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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에서 섬김으로

기사승인 2024.08.06  01: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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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위에서 만난 하나님’ 4(출애굽기 3:12)

▲ Orazio Gentileschi, 「Prado」 (1633) ⓒWikipedia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부어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길 위에서 만난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으로 ‘지배에서 섬김으로’ 이런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숭배하는 강력한 우상들 중 하나가 권력입니다. ‘권력’ 하면 흔히 정치권력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남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힘으로서의 권력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작용합니다. 공적인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도 말입니다. 공적 영역에서의 권력이야 당장 직장 생활만 떠올려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진급을 원하는 이유는 그저 월급 때문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위의 상승은 곧 권력의 상승을 의미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저도 솔직히 부목사로 목회하는 것보다 담임목사로 목회하는 게 더 좋습니다. 물론 그 책임의 무게는 훨씬 더 크게 느껴지지만요.

사역인 영역에서는 권력이 작용하지 않습니까? 그럴리가요. 당장 우리의 가정을 보십시오. 오랜 시간, 남편이자 아버지인 남성이 가장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물론 지금이야 가장이라는 말이 무색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부장적 문화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3040대 젊은 부부의 생활에도 여전히 가부장적 문화가 잔존해 있습니다. 맞벌이 부부임에도 가사 일은 주로 아내인 여성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그 중 일부를 도와줄 뿐입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다르다는 이 무의식적 가정은 분명 가부장적 문화의 산물입니다. 만약 이 가부장적 문화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여성이 있다면, 그 가정에서는 엄청난 파장이 일어납니다. 3040대 젊은 부부들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실 젊은 부부 간의 갈등의 상당수는 따지고보면 가부장적 문화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명절에 남편의 부모님 집에 먼저 가야 합니까? 아내의 부모님 집에 먼저 가야 합니까? 부부 간의 이런 식의 주도권 다툼도 결국 사적 영역에서의 권력 다툼입니다.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부부 간에 내 식대로 아내나 남편을 통제하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정생활에서 서로 습관의 차이, 성향의 차이, 생활방식의 차이가 나타났을 때, 부부는 서로를 자기 식대로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성향을 드러내기 일쑤입니다. 이것은 곧장 다툼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물론 다툼 없이 한쪽이 일방적으로 억지로 참고 넘어갈 수는 있겠지요. 이 경우에는 나중에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억압된 감정이 한번에 터질 날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부부 싸움이라는 게 대부분 배우자를 내 식대로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되지 않습니까? 부부 간의 이런 식의 다툼도 결국 사적 영역에서의 권력 다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권력 다툼은 인간관계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의지와 욕구가 있는 곳에는 항상 권력 다툼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 권력 다툼은 지위 경쟁으로 이어집니다. 지위는 자기 권력을 공적으로 승인해 주고 정당화 주기 때문입니다. 지위 경쟁이 얼마나 우리 삶에 뿌리 깊이 내재화되어 있는지 몇 가지 단적인 예만 들어도 확인 가능합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통성명하고, 명함을 내미는 일 아닙니까? 명함에는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직업과 직위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를 확인하는 순간, 나와 너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위계가 형성됩니다. 동시에 사회적 지위는 내 말의 무게감을 좌우하는 힘이 됩니다. 아이들도 처음 만났을 때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나이를 확인합니다. 위계를 세우고, 주도권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권력 지향적일까요? 왜 남을 그렇게 자기 식대로 통제하고 자기 뜻대로 지배하고 싶어 할까요? 이것은 사실 불안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서 사람은 자기 불안을 권력의지로 극복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역설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자기 삶을 지배할 힘이 없습니다. 우리 삶은 우리가 선택하거나 결정한 적 없는 수많은 요소들로 에워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무기력하고 그 무기력함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 보상으로 우리는 권력의지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이 불안과 두려움은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기원합니까? 성경은 이 불안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죄로부터 기원한다고 말합니다. 시편 42편 5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람이 선택하는 대안은 자기중심성과 이기심을 강화하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발로가 주로 자기 바깥의 상황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고 타인을 지배하려는 일로 표현된다는 데 있습니다. 진짜로 통제해야 할 것은 자기 의지와 생각과 감정과 욕구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표출된 권력의지가, 권력에 대한 집착이 우리의 불안을 해결해 줍니까? 그럴리가요. 권력을 쟁취한 사람, 높은 지위를 쟁취한 사람은 그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유지하려면 오히려 권력을 더욱 더 강화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이뿐 아닙니다. 권력이 가져다주는 이런 불안은 사람의 악한 본성을 자극하고 권력을 폭력으로 뒤바꾸어 행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타락하게 만드는지 이미 역사 속에서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국민들의 축하와 열광 속에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가 손목에 수갑을 차고 감옥에 들어가는 대통령들만 봐도 권력이 양산하는 타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권력, 곧 우리 바깥의 상황과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길 대신에 취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대안을 기독교 신앙에서 찾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은 자기중심적으로 남을 지배하려는 삶에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전환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전형을 보여준 사람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노예에서 애굽의 왕자로, 애굽의 왕자에서 다시 출애굽의 지도자로 그 운명이 여러 차례 뒤바뀐 인물입니다. 그는 본래 야곱의 자손, 곧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무렵, 애굽의 최고 권력자인 바로는 이스라엘을 향해 엄청난 폭력과 악을 행사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새로 태어나는 아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1장 8절 이하를 보십시오. 아무리 노예로 부리고 중역으로 학대를 가해도 이스라엘 자손이 더욱 번성해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라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인간의 불안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바로가 이렇게 살해 행각을 벌이는 와중에 한 레위 가족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엄마는 그를 살리고자 석달 동안이나 숨겼습니다. 하지만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아기를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 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사실 그곳은 바로의 딸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의 딸이 이 아기를 발견합니다. 출애굽기 2장 6절에 의하면, 바로의 딸은 갈대 상자 안에서 우는 아기의 모습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람에게는 권력의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양심도 있고 정의감도 있습니다. 자비심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들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터치하는 핵심 통로입니다. 정의감과 자비심은 하나님의 마음의 일부입니다. 권력 대신에, 자기중심적으로 남을 지배하려는 의지 대신에 우리가 희망의 단서로 붙잡아야 하는 게 바로 이 마음입니다.

