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소수자와 그리스도교 32
▲ XY염색체를 보유해 성별논란의 중심이 된 이마네 칼리프(25, 알제리) 선수 ⓒGetty Images |
1.
파리 올림픽이 이제 내일 모레면 끝나지요. 평소에 방송에서 보기 힘들었던 여러 종목들을 볼 수 있고, 평소에 많이 보던 종목이라도 색다르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시간입니다. 저녁과 새벽 시간대에 경기가 진행되다 보니 중요한 경기들이 새벽에 진행되는 경우도 많은데 그런 경기들을 다 보시는 분들도 꽤 있으신 것 같더라구요.
올림픽뿐만 아니라 스포츠 경기를 관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거기서 느껴지는 멋짐 혹은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경기 중 필요한 목표를 성취하는 플레이의 멋짐 혹은 아름다움 말이죠. 물론 뒤에서 이야기할 편가르기나 판타지 등의 요소가 있겠지만 그런 요소들이 힘을 발휘하는 것도 결국은 멋짐과 아름다움이 결합했을 때 가능할 거라 생각이 듭니다.
스포츠 경기는 편을 갈라서 진행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고 단독으로 진행하는 경기라도 이미 사전에 편을 갈라 놓은 경우들이 거의 다지요. 그래서 편가르기에 불을 지르거나 아예 어떤 종목들의 경우에는 실제 싸움을 하는 대신에 스포츠 경기로 대신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얽히기도 하고요.
프로 스포츠의 팬덤이라는 것이 결국 그런 편가르기의 한 양상일 거고 지금 하고 있는 올림픽은 그 편가르기가 ‘국가’ 단위로 이루어지게 되는 가장 전형적인 경우일 것입니다(요즘은 ‘국가’ 단위가 아닌 난민 선수단도 있다고는 합니다만. 그러고 보니 그 난민 선수단의 성소수자 선수가 메달을 땄다고 하더라구요?).
한편으로 이거 말고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할 수 있겠다 싶어요. 이번 올림픽에서도 한국 양궁 선수단이 어김없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죠. 이번엔 아예 전 종목을 석권했습니다. 그리고 양궁협회에 대한 어김없는 찬사가 이어졌지요. 아무리 좋은 과거 실적과 경력이 있어도 철저하게 선발전에서 나타난 현재 실력만 가지고 대표를 선발하는 공정함이 매번 어김없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이유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양궁협회에 대한 저런 찬사를 보면서 자꾸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양궁협회 같은 ‘공정함’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지금은 아닐 것 같아도 결국 그렇게 돌아갈 거라는 판타지를 심어 주는 게 결국 지금의 스포츠, 특히 자본과 엮인 스포츠의 역할이 아닐까 싶단 말이죠. 덧붙여 말한다면 그 공정함이 결국 능력주의로 많이 읽힌다는 점도 지적해야겠고 말입니다. 물론 앞에서 말한 멋짐과 아름다움은 능력주의를 넘어서는 지점들이 있을 겁니다만.
2.
보통 올림픽이라면 앞에서 한 이야기들 정도가 나올 거 같은데 이번 올림픽에서는 소위 “XY염색체를 가진 여성 복싱 선수들”이 시종일관 이야기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더니 곧 그건 아니고 여성으로 성장해 온 선수인데 염색체를 보니 XY염색체였다는 이야기가 나왔죠. 그래서 지난해 세계복싱선수권대회에서는 대회 도중에 출전금지를 당했지만 올림픽에서는 여성으로 성장해 온 선수니 당연히 출전할 수 있다고 IOC가 결정을 내려 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이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성소수자 중의 한 집단인 인터섹스(간성)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는 책에 나온 인터섹스에 관한 짧은 정의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혹은 성장하면서 신체적, 유전적, 호르몬의 특징이 의학적 관념상 전형적인 여성이나 남성의 특징으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가령 정소와 난소를 모두 갖고 있거나 성염색체가 XXY인 경우와 같이 성염색체, 생식선, 호르몬 등 성특징이 전형적인 남성/여성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런 이야기도 덧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퀴어 관련 도서들에서 종종 소개되는 예인데요. 인터섹스로 태어나서 외형적 특징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분명치 않은 경우에 병원에서 그냥 결정을 내려서 ‘남성’의 외형을 만들거나 ‘여성’의 외형을 만들거나 하는 경우가 꽤 있다는 겁니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요즘은 성별을 이야기할 때 출생 당시 병원에서 지정해 준 것이라는 의미로 지정 성별이라는 용어를 쓴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그런데 정작 허탈한 느낌이 드는 지점은 이 선수들이 XY염색체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복싱선수권대회에서 출전금지를 당했을 때 XY염색체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공식 발표가 된 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혹시나 이 선수들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상당히 유리한 조건을 갖춘) 그냥 여성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특정한 여성 선수가 아주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경우 “남자 아니냐?”라는 의심을 받는 경우가 많았던 전례까지 떠올릴 여지도 생기게 됩니다. 한국에서도 박은선이라는 여자 축구 선수를 두고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었다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저 복싱 선수들에 관한 설왕설래를 두고 성소수자 혐오이면서 동시에 여성 혐오까지 겹쳐 있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꽤 말이 되겠다 싶습니다.
