티스(Μήτις, ‘지혜로운 여자’라는 의미)의 딸 메두사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돌이 될까 두렵나요?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남근중심의 상징계를 벗어버리면 돌이 아니라, 참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이번 추석에 이러한 남성 가부장적 질서에 도전해 보세요. 참다운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똑바로 보고 편견 없이 보고 제대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이번 추석에 놀라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세본문 말씀은 남근중심주의의 편견을 살펴보는 말씀입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성에 대한 한 바리새인의 편견과 교회의 왜곡(물론, 이것은 유대 남성들과 전통적인 교회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만)을 들춰냅니다. 그리고 로마서 말씀은, 사도 바울이 율법과 할례라는 색안경을 비판합니다. 표면적 유대인(유대인의 겉모습, 이하 공동번역)과 육신의 할례(몸의 할례) 대신, 이면적 유대인(유대인의 속마음)과 마음의 할례(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받는 참 할례, 이상 공동번역)를 주장하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약 말씀은 남성가부장제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옹호법이 아니라, 약자보호법인 십계명의 참뜻을 소개합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3.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이는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6-38)

오늘 복음서 말씀에 나오는, 한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나 발에 비싼 향유를 붓는 장면은 사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약간씩 다르긴 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베다니 나병 환자인 시몬의 집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마 26:6-13), 마가복음도 비슷하게 내용이 전개됩니다(막 14:3-9). 그러나 오늘 누가복음 말씀은 죄를 지은 한 여인으로 소개됩니다. 또한, 시몬의 집이 아닌 바리새인의 집이고, 머리가 아닌 발에 붓습니다(눅 7:38-50).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나사로의 집에서 그의 여동생인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요 12:1-8).

눈여겨 볼 것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여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데, 요한복음에서만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찬송가 211장은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라고 마리아 이름 앞에 막달라를 붙였죠? A.D. 590년경 교황 그레고리 1세가 누가복음 7장을 설교하면서 이 여인을 “죄지은 여자”이며 “창녀”인 막달라 마리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이후 이 여인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창녀 막달라 마리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라는 증거는 전혀 없죠? 단지, 귀신 들렸다가 나은 여자(막 16:9, 눅 8:2)라고 소개될 뿐입니다. 선입견이죠? 결국, 가톨릭교회도 1969년에 이 해석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였습니다. 따라서 찬송가 가사도 수정해야 하고, 여성에 대한 편견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 찬송가 211장과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한 여인

아무튼, 여인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러자 잔치를 마련한 바리새인이 선입견을 품고 마음에 생각합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눅 7:39)” 그러자 예수님은 시몬에게 예를 하나 들어 바리새인의 선입견을 깨뜨립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눅 7:40-43)

바리새인은 죄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아니, 여인)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선지자인지 아닌지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가요? 사랑이 많고 적음으로 판단이 아니라, 구분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4-47)

초대한 사람은 바리새인인데, 예수님은 시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판단하는 이, 선입견을 가진 이와는 대화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아니면 가르쳐도 알아 듣지 못하기에 말씀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아무튼, 남성중심주의의 상징적 질서에서 죄인으로 정죄 받을 수밖에 없던 여성,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모든 것(향유는 그 당시 값비싼 것)을 드려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혹은 장례를 준비)을 표현하였습니다. 결국, 이 여인은 죄 사함뿐만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의 반열에 들어서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 7:48-50)

그러나 예수님을 초청한 한 바리새인은 죄사함도 구원도 얻지 못합니다.

4. 표면적 유대인과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과 마음의 할례를!

