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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밖에도 의인은 존재한다”

기사승인 2024.08.14  03: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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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로운 인간과 세계를 향하여(갈라디아서 2:16-21)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신학적 입장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이후 그리스도교가 보편화하는 과정에서 그 믿음의 요체를 단적으로 집약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한계를 넘어 그리스도교가 세계화하는 데 결정적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그 핵심 요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주장을 아주 치밀한 논증 방식으로 역설합니다. 날 선 검과 같은 갈라디아서의 성격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먼저 문제가 되는 사태를 진술하고(2:11~14), 본문 말씀의 주장을 펼친(2:15~21) 후 그 주장에 대한 증명을 시도합니다(3~4장).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의 주장에 앞서 먼저 하나의 사건을 언급합니다. 게바 곧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일입니다. 게바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들의 율법에 따르면 이방인들은 그 밖에 있는 ‘죄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죄인들과 식사 자리를 같이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베드로는 죄인들과 함께 공공연히 식사를 나누신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거리낌 없이 이방인들과 식사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의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자리를 피한 사연이 무엇이었을까요?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초기 교회에서 의인으로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면서도 유대교의 율법을 존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궁극적인 구원의 길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믿고 있으면서도 이방인들이 구원의 무리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율법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할례를 거침으로써 기본자격을 얻고 난 다음에 구원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다는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최고 권위자였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했던 식사 자리를 피한 것은, 바로 그러한 야고보에게 책잡힐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거리낌 없지만 야고보가 자신을 문책한다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하필 바울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관한 문제에서 야고보와는 대극점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더 이상 율법에 의존하는 것은 무용한 일이요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역설한 사도입니다. 그런 그에게 베드로의 행동은 소신 없는 사람의 전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를 크게 나무랍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2:14) 자신의 소신과 모순되는 행동을 한 베드로를 나무란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 교우들에게 그 이야기를 한 다음 바울은 본문 말씀의 주장을 펼칩니다. 율법을 따르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 사이의 문제는 초기 교회의 큰 쟁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음식물에 관한 논란 역시 그 맥락 가운데 있습니다.

지금 갈라디아교회는 바로 그 문제 때문에 큰 분란에 싸여 있습니다.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마저도 혼란스러워할 정도였으니 일반 교우들에게 얼마나 더 심각했을까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참에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명백하게 정리하도록 하겠다.’는 기세로 본문 말씀의 주장을 펼칩니다.

먼저 바울은 우선 유대인들의 통념을 언급합니다.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2:15) 바울이 이 말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통념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방 사람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죄인’이라고 간주하는 유대인들의 상식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2:16) 사도 바울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행위 대신 믿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율법 대신 복음을 말한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율법의 근본정신과 하나의 체제를 뒷받침하는 법조문으로서 율법을 구분하여 헤아려야 합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집약됩니다. 그것은 복음의 정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 율법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율하는 법조문으로 명문화되어 있었습니다. 그 율법 조문은 하나의 체제와 삶의 방식을 강제합니다.

하나의 체제를 뒷받침하는 법조문으로서 율법은 필연적으로 그 율법에 부합하는 사람과 부합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자격 있는 사람과 자격 없는 사람, 나아가 비범죄자와 범죄자로 구분합니다. 법은 필연적으로 그런 구분을 동반합니다. 법이 정의를 이루는 수단이 되기를 바라지만, 법이 정의를 이루는 온전한 수단이 되지는 못합니다. 때로는 법이 정의를 훼손할 때도 있습니다. 법 밖의 정의를 말할 수밖에 없는 차원이 있습니다.

