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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기사승인 2024.08.09  01:4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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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강림절 열둘째 주일(욘 1:4-12; 계 8:6-11; 눅 19:11-27)

1. 순종과 충성

공생애 기간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구약시대인 모세와 여호수아 당시,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만난 성읍입니다. 지리적으로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으로,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세리장이자 부자였던 삭개오를 만났던 곳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공생애 최종 목적지인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은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던 곳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 누가복음 19장 앞부분에는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을 방문하고 구원을 베푸신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것’은 아마도 삭개오처럼 로마제국의 세리로서 유대민족을 수탈했지만, 또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살아왔지만, 예수님을 만나 믿음의 결단으로 자신의 부를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사실, 삭개오가 처음부터 주님을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 말씀에 나오는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불순종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명령, 곧 사명에 순종합니다. 따라서 복음서에 나오는 열 므나 비유는 순종과 충성의 비유가 됩니다. 그리고 이 순종과 충성은 단지 제자도, 혹은 삭개오처럼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전 영역, 그리고 생태환경까지 이어집니다.

결국, 불순종과 충성하지 않음은, 그러한 인간의 심판은 물론, 자연 전체의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인간 때문에 생태계 전체도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여리고 성이 무너진 이유도 바로 그러한 맥락입니다. 그리고 오늘 요한계시록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일곱 나팔 재앙에 대한 말씀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인간 때문에 생태계 전체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말씀에 순종하고 사명에 충성하여 마지막 종말의 날이 심판의 날이 아니라, 축제의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삭개오 집에 모인 이들이 삭개오가 변화된 모습을 보았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유대 땅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것을 보고, 새로운 세상, 곧 메시아가 등장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 알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열 므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 내가 돌아올때까지 장사하라!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눅 19:11-13)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습니다. 한 귀인이 종 열 명에게 한 므나씩 주었습니다. 이 열 므나 비유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마 25:14-30)와 다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종의 재능에 따라 달란트(τάλαντον)를 다르게 주었지만(따라서 영어 ‘talent’는 ‘재능을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므나 비유에서는 재능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한 므나씩 주었습니다. 따라서 므나 비유는 재능이 아니라, 주인에 대한 충성에 관련된 비유가 됩니다. 아무튼, 귀인은 종들에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라고 명령합니다.(1)

여기서 ‘장사하라(프라그마튜사스테, Πραγματεύσασθε)’는 말은 프라그마튜오마이(πραγματεύομαι) 동사의 명령어로  명사 프라그마(πρᾶγμα)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프라그마는 ‘일, 문제, 사실’이라는 중립적인 뜻을 가지고 있지만(마 18:19, 눅 1:1, 롬 16:2, 히 6:18), 특별히 하나님의 역사나 행위를 말할 때도 사용됩니다(the LXX, 사 25:1, 민 22:8). 따라서 장사하라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비유에서는 주인의 일과 사업) 위해 힘껏 일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장사 밑천이 얼마인가요?

열 므나입니다. 1므나의 가치는 대략 100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인건비 정도이니, 오늘날 하루 인건비를 대략 10만 원으로 잡으면 1므나는 대략 천만 원 정도 됩니다. 당시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하여 깨뜨린 향유가 300데나리온이었으니, 향유 한 병의 1/3 정도 가격입니다(물론, 당시 향유는 엄청 비쌌습니다만). 큰 사업을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작은 장사를 하기에는 충분한 돈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使者)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눅 19:14).” 주인의 일과 사업을 위해 힘껏 일하라고 했는데, 이들은 그들의 대표를 주인 뒤따라 보내어, “우리는 그자가 우리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14, 공동번역)”라고 진성서(陳情書)를 올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귀인은 결국 왕위를 받아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귀인은 종들이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그들을 부릅니다. 사실, 자신이 맡긴 일과 사업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보고자 함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눅 19:15-19)

주인은 불순종하지 않고 충성한 이들에게 성과의 배를 보답합니다. 그러자 아마도 진성서를 보냈으나 상황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던 한 종은 주인에게 나아와 이렇게 변명합니다.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온 종의 말은 이러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이 주신 금화가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두었습니다. 주인님은 지독한 분이라 맡기지도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시기에 저는 무서워서 이렇게 하였습니다.’”(눅 19:20-21)

주인에 대한 거부입니다. 충성된 종이 아니라, 반역의 종입니다. 주인을 지독한 사람(엄한 사람)으로 알고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불의한 사람으로 단정 짓는 것입니다. 결국, 주인은 그 종의 말대로 될 것이라고 말하며 심판을 선언합니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눅 19:22-26)

귀인이 왕 됨을 바라지도 않았고, 또 귀인을 믿지 않고 불신하였기에 귀인이 맡긴 일과 사업에도 충성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귀인이 왕이 되는 새로운 세상에서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이후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불순종하는 자들을 ‘원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눅 19:27).”

