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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계보학에서 이웃의 계보학으로

기사승인 2024.09.11  02: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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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계보학⑯

▲ 박혜인 연구위원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발터 벤야민을 기반으로 이웃의 계보학을 주장한다.

우리는 평화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평화 가운데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신(=우리 주님)은 우리가 평화 속으로 몸을 던져 평화와 맞부딪혀야 하며, 평화 가운데 끝나야 한다고 말하고자 하신다. … 누구라도 신 가운데 있는 사람은 평화를 누릴 것이고, 이와 달리 신 바깥에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 주님께서 “평화 속으로 들어가시오. 평화 속으로 뛰어 들어가시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평화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사람, 끊임없이 달리는 사람은 천상의 사람이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설교 7[Pf 72] 이부현 옮김 2023, 104-5)

요즘 뉴스를 보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표현이 실감난다. 이익 집단들의 갈등에 서민 경제부터 대학 입시, 의료 체계가 눈앞에서 붕괴되는가 하면 북한 관련 문자가 하루에 서너 개씩 온다.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두 개의 전쟁이 진행 중이고, 인접 국가들과 불편한 역사가 전혀 해소되지 않은 우리는 안보 때문에 초강대국의 움직임에 신경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우울하고 갑갑하던 차에 지난 8월 30일 광화문 향린교회에 다녀왔다. 평소에 관심 있게 읽던 종교학과 평화학의 내로라하는 저자들이 일본의 진보적인 학자들과 함께 “적(敵)의 계보학”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열었기 때문이다. 첫인상과 끝인상은 신선했다. 개념이나 의견의 차이 때문에 언성이 높아지거나 논쟁에서 승리하는 데 집착하는 참여자가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학회에 다녀와서 적을 정치적으로 사유한 대표적인 독일 법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에 대해 읽어보았다. 슈미트는 그의 마지막 저서 『정치신학·2 (Politische Theologie II)』에서 이렇게 말한다:

“잘못된 세계의 주인은 변화된 새로운 세계의 선구자, 해방자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없다. 이들은 말하자면 태생적으로 서로 적이다. 혁명의 시대에는 과거에 속하는 모든 것이 적이다.”(조효원 역, 159)

20세기 적의 계보학이 그의 논리에 기반을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에 부역한 악명높은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슈미트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 정치적 사유와 질서의 “근원”이라고 믿었다(김항 2016, 132-3). 명확한 적이 있어야 국가는 대혼란을 방지하고 기존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는 미·소 주도의 국제연맹과 보편적 평화주의를 적과 전쟁의 소멸로, 따라서 정치적인 것의 종말로서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의 예견과는 다르게 세계화 이후에도, 적의 존재와 전쟁의 공포는 오늘날 국경 안팎으로 맹렬하게 살아있다.

슈미트가 열렬히 옹호했던 국가의 ‘예외적’ 주권 행사를, 독일의 유태계 비평가이자 지식인이었던 발터 벤야민(1892-1940)은, 국가폭력에 시달리며 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역사 인식과 희망을 통해 냉철하게 비판하였다. 지면이 짧은 본고에서는 그의 폭력 이론이 아니라, 평화에 대한 함의에 주목하고자 한다.

슈미트, 벤야민, 그리고 데리다로 이어지는 정적의 계보학은 학계에서 열정적으로, 충실히 숙고되고 있기에 이제는 우리나라 정황을 검토하여 이웃과 평화를 함께 고민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진실과 정의를 위한 투쟁은 영예롭다. 하지만 투쟁과 해방 이후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더 중요하다. 우리가 어떻게 전 지구적 쟁투 가운데서 ‘적’의 규명보다, 이웃과 공동체를 꾸리고 연대와 공존을 확장하는 데 집중할 수 있을까? 왜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일에 더 힘을 기울이지 않는가?

벤야민은 “경험”을 “윗세대가 아랫세대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형성되는 것”이라 보았다(김항 292). 불의, 폭력, 불화를 ‘해제’하기 위해 일상의 평화를 나누고 공동체의 이야기 나눔과 돌봄을 전통으로 가꾸는 장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이런 장이 당장 우리 곁에 없다면, 절망할 수 있다.