여기서 이런 이야기도 덧붙일 수 있겠네요. 저 선수들 중 한 선수가 첫 경기를 할 때 46초만에 기권승이 나오자 기권을 한 상대 선수를 두고 사실상 남자인 선수에게 당한 불쌍한 선수 운운하는 말이 나돌았는데요. 정작 그 선수는 나중에 나를 이긴 그 선수도 여자 맞다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뭐 그러거나 말거나 “사실상 남자인 선수” 이 이야기를 떠들고 싶은 사람들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만.
3.
이 두 선수 이야기야 이렇다 치지만 사실 최근 여자부 경기에 참여하는 트랜스젠더 여성 선수, 특히 생식기 수술을 하지 않은 트랜스 여성 선수들을 두고 이런저런 설왕설래가 많았지요. 가장 많이 설왕설래에 오르내렸던 어느 수영선수는 결국 이번에 파리 올림픽 출전을 금지당했다고 하더군요. 반면 어떤 트랜스젠더 남성 선수는 남자부 경기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사실 남자부/여자부라는 구분 자체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스포츠 플레이의 멋짐과 아름다움을 위해서 비슷한 수준의 평균적 체력을 맞추기 위한 구분에 남성/여성 이분법을 그냥 겹쳐 버릴 때에만 가능한 구분일 것입니다. 그러니 남성/여성 이분법이 깨지는 상황에서 스포츠의 남자부/여자부 구분이라고 그냥 그대로 갈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겠습니다.
물론 성소수자 혐오자들과,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자임하면서 트랜스젠더 혐오를 같이 한다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두고 스포츠의 남자부/여자부 구분이 흔들리는 걸 보니 남자/여자 이분법을 고수해야 한다는, 그야말로 꼬리가 몸통을 흔들려고 하는 주장들을 하고 있긴 하더라만요.
한겨레에 실린 “카테고리에서 스펙트럼으로”라는 칼럼의 제목이 이 문제를 보는 바람직한 기본 관점을 딱 짚어 준다 하겠습니다. 인간의 성별의 문제를 남/녀로 딱 구분되는 카테고리로 보는 게 아니라 수많은 색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스펙트럼의 프레임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관점인 거죠.
물론 남자부/여자부 구분 자체가 흔들리면서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문제니까 그만큼 많은 논의와 시행착오가 있을 것입니다. 시행착오가 있다는 말은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손해를 본다는 말도 되겠죠. 그러니 그 이득과 손해를 개인이 모두 다 감당하게 놔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즉, 시행착오를 감수하면서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 나가고 그 시행착오 속에서 빚어지는 이득과 손해도 같이 감당해 가는 집단적 의지와 활동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집단적 의지와 활동은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파리 올림픽에서도 드러나는 스포츠의 편가르기와 판타지라는 요소와 어떤 지점에서는 얽혀 가면서, 어떤 지점에서는 그것을 탈피하면서,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국 어떻게 하면 스포츠의 멋짐과 아름다움을 성소수자와 비성소수자가 함께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지점을 함께 만들어가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