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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앙교회 종치기’였다”

기사승인 2024.09.12  03:4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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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의 가장 큰 성장은 교회와 남원에서 이루어졌다

▲ 중학교 시절 교회는 그야말로 자유의 공간이자 배움의 공간이었다. ⓒ이해학 대표 제공

나는 중앙교회 종치기였다. 종치는 일이 너무 재밌어서 수요일이면 교회에 가서 창가에 걸린 여러 개의 검게 거스른 호야등(燈)을 깨끗이 닦는 일과, 톱밥을 난로에 채우고 종을 쳤다. 문제는 종 줄이 너무 짧았다. 그래서 사택 앞에 있는 조그만 정원 바위에 올라가 종 줄을 잡고 당기면 그때부터는 뛰면서 종을 쳐야만 하였다.

종소리가 너무 좋았다. ‘땡그렁~ 땡그렁~’ 당시에는 시간을 알리는 수단으로 종을 쳤지만, 나에게는 해방의 종소리였다. 모든 구속과 나를 둘러싼 음침한 기분을 몰아내고 새 광명을 알리는 소리 같아서 희열이 넘쳤다.

나는 후에 <노트르담 꼽추>라는 영화에서 <콰지모도>역을 하는 안소니 퀸이 춤추며 종 치는 모습이 나의 모습 같고 그 기분이 공감됨을 느꼈다. 나는 여러 차례 지금도 살아계신 박광수 목사님께 종아리를 걷고 매를 맞았다. 거룩한 종을 경망스럽게 쳤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종을 쳤다. 내 인생은 남원에서 환하게 열려갔다. 그리고 교회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원래 남원에는 남원읍교회(지금 남원제일교회)가 있다. 고영도 목사님과 유재천 목사님이 대를 이어 지역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지금도 김금용 목사를 거처 장효수 목사가 그 중심을 잡아가지만) 그러나 어디에서나, 무엇이든 오래되면 고인 물이 된다. 더욱이 당시 6.25 직후의 급격한 사회변동 시기에 교계도 분열과 창조가 속도를 내는 혼란기이다. 1912년에 설립한 장로교회 총회가 1950년대부터 4개 교단으로 나뉘었다. 현재는 수백 개 교단으로 난립 되었다.

1952년 37회 장로교회에서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 박형룡 목사 측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김재준 목사를 추방함으로 예수교장로회와 대한기독교장로회 후에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분열한 것은 큰 산맥이 갈라지는 진통기이다. 그리고 일제에 항거한 투옥 성도들이 고신파와 합동측으로 갈라졌다. 이때 전국의 교회들은 어느 쪽이든 선택을 위한 논쟁과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남원교회도 단독 주도에서 다극화시대로 들어섰다. 1952년에 예수교장로회를 선택한 교인들이 동부교회로 분립해 나갔다. 같은 해에 유연식 집사가 이미 여신도 회장실을 기도처로 시작하여 1953년 1월1일, 최연철 집사 집을 중앙교회로 분립해 나왔다. 지금 천주교회 자리에 서재학(유연식) 집사, 최영철 집사 집이 있었다. 처음 마방을 사서 수리하고 늘려가며 서병렬 목사님 때에 폭발적 성장 가도를 달려왔다.

처음에는 오순절(五旬節, Pentecost)로 시작해서 후에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로 정립되었다. ‘은사(charisma)’는 방언(신령한 언어), 예언, 치유와 기적들이 강조되었다. 미국 선교사들이 몰려오며 구호물자가 교회를 중심으로 보급되는 영향도 컸을 것이다. 우리 교회 마당도 늘 구호물자 나누는 장터같이 활용되었다.
 
교인들의 발걸음은 빨랐고 기도는 뜨거웠다. 새벽마다 모였으며 수요일은 물론 금요기도회는 철야 기도회로 저녁 9시 시작하여 새벽까지 밤을 새우며 기도하였다. 주로 통성기도를 많이 하였고 간절하게 울었다. 모두가 마룻바닥을 치며 떼를 쓰듯이 소리를 질렀고 방언을 하기도 하였다. 마루 판자는 쪼개지고 여기저기 구멍이 나면 새로운 판자로 갈아 끼워야 했다. 이때 교인들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양 떼 같다고 할까?
 