하지만 분열과 갈등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 아직도 평화에 헌신하는 운동가들과 학자들을 만나면 평화의 부재와 불가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선물로서의 정의와 용서가 지배적 체계의 바깥에 “이질적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우리가 소망하는 평화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상식적 가능성의 영역을 초과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렇다면 “불가능성은 또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지시하는 것이 아닐까? 해체의 철학자 데리다의 말처럼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사유하고, 그것을 명명하며, 그것을 욕망한다. 우리는 그것을 지향한다(intend)”(제닝스 181-3). 그렇게 폭력을 몰락으로 이끈다.

벤야민은 그의 「신학적·정치적 단편」에서 “몰락을 몰락으로서 추구하는 행복”으로서의 정치관, 인간관을 수수께끼처럼 던진다:

이처럼 영원히 사멸해 가는, 총체적으로 사멸해 가는 속세적인 것, 그 공간적 총체성뿐만 아니라 시간적 총체성까지도 사멸해 가는 속세적인 것의 리듬, 이 메시아적 자연의 리듬이 행복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것의 영원하고 총체적인 무상함으로 인해 메시아적이기 때문이다. … 여기서 사멸, 무상함, 몰락을 ‘죽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김항 2016, 272-3)

이웃과의 평화로 나아가는데 사뭇 불교적 명상을 연상시키는 벤야민의 역사의식과 종말론이 왜 필요한가? 계급 투쟁뿐 아니라 인간의 비극적인 유한함과 황망함 자체에 관심을 기울였던 벤야민에게, 인간 존재는 고통스러운 자기부정을 통해 몰락을 예견함으로 더욱더 일회적이고 고유하다. 여기서 사멸의 리듬은 ‘메시아적’이기에 폭력적 구조로부터의 해제와 해방으로 우리를 이끈다.

헌데 이러한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냉철한 역사 인식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어떠한 사유나 혁명적 수단조차 “부자유의 감옥을 부수고” 나온 뒤 도리어 “부자유에 묶어두는 기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얼마나 부자유한지를 알게 하고 나아가 그런 현실을 변화시키는 실천을 촉발하는 인식, 또 그 실천을 통해 얻어진 인식만이 진정한 인식, 즉 삶을 자유롭게 하는 인식일 것이다.”(최성만 2014, 166)

이처럼 생생한 인식이 과거와 현재를 성찰할 때, 비로소 역사는 생명력으로 충만한, 섬광처럼 도래하는 “지금시간(Jetztzeit)”으로 경험될 수 있다(175).

이는 분명 국가주도의 폭력 비판을 넘어서는 작업이다. 결코 완전하지 않은 혁명과 보수화를 거듭하여, 쇄신없는 진리가 그러하듯 깨어있지 않으면 개인과 사회 모두 부패하거나 붕괴될 수밖에 없다. 우상화되거나 카르텔화된 해방의 테제가 있는가?

슈미트도 울고 갈 예외적 폭력이 만연하고 노동자와 서민은 믿음과 생기를 잃어간다. 말뿐인 진리가 횡행하면서, 고문과 죽음을 무릅쓰고 진리를 수호한 세대의 역사가 곡해되어 부끄럽다. 자기중심적인 언사와 실천들이 우리를 해방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져 부자유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적(敵)만 있고 이웃이 보이지 않아 황폐하다.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웃의 계보학을 구성하기 위해 가장 필요하면서도 덜 논의되고 있는 요소가 사랑이다. 벤야민이 그토록 천착한 폭력의 역사와 비판을, 평화에 대한 염원과 호소로 읽을 수는 없을까? 법적 폭력이 침투하고 말았지만 분명 벤야민은 순수한 비폭력적 영역, 언어의 영역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예의, 애정, 평화에 대한 사랑”을 거론하였다(최성만 역 2008, 99). 그러나 벤야민이 원하듯 폭력과 파괴, 빈곤의 문제를 앞두고 치열하게 날이 선 시대의 인식에서 곧바로 사랑의 실천으로 넘어가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발터 벤야민

벤야민보다 6세기 먼저, 자유와 해방, 진리의 문제에 갈급했던 독일의 신학자·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8)는 ‘지금시간’을 깊고 충만하게 사유하였다. 에크하르트의 ‘지금’은 신의 현전, 창조, 생성이 일어나는 온전히 새로운, 영원성의 시간이다(설교 20a, 이부현 역 247). 에크하르트의 관점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어떤’ 미래로서의 종말보다 오히려 벤야민의 강렬한 ‘지금’과 공명한다.

