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이원성의 눈(眼)

기사승인 2024.08.08  01:53:49

공유
default_news_ad1

- 구자만 박사의 《도마복음》 풀이 (22)

▲ 우리에게 태생적으로 주어져 있는 이원적인 안목을 버리고 영혼의 눈을 떠 세상을 바라보는 계기가 필요하다. ⓒGetty Images
예수는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지금까지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어떤 귀로 들어보지도 못했고, 손으로 만져보지도 못했으며,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주겠노라.”(도마복음 17)

예수가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주겠노라’고 하신 것은 오직 묵상기도, 참선 등과 같은 직관의 체험으로 드러나는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본성, 신성, 불성, 참나 등)이다. 오묘한 진리는 신비주의자인 엑카르트, 성(聖) 프란시스 등 성자(聖者)들이 자각한 진리(생명)이며, 노자(老子)가 강조하는 하나(一)로서(混而爲一, 도덕경 14장) 일정한 모양(相)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마1:23)는 임마누엘의 체험은 보이는 것, 듣는 것 등의 분별을 버리고 진리와 하나(One)가 되는 자리이다.

요한은 진리를 영적으로 직관하여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 1서 1:1)고 하였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진리(생명)의 자리인 ‘영적인 눈’(靈眼)이 아닌 이원성인 ‘육신의 눈’에만 집착하여 분별하는 것이다(마 6:22). 우주에 충만한 신비로운 생명은 하나님(부처님)의 자리이며(佛身充滿於法界), 현대물리학적으로는 순수 에너지이다. 그 자리에서부터 모든 것이 여러 가지의 모양으로 이루어졌다(法界緣起, 롬 11:36).

천지만물은 하나의 오묘한 생명체(神性, 佛性)이며 우리 몸 전체에 생명이 가득 넘쳐 흐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원성의 탐욕심에 노예가 되어 온 천지에 충만하게 있는 생명(진리)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목적은 이원성의 마음(속박)을 벗어나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우리의 생명을 해방시키며(無始無終), 생명(神性)의 본바탕을 보는 것이다. 또한 우리 마음의 본성이 예수(부처)처럼 영원한 하나의 생명(참나)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요 17:21). 그러므로 달마대사는 ‘본래 마음(참나)을 깨달아 버리면 모든 것이 갖추어진다’고 하였다.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고 하였다. 예수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신(부처)이며, 모든 소리가 신(부처)의 음성임을 모르는 제자들에게 “왜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傳心法要, 막 8:18)고 꾸중하셨다. 지금도 서구의 이분법적인 종교는 유한 상대적인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무한 절대적이며,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신(神)을 독선적, 객관적으로 개념화, 대상화하여 전쟁과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한 유무, 존재 증명 그리고 사랑의 신에 대한 악과 부조리의 이유를 묻는 신정론(神正論)은 하나의 진리에서 벗어난 주장이다. 왜냐하면 천지우주에는 하나님 외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며(막 12:32) 하나님만이 실재이고, 하나님이 모든 존재하는 것의 근원이다. 다만 악으로 보이는 것은 비존재(非存在)를 있다고 하는 이원적인 마음의 망상(業障)이다. 현실에서 모순과 부조리가 있지만, 거듭난 실상(근본)의 눈으로 볼 때는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머무는 모든 곳마다 천국(진리)이다(隨處作主 立處皆眞, 요 3:3).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의 진리(道, 천국)에 대하여 노자(老子)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 이(夷, 평평함)라 하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니 희(希, 희미함)라 하고,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으니 미(微, 미세함)”라고, 장자(莊子)는 “팔다리와 몸뚱이를 잊고, 총명함을 버리고, 형체를 떠나고, 앎을 떠나서 크게 통함에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완전히 잊는 좌망(坐忘)이다”고, 공자(孔子)는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고 하였다.

따라서 현대물리학은 눈으로 보이는 물질은 사실 에너지의 파동으로서 텅 비어 있는 공(空)이라고 한다(諸法空). 텅 빈 진공 가운데 존재하는 신비한 생명(神性, 佛性)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는 절대적 진리이다(一切衆生悉有佛性, 롬 1:20).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대속(代贖)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인생과 우주의 실상인 오묘한 생명(진리)을 전해주기 위함이다(요 18:37). 바울처럼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생명(참나)이 내 속에 나타나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갈 1:16), 근심 걱정의 인생고(人生苦)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형통함과 만족함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圓滿具足, 마 6:33).

구자만 박사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