어른들은 뜨거운 광란의 기도 중인데 우리 학생회 분위기는 밝고 싱싱했다. 나는 중학생이기에 주일학교 중학생 반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1학년인 이호윤 선생이 담임이었다. 박점동, 최형주, 김용환, 그리고 여선생들이 있었지만, 누구보다 인기 있는 분은 송해창 선생이었다. 성경 인물 동화를 하면 압도적으로 우리를 끌어당겨서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몰입시켰다. 나는 최근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그중에서도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 방구뽕> 편을 보면서 ‘송해창이가 또 있었네’ 생각하였다.

보기만 해도 친근감이 들고 확 트인 사람으로 우리에게 놀이의 즐거움을 알게 해 주었다. 우리를 요천강으로 끌고 가서 물에 처박기도 하고 금암봉 돌계단을 누가 먼저 뛰어오르나 경주를 시켰다. 우리를 자기 집 뒷방으로 몰아넣고 놀게 하였다. 성탄 전야에는 ‘사치기 사치기 사뽀뽀’와 ‘아이엠 그라운드’를 하면서 아예 밤을 새우며 놀았다. 어른들은 꺼져 가는 톱밥 난로가에서 ‘주여!’를 목이 터지게 외치며 이 죄인을 죽여달라고 가슴을 치고 있을 그때 말이다.

나는 생각했다. ‘어른들은 무슨 죄가 저리도 많아서 통곡을 계속할까?’, ‘하나님은 왜 저들을 용서치 않으실까?’

잠을 자다가 깨는 때에는 어머니는 언제든지 기도하고 계셨고 나는 그 기도를 들으며 다시 잠들곤 하였다. 기도 내용에는 아들을 주님의 종으로 받아달라는 간절함도 있었다. 나는 속으론 “아닌데,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데” 하며 사춘기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자주 새벽기도회에 따라나섰다. 목사님 설교를 알아듣지도 못하고 공감도 안 되지만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어머니를 위로하는 일임을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중앙교회 초대 교역자로 오신 문정길 목사님이 어머니를 교회 입문하게 하였다. 그분은 군에서 제대한 후 다리를 쓰지 못해 기어다니셨다. 말이 빠르고 더듬기에 설교자로서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찾는 구도의 길을 끝없이 걸으셨다. 나중에 함석헌 사상연구 모임에서 함께하고 내가 섬기는 주민교회  3.1절 창립기념행사에 자주 오셨고 교인들과 중국탐방도 함께하며 공동체의 꿈을 익혀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어머니를 교회로 인도하고 함께 가족으로 살아준 차금려 할머니는 요란하지 않고 차분하고 깔끔하였다. 어머니를 이용하려 하지 않고 진심으로 돕고자 하는 따뜻함이 배어있는 어른이었다.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노광공(盧光公, 1914-67)이라는 부흥강사가 혜성같이 나타났다. 남원 시내에 커다란 천막을 치고 부흥회를 하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의 둘째 아들 같았다. 모두가 미치게 따랐다. 그의 잘생긴 사진을 성경책 갈피에 끼워 넣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그가 집회 중에 뿌린 향 좋은 포마드 냄새 풀풀 나는 손수건은 축복의 징표같이 누구나 갖기를 원했다. 내가 다니는 남원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학교로 그를 초청하여 수업을 전폐하고 부흥회를 열기도 하였다. 학생들을 밤 집회에 참석하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노광공은 후에 동방교를 세워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치한으로 구속되었다.
 
지금 천주교 자리에 전도관 박태선 장로 부흥 집회가 열렸다. 마지막 날에 동방에서 나타날 구원자는 자기라고 증언하는 잔치에 남원 사람들이 구름 떼 같이 모였다. 커다란 스크린에 그가 본 기적 같은 불빛 사진을 자랑하며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 때문에 미국 전문가에게 검증받았노라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러나 후일 그 사진은 합성한 사진으로 판명이 나서 그는 구속되기도 하였다.