3.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

잘 아시겠지만, ‘귀인이 돌아올 때’라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한 므나를 받았습니다. 사업 수완이 없다면 오늘 주인의 말처럼 그 돈을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던지(은행에 맡기던지), 아니면 열심히 충성하여 사업 수완을 발휘해야 합니다. 주인에게서 돈을 받았는데, 묵혀두었다면 이것은 심판의 조건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한 므나로 주님의 일, 사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일과 사업이 우리 생각과 다를 때가 있습니다. 가령, “원수를 사랑하라”, “미워하지 말라.” 등의 말씀은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운지요! 구약 말씀의 요나가 그렇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모든 나라의 주인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구약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큰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 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욘 1:4-6)

북 왕국 이스라엘 제13 대왕 여로보암 2세(B.C.793~753)가 집권하던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를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북동쪽에 있는 니느웨(앗시리아의 수도)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원수입니다. 따라서 요나는 자신의 사명을 내던지고 니느웨 반대쪽인 다시스(스페인 쪽)로 향했습니다. 오늘 구약 본문 말씀은 다시스로 가던 배에서 생긴 일입니다. 항해하다 풍랑을 만났습니다. 파선의 위험에 선장은 배 밑층에 누워 깊이 잠든 요나를 깨워 “너의 신께 빌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재앙의 원인을 제비뽑기를 통해 찾고자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욘 1:7)” 요나가 뽑혔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요나에게 어디서 왔으며 어느 나라 사람, 어느 민족이냐고 묻고 바다를 잔잔하게 할 방법을 간구합니다.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욘 1:8-11)

요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욘 1:12).” 요나의 회개죠? 자신이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불순종했을 때의 결과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요나는 예수님의 열 므나 비유에 나오는 종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왕이심을, 창조주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 바다에 던져지는 요나

이후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고 풍랑은 잠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물고기 배 속에 사흘 동안 있었던 요나는 다시 사명을 감당합니다. 니느웨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왕이심을 인정하지 않고 충성하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끝까지 불순종하는 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물론, 예수님은 앞서 말씀드렸지만, 그들을 원수라고 말하며 내 앞에서 죽이라고 말씀합니다(눅 19:27).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이지만 확실한 심판의 종교이기도 합니다. 잔인한 말씀 같지만, 오늘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더 충격적입니다. 먼저 본문 말씀을 볼까요?

4. 일곱 인, 나팔, 대접 재앙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 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 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 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 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 분의 일이 깨지더라.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 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 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계 8:6-11)

본문 말씀은 일곱 나팔 재앙 가운데 셋째 나팔 재앙까지 말씀입니다. 생태계에 미치는 대재앙입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불순종한 사람 때문에 생태계 전체가 심판을 받습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계 6:1-17, 8:1-5)과, 일곱 나팔(계 8:6-13, 11:15-19), 일곱 대접(계 16:1-21)은 모두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계 6:17)을 가리킵니다. 이날은 심판의 날인데, 중요한 것은 이 심판이 의롭고 참되다는 것입니다(계 16:5, 7). 의롭고 참되신 하나님께서 불순종과 악행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이 세 가지 재앙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곱째 인을 떼자, 그 속에 일곱 나팔의 재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나팔은 일곱 대접 재앙을 끌어냅니다. 결국, 본격적인 대환난의 시작인,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세 번에 걸쳐 일어나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종말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이 심판은 끝으로 갈수록 점점 더 파괴적입니다.

▲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의 순서

먼저 일곱인 재앙부터 살펴볼까요? 일곱 인은 흰 말을 탄 자인 ① 정복자의 출현(계 6:1-2), ② 붉은 말을 탄 자가 일으키는 전쟁(계 6:3-4), ③ 검은 말을 탄 자를 통한 기근(계 6:5-6), ④ 청황색 말을 탄 자를 통해 이뤄지는 사망(계 6:7-8), 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순교(계 6:9-11), ⑥ 큰 지진과 해와 달, 별 등 천체의 대격변(계 6:12-14) 등입니다. 그리고 일곱째 인이 일곱 나팔 심판을 끌어냅니다.