초기 교회에서 율법이 논란이 될 때 가장 뜨거운 쟁점이 할례 문제였습니다. 율법이 핵심적 사안으로 할례를 요구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구원의 공동체 성원으로서 자격을 문제시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할례를 받아 유대인 공동체 안에 들어와야 그다음에 구원의 가능성이 생긴다는 이야기입니다. 곧 율법의 준수 여부가 현실적으로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 여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율법은 단순히 도덕율이 아니라 하나의 엄연한 체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 이탈리아와 리비아 사이의 지중해 남부 해상에서 이주민을 돕는 아일랜드 해군 장병들 ⓒIrish Defence Forces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를 들까요? 외국인 노동자나 난민의 인권은 보장되어야 할까요? 아닐까요? 그들은 한국 국민이 누리는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는 것이 정당할까요? 아닐까요? 누구든 존엄한 인권이 보장받아야 한다고 하지만, 국적과 시민권에 따라 권리에 차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 가운데 우리 모두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 준수의 핵심 사안으로서 할례 문제 역시 그러한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구성원의 자격을 확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항상 구성원이 될 수 없는 대상을 만들어냅니다. 아무리 개방적인 공동체라 하더라도 그 현상은 불가피하게 나타납니다. 체제 안에 있는 사람과 체제 밖에 있는 사람이 나뉩니다.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 현실을 말합니다. 율법 안에 있는 사람은 의롭다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주장은, 그 밖의 배제된 사람들을 두고는 누구도 의롭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로움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뭐라고 주장합니까?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법조문에 의해 뒷받침되는 체제의 논리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어떤 자격을 문제시하는 논리를 뛰어넘습니다. 누구에게나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일종의 노파심 같은 것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하심을 받으려고 하다가,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까?”(2:17) 이렇게 반문합니다. 이 물음이 어떤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실제로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언제나 완벽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전히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는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현실입니다. 쉽게 말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죄짓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런 상황에 빠지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또 다른 올가미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냐고 바울은 반문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우면, 나는 나 스스로를 범법자로 만드는 것입니다.”(2:18)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진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다고 해도 여전히 숱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실존적 정황,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수없이 자신의 곤고한 상황을 한탄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단호하게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지 어떤 체제 밖에 있다는 것만으로 ‘죄인’이 되는 삶의 방식에 더 이상 매일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적어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자격 없는 죄인이 되어버린 상황, 그 상황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허물어버린 것을 다시 세울 리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마다 사람들의 의지 또는 양심에 상관없이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고, 자격 여부를 결정하고, 의인과 죄인을 나누는 삶의 방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을 바울은 강조합니다. “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2:19~20)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진정한 내적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율법에 의존해 자기 존재를 인정받았던 삶은, 율법의 해악과 무용성이 드러나는 순간과 더불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누군가를 죄인으로 배제하고 스스로만 의롭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이 주는 보장을 떨쳐버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2:20) 이것은, 모든 경계를 허물어버림으로써 전적으로 그런 삶을 방식을 무너뜨린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삶의 의지만이 자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두 가지 방향에서 율법을 따르는 삶의 무용성을 말함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진실을 말합니다. 첫 번째는 처음부터 의인과 죄인을 갈라는 놓는 삶의 방식이 더 이상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법조문으로서 율법을 따르는 삶의 실상입니다. 자격과 업적으로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 부정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삶의 방식은 더 이상 소용없게 되었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그런 삶의 방식에 매이지 않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사람들이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관계에 대한 근본적 혁명을 말함과 동시에 진정한 삶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의 근본적 혁명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혁명 선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만한 위력을 지니지 못한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신앙을 추구한다고 하겠습니까? 일상적인 삶의 방식과 세상의 그럴듯한 도덕율을 넘어서는 데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현실적인 삶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체제의 안보에 매여 남북의 형제가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지배세력의 권력유지 논리는 함께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덮어버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사회 공통의 전망이 사라진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온건한 보수주의자도 동의하기 어려운 극단적 이념 편향을 지닌 인사들이 국가 공공기관의 책임자가 되는 사태는 그 단적인 현상입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진실을 망각하게 하고 저마다 자기만 살고자 하는 삶의 방식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정진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그 진실을 향해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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