마찬가지로, 이 영원/신성에 접근하기 위해서 에크하르트는 철저한 자기 비움을 추구하는데, 이는 신적 본성과 자아 중심성이 인간 영혼의 근저에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는 그의 유명한 설교 6(‘Justi vivent in aeternum’)에서 이렇게 설파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자기애(eigenminne)에 세워져 있다. 만약 그대가 자기애를 놓아두고 있게 된다면(gelazen), 전 세상을 놓아두고 있게 될 것이다.”(이부현 역 2023, 96)

이러한 자기비움이 역사성과 주체성의 일체 부정으로 해석되는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

“자신을 손에서 놓고(gelassen) … 그렇게 자기 자신에서부터 벗어나(us gegangen) 있는 사람은, 올바르고 고유하게 자기 자신을 되돌려 받게 될 것이다. … 그는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하나님의 현존하는 지금(gegenwurtigen nu der ainikait)에서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설교 15, 192-4)

불교의 인간관은 이런 이해와 닿아있다. 사람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緣起)하는 “세계 속의 관계적 존재”로 나의 삶은 이웃과 (혹은 적과) 얽혀 있다. 이 상호의존적 관계를 인지하는 순간 ‘나’는 홀로 성립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도 자기-동일적 정체성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존속시킬 수는 없으며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에 놓여 있다(『고통의 시대 자비를 생각한다』, 77-8). 불교의 무아(無我)는 따라서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거나 나의 완전한 무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불변하는 아성(我性) 혹은 자성(自性)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마음의 혁명”으로 이해해야 한다(이찬수 2015, 22).

정체성의 절대화는 타자의 적대화로 이어지기 쉽다. 비본래적 자기의 벽을 쌓기보다 버리고 떠났던 에크하르트의 영혼은, 돌아와서 그(녀)의 동무들, 나아가 모든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한다(설교 4, 64-5). 절대자와의 합일을 도모하는 영성이 개인주의 대신 관계성으로 현상하는 것이다. 폭력의 세기를 살아간 정치이론가도, 초탈의 신비가도 이웃과의 평화와 사랑이라는 가치에서 만난다. 그들이 함께 꿈꾸었던 구원의 ‘지금’은 그냥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인식과 비워진 영혼을 통해서이다.

에크하르트의 신적 영원과 벤야민의 메시아적 정치철학은 다른 차원의 해방을 이야기하는 듯 보이지만, 사회의 변화와 내면의 혁명은 분리될 수 없다. 역사의 장에서 정치가 단지 힘들의 경쟁, 갈등을 전제로 한 균형과 분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의 문제이며, 결국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관계적 문제이기에 우리의 책임과 기여를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 이웃의 계보학이라는 생소한 제안은 결국 사람이란 누구이며 어떻게 우리의 삶이 평화로울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춘다. 종교학과 신학의 통찰을 통해 정치의 영역 또한 공감과 자비의 도구로 기능하여 파괴와 죽음 대신 사랑과 생명을 심어나갈 수 있길 기도드린다.

“사랑은 … 모든 존재의 근본적 존재 원리라는 것입니다. 어떤 개체이든 자기 폐쇄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항시 타자와의 관계성과 개방성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다시 말해 모든 존재자는 자기부정과 자기소외를 통해 긍정된다는 것입니다. 부정을 통한 긍정, 자기 상실을 통한 자기 확보, 이것이 공이 뜻하는 모든 존재의 실상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곧 만물에 내재하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화엄 철학에서는 이러한 공의 세계를 사물과 사물 사이에 막힘이 없다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진리로 표현합니다. … 공은 사랑이며 사랑이 공입니다. … 공은 사랑의 존재론적 개념이며, 사랑은 공의 인격적 언어입니다.(길희성, 『보살예수』, 208-10; 이찬수 2015, 148)

참고문헌

• 김항. 『종말론 사무소』. 서울: 문학과지성사, 2016.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이부현 역 『M.에크하르트의 중세 고지 독일어 작품집 1』. 부산: 메타노이아, 2023.
• 발터 벤야민. 최성만 역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서울: 도서출판 길, 2008.
• 서공석, 이찬수, 정경일 외. 『고통의 시대 자비를 생각한다: 자비에 관한 통합적 성찰』, 경북 왜관: 분도출판사, 2016.
• 이찬수. 『다르지만 조화한다』. 서울: 모시는사람들, 2015.
• 최성만.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 서울: 도서출판 길, 2014.
• 테드 제닝스. Reading Derrida / Thinking Paul: On Justice. 박성훈 옮김.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 정의에 대하여』. 서울: 그린비출판사. 2014.

박혜인(기윤실 윤리연구소 연구위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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