남원에 또 하나의 무시 못할 흐름은 1947년부터 물결친 경상도 김천지역 나운봉 장로의 용문산 구국기도운동이다. 나운봉 장로는 신앙 운동, 빈곤퇴치 등 민중운동을 겸한 애향숙(愛鄕熟)을 설립하고 평화통일을 위해서 기도 운동을 벌였다. 이는 개인주의를 넘어선 민족공동체 번영을 지향하는 한국 최초의 기도원 운동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성령의 신비적 체험을 공동체 번영을 위해 기도하는 경건 운동은 한국적 웨슬레 운동이었는데, 종교 기득권자들에 의해서 너무 쉽게 이단으로 규정되고 배타 당한 것은 아쉬움이 크다. 후에 '대한예수교오순절성결회'라는 교단을 창설했다.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는 생명수에 목마른 영혼들이 넘치는 시대였다. 이런 광풍 같은 부흥 운동 이면에 조용하면서 은밀한 샘물줄기 같은 흐름이 있었다. 중앙교회 바로 옆에 <지산향육원>이 있었다. 높은 판자로 둘러쳐진 고아원에는 우리 또래의 아이들이 우글거렸다. 고아원이 궁금했던 나는 판자 담 틈새로 그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대산면 이현필 선생이 기르던 동광원 아이들이었다. 이현필 선생 집단은 6.25 이후 광주지역을 점령한 북한군이 미제의 앞잡이 유하레 선교사를 잡으려 혈안이 되었을 때, 몇 사람이 순교하면서까지 목숨을 걸고 선교사를 지켜주었다.

9.28 수복 후 특공대가 유하레 선교사 신병을 확보하고 “한국을 어떻게 도우면 되겠느냐?”는 물음에 “이현필이 하자는 대로 해라.”, “그를 통해서 해야 한다.”라고만 하였다. 미군은 이현필에게 어떻게 도울지를 몇 차례나 물었지만, 그는 “없다.”라고 답했으나 간곡한 요청에 “그러면 나에게 여순사건에서 희생된 군인들 자녀를 나에게 맡겨 달라.”라고 해서 500명이 넘는 고아들을 이현필에게 맡긴 것이 대산면 <동광원>이다. 보모들의 자녀들을 고아들과 똑같이 보살피는 양육은 잘 되었으나 문제가 생겼다.

미군이 볼 때 이현필은 광인이다. 그의 교리는 첫째,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마라. 둘째, 병원에 가지 마라. 셋째, 고기를 먹지 마라. 넷째, 구호물자 받지 마라. 자연주의를 넘어 반미주의자라는 의구심이 들어 맡긴 고아들을 옮겨 양육하도록 한 것이 <지산향육원>이다. 아이들이 먼 대산면 동광원까지 도망가는 것을 막으려고 판자 담을 두 배로 높여 버렸다.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이 대산면에 똬리를 튼 것은 큰 축복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알지 못하였고 결국 그를 반대하였다. 그 예로 남원교회 당회록에는 모 집사가 이현필을 따른다고 하여 그를 징계, 치리하는 기록이 있다. 그의 사랑이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광주 귀일원에서 중증장애인을 돌보고, 전북 남원, 장수, 경기도 벽제, 광주 무등산, 전남 화순, 함평, 진도 등에서 ‘노동수도공동체’를 일구어 호의호식과 출세와 성공과 승리의 대로가 아니라 절제와 양보와 헌신의 좁은 길을 말 없이 걷고 있다. 그를 아는 이들은 “그의 사랑은 어떤 틀에도 갇히지 않는 우주적 사랑이었다.”라고 고백한다. 나는 남원에 오는 모든 사람을 마지막 동광원에 가서 이현필과 마주하게 한다.
 
나와 참 가까웠던 김재필은 미국으로 갔고 이정순은 전주공고를 갔는데 소식이 끊겨서 아쉽다. 중앙교회는 많은 청년들을 배출해 냈다. 이형근(러시아 초기 선교사 역할), 이광세(CBS 전속성우), 노상석(세무서장 역임), 허무웅(경찰공무원 퇴임), 김금자와 결혼한 최형주(한의사, 태양인 이재마 등 많은 저술), 김용환(중학교 교사), 이호윤(목사, 하나님의성회 총무, 바위샘교회 목회, 이건남으로 개명), 송공선, 정진웅, 김두일(목사, 하나님의성회 총회장 역임), 강은기와 결혼한 양희선은 요리 전문가이다. 벌써 고인들이 되어가는 믿음의 용사들이 민들레 홀씨같이 흩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배들의 구심점이 후진을 길러내는 지속적 창조는 더 중요할 것이다.

이해학 대표(사단법인 겨레살림공동체)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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