이처럼 우리는 잘못된 상징질서에 속해 있으면서 그것이 왜 그릇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바울, 당시 유대교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과 할례라는 상징질서가 또 다른 편견의 도구가 됩니다. 오늘 로마서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17-24)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선민의 우월성을 주장해 온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특권의식만 강했지, 삶의 수준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육신적인 혈연과 율법적 할례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이 더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본질인지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5-29)

사실 할례는 지금의 포경수술입니다. 이 포경수술인 할례가 왜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특히나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선민사상의 증표이기도 합니다. 즉, 유대인은 할례가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의 증거이고 이것을 행함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할례의식(www.seumi.com)

위 ‘할례의식’ 그림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은 돌칼로 성기 표피를 찢어내듯 잘라낸 할례를 “껍질(껍데기, 형식)을 버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으로 봅니다. 곧,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내용은 버리고 오히려 형식만을 취합니다. 따라서 앞서 서두에서 말씀드린바,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표면적 유대인과 육신의 할례 대신, 이면적 유대인과 마음의 할례를 주장하며 당대 유대교의 형식적 상징체계와 질서를 해체합니다.

5. 십계명, 노예 해방 선언!

구약 말씀인 십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등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명령으로 보지만, 그것은 십계명을 전혀 반대로 보는 것입니다. 앞부분에 나오는 중요한 내용을 읽지 못하니, 그런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1-2).”

이스라엘을 뭐라고 부르나요? ‘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누구에게 주시는 말씀인가요? 종들에게 말씀한 계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종들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합니다. 따라서 1~3계명은 종과 노예를 만드는 ‘제국의 질서’, ‘자본의 질서’, ‘힘과 권력의 질서’는 우상, 또는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이니,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약자들을 위한 당파성의 계명이죠? 자, 이제 1~3계명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생각하면서 함께 읽어 볼까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3-7)

▲ 십계명

이제 제대로 보이나요? 이 세 계명의 약자에 대한 당파성을 제대로 정리해 주는 것이 바로 4계명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6일 일하고 7일째 쉬신 하나님께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강조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계명의 핵심이 안식일을 지키라 했으니 일이 아니라, 인식에 있죠? 그렇다면 안식할 수 없는 이들은 누구인가요? 바로 종입니다. 따라서 이 계명은 종들의 해방선언입니다. 종들도 안식일에는 쉬라는 것입니다. 노예도 인간이니,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안식을 누릴 대상은 지배층뿐만 아니고, 남종과 여종, 문 안에 머무는 객이나 가축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또는 바벨론)에서 노예 생활하면서 그늘 밑에서 부채질하며 쉬던 지배층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 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던 이스라엘 노예들은 쉼이 없었습니다. 주인은 쉬어도 노예는 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은 주인과 노예, 심지어 가축까지 쉴 수 있도록 신경 쓰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명령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언약 공동체에 주신 말씀이 됩니다. 이 말은 대대로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혁명의 말씀이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경건’과 ‘예배’, 그리고 ‘교회 봉사’라는 말씀으로 바뀌어 그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인간관계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신자를 약자인 종, 혹은 여성으로 보면 그 뜻이 명확해집니다. 나이 많아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부모, 죽여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종들, 혹은 그들의 아내나 딸(주인이 간음한다는 것을 전제로), 훔쳐도 죄가 되지 않고 거짓말해도 상관없는 노예들에 관한 보호 말씀입니다. 또한, 출애굽하고 가나안에 정착하여 잘살게 되거든, 혹은 내가 힘이 있다고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하는 것, 이 모든 것을 금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가다듬고 다시 본문 말씀을 읽어 볼까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2-17)

오늘 남신도회 주일과 한가위 주일을 맞이하는 사랑하는 남신도회 여러분! 풍요 속에 빈곤이라고 한 해에서 가장 풍성한 한가위가 오히려 더 서글픈 날이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니 늦은 밤 일과 새벽 배송으로 더 분주한 날을 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한, 추석 음식 장만으로, 남성들 뒤치다꺼리로 허리가 휘어지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메두사가 되어 남신도회 여러분을 돌로 변화시키기 전에 메두사의 웃음을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메두사는 괴물이 아니라, 아름다운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표면적 기독교인이 아니라, 이면적 기독교인이 될 때 가능합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종교인문학연구소 소장)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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