일곱째 인을 떼자, 그 속에 일곱 나팔재앙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① 땅과 수목의 1/3을 태워버리는 우박과 불 재앙(계 8:7), ② 바다 1/3이 피가 되고 바다 생물과 배 1/3이 죽고 깨지는 불붙는 큰 산(유성?) 재앙(계 8:8-9), ③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 1/3이 쓴 쑥이 되어 쓴 물을 마시는 사람이 죽는 재앙(계 8;10-11), ④ 천체의 1/3이 파괴는 되는 재앙(계 8:12-13)입니다. 이것은 우주와 자연계에 미칠 대재앙입니다. 그러나 5,6번째 나팔재앙은 인간에게 미칠 대재앙입니다. ⑤ 황충의 재앙(계 9:1-11), ⑥ 인류 1/3의 일을 죽이는 결박한 네 천사와 이만 만(2억)의 마병대의 재앙(계 9:13-19) 등을 포함합니다.

일곱 나팔은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가지고 있는 일곱 천사를 불러냅니다(계 11:15-19, 15:1-8). 대접 심판에는 ①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을 괴롭히는 종기 재앙(계 16:2), ② 바다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죽은 재앙(계 16:3), ③ 강과 물의 근원이 피로 변하는 재앙(계 16:4-7), ④ 태양이 사람들을 태우는 재앙(계 16:8-9), ⑤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짐(계 16:10-11), ⑥ 유브라데강이 마르고 왕과 군대들이 아마겟돈으로 모여듦(계 16:12-16), ⑦ 큰 지진과 거대한 우박 재앙(계 16:17-21) 등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성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심판과 구원의 역사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입니다. 역사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고, 그 마지막 종말의 때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심판을 이야기하지만, 철학자들은 불안을 사유합니다. 창조주와 역사의 심판과 종말을 믿는 대신, 근원적 불안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5. 잠복한 불안과 근원적 불안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의 핵심은 ‘불안’입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불안을 두 가지로 나눠 설명합니다. 첫째는 ‘잠복한 불안’이고 둘째는 ‘근원적 불안’입니다. 잠복한 불안은 인간 현존재의 일상적 실존 바닥에 깔려 나직이 으르렁대는 불안이며, 근원적 불안은 인간의 실존을 뒤흔들며 밀어닥치는 불안입니다. 아마도 이 근원적 불안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심판이겠죠? 주께서 재림하시어 심판하는 날이자, 요한계시록의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이기도 합니다.

▲ 근원적 불안의 상태

아무튼,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이러한 근원적인 불안으로 인해 일상인(世人, das Man)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죽음’이라는 절대적 사태를 마주하고 이를 미리 겪어봄으로 세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본래적 실존’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은 절대적 사태이지만 이를 통해 심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 실존(그리스도교 식으로는 ‘새로운 존재’)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군산대 철학과 권순홍 교수는 하이데거의 불안 두 가지를 위협으로 번역합니다. 곧 ‘잠복한 불안’을 ‘수평적인 저강도 위협’으로, ‘근원적 불안’을 ‘수직적인 고강도 위협’으로 묘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안이 잠복해 있을 때 불안의 은근한 압박에 쫓겨 비본래적 일상에 몰두해 살아가지만, 근원적 불안이 덮치면 그 일상성에서 깨어 우리 삶의 본래적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곧 근원적 불안, 수직적인 고강도 위협이 인간을 비본래적 실존과 본래적 실존으로 가르는 중요한 사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한국 교회는 물론, 우리 대한민국은 잠복한 불안이 계속되어 근원적 불안을 소환합니다. 수평적인 저강도의 위협이 계속되어 결국 수직적인 고강도의 위협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기가 막힌 것은 근원적 불안이 하이데거처럼 비본래적 실존에서 본래적 실존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총체적 불안과 파멸로 간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불안은 하이데거처럼 실존론적이지 않고, 칼 슈미트처럼 정치․경제적이며(그는 정치를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나아가 외교·안보적인 불안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임재, 혹은 성령 충만은 수직적인 고강도의 위협이 아니라, 수직적인 고강도의 통찰로 이뤄질 것입니다. 그것은 실존의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 모든 영역에서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세상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명에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미주

(1) 이 본문은 역사적 사실, 곧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왕위를 받기 위해 로마로 간 이야기에 근거한다. 헤롯의 뒤를 이은 아켈라오는 어느 유월절 기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반란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약 3,000명의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아켈라오는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에 직면하여 로마 황제로부터 정식 왕위를 받으려고 로마로 간다. 이때 유대인들은 로마로 사람을 보내 아켈라오가 왕위를 받지 못하도록 요청한다. 그러나 아켈라오는 왕은 아니지만, 분봉왕이라는 직함을 얻어서 다시 팔레스틴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계속하여 탄압하고 살해하였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아켈라오의 방식과 비슷하지만, 주인이 누구인가에 관심을 두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불의한 세상의 주인이냐, 창조주 하나님이냐!

최병학 목사(종교인문학연구소 소장)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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