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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감각의 해방

기사승인 2024.08.12  03: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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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하게 보아라!”(이사야 42:18-21)

▲ Angelo Trevisani, 「The healing of the man born blind」 (c. 1815-1720) ⓒWikimediaCommons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성도가 누려야 하는,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그리고 부활하신 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평안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평안은 우리의 삶을 흔드는 모든 문제를 잠잠하게 함으로 얻어지는 평안이 아닙니다. 나를 힘들게 하거나 두렵게 하는 상황이 조금도 바뀌지 않더라도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이 너의 인생에 함께 계시지 않느냐.’라는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평안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라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외부에서 오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평안입니다. 그렇기에 다시 평안을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우리 안에 주어진 평안이 나를 충만하게 하고, 감싸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습니다. 불완전한 평안이 아니라 완전한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이루려고 하는 모든 일에는 불완전함만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완전한 평안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서 평안을 찾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내 안에 주어진 평안을 선택하고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총회 재정 평화통일주일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성북교회 청소년부 수련회 주제도 “주님 안에서 평화”라고 합니다. 통일까지는 못 가더라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평화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너희 귀가 먹은 자들아, 들어라! 너희 눈이 먼 자들아, 환하게 보아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가 먹은 자들, 눈이 먼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위정자들이건, 종교 지도자들이건, 백성이건 누구 하나 빠짐없이 이스라엘 전체가 총체적으로 귀가 먹고, 눈이 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19절의 말씀입니다. “누가 눈이 먼 자냐? 나의 종이 아니냐! 누가 귀가 먹은 자냐? 내가 보낸 나의 사자가 아니냐! 누가 눈이 먼 자냐? 주님과 언약을 맺은 자가 아니냐! 누가 눈이 먼 자냐? 주님의 종이 아니냐!”

그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가 귀가 먹고, 눈이 멀었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0 그는 많은 것을 보았으나,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 귀가 열려 있었으나,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22절 이하에, “그러나 지금 그의 백성은 약탈과 노략을 당하였으며, 그들은 모두 구덩이 속에 갇혀 있고, 감옥에 갇혀 있다. 그들이 약탈을 당하였으나, 구하여 주는 자가 없고, 노략을 당하였으나, 노략자들에게 '돌려주어라' 하고 말해 주는 자가 없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너희 가운데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주의하여 듣겠느냐?”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과연 누가 외면하지 않고 또는 자신이 스스로 저지르고 있는 이 불의한 일에 귀를 기울일 것이며, 이 불의한 일들을 볼 것이며, 누가 이 불의한 일들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주의를 기울여 이 모든 일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냐? 라고 질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지금도 그러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주님은 백성을 구원하셔서, 의를 이루려고 힘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율법과 교훈을 높이셨고, 백성이 율법과 교훈을 존중하기를 바라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들이 지키는 수준, 남들이 목표하는 수준의 도덕이나 정의가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도덕과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며 율법과 교훈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주변에 어려움을 당한 형제자매들이 있음에도, 서로 도와주는 이가 없었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는 이도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귀가 먹은 자들아, 들어라. 너희 눈이 먼 자들아, 환하게 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세상의 소리를 들어라! 불의한 세상의 모습을 보아라! 그리고 바로 잡아라!라고 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귀가 열리고, 눈이 밝히 보게 되도록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자신의 사역을 통해 귀가 열리게도 하셨고, 눈이 뜨이게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7:31-35의 본문입니다.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 32 그런데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33 예수께서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 35 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고쳐주시기를 먼저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열려라!”라고 선포하시며 치유 사역을 하셨고,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고 했습니다.

성도님들께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치유 사역은 단순히 병을 고쳐주는 사역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고쳐주는 사역입니다. 죽은 삶에서 생명의 삶으로 방향을 바꾸어 주시는 사역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사역 결론에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눌하게 했던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 생명의 삶을 되찾은 것입니다.

구약시대에서 하나님은 귀가 먹은 자들아, 들어라! 눈이 먼 자들아, 환하게 보아라! 라고 말씀하셨다면 신약시대에서 예수님은 직접 귀가 먹고, 눈이 먼 자들을 치유하심으로 참 생명의 삶이 무엇인지 듣고,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럼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님이 듣고, 볼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볼 수 있도록 도우십니까? 여전한 이 세상의 불의와 어려움에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살도록 더 높은 차원의 율법과 교훈을 주셨듯 오늘날 성도의 삶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로 더 높은 차원의 정의롭고 도덕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제 속초 성암교회에서 이 지역 기장교회 연합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과 같은 노회에 속해 있는 예닮교회 청년들이 이 지역 기장교회 교회학교 수련회를 위해 수고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예배당에 가만 앉아 있는데, 정확히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남아에서 오신 분이 교회 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만 앉아서 ‘왜 성암교회는 성도님이 청소하시지 않고, 외국인 노동자분을 고용해서 청소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청소하시는 분은 저의 생각과는 달리 성암교회 성도님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무너졌습니다. 아무도 저의 생각을 알지 못했지만, 스스로 너무 부끄러워서 무너졌습니다. 수련회에 참석하기 위해 같이 있었던 동기 목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나는 쓰레기야.”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 정도구나.’라는 생각에 사실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쓰레기야’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절망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더 높은 도덕과 정의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나름 나 정도의 인식과 태도면 괜찮지.’라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거짓된 모습인지를 폭로시켜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저를 무너지게 하시는 게 아니라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라고 말입니다.

평화를 이루려면 나의 안과 밖에서 귀가 열리고 눈이 환하게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어떤 정의로운 행동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인 것처럼 우리 자신이 먼저 차별과 혐오와 증오에서 벗어나 나 자신과 평화를 이루어 나의 밖에서도 평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주의하여 듣겠느냐?”라는 하나님의 물음에, “제가 귀를 기울이고, 제가 환히 보고, 제가 온전하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성북교회 청소년부, 초도제일교회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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