바로의 딸이 품은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살아남아 애굽의 왕자가 된 이가 바로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딸이 지어진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이름은 사실 이스라엘에게 행하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친히 내려가셔서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건져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의 동역자로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하신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출애굽기 3장 7-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애굽의 최고 권력자인 바로와 얼마나 다릅니까?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권력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바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괴롭게 했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시어 친히 내려오시어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은 결국 하늘보좌를 비우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까? 우리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시고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살립니까? 권력, 통제와 지배 욕구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열망해야 합니까? 바로의 자리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바로의 자리를 열망하는 자는 불안이 뒤따르나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에게는 자비가 뒤따릅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 그는 어디에 거주하고 있었습니까? 미디안 광야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왕자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 사연이 출애굽기 2장 11-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성한 모세는 어느날 동족의 고된 노동을 살펴 보았습니다. 바로에게는 이스라엘이 노예였을지 몰라도 모세에게는 동족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자비심을 가졌습니다. 바로의 딸이 모세를 보고 품었던 자비심과 같습니다. 사실 이 마음은 애굽의 왕자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고생하는 동족을 살피러 나갔던 모세는 마침 애굽 사람이 동족 한 사람을 치는 광경을 목도합니다. 화가 난 모세는 들키지 않게 그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튿날 모세는 이스라엘의 노역 현장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족끼리 다툼이 일어난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만류하면서 먼저 잘못한 사람을 나무랐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2장 14절입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알고보니 모세의 살해 행각이 다 탄로난 것이었습니다. 바로의 귀에도 이 일이 전해졌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모세에게 불행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모세가 바로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복된 일이자 바로처럼 권력에 취해 타락하지 않을 기회를 얻은 일입니다. 모세는 미디안에서 양을 치는 목자로 생활했습니다. 타인을 제 뜻대로 지배하는 생활이 아니라 약한 동물을 자비로 돌보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이렇게 권력에 대한 열망을 내려놓았을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필요한 자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자세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든 내 뜻대로 상황을 통제하고 사람을 지배하려는 태도를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신 뜻과 자비하신 마음으로 행하시는 모든 일을 신뢰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굳이 뭔가를 하려거든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일, 자비를 베푸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애굽의 왕자 자리를 내려놓고 양치지로 생활하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장 10절에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3장 11절에서 이렇게 대구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자기 한계를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게 하나님을 영접할 최상의 기회입니다. 우리는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섬김으로써만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삶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3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이 곧 우리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함께하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하나님은 3장 12절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떤 삶으로 부름받았고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밝히셨습니다. 우리는 권력을 숭배하는 바로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바로의 노예나 추종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의 지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심에 순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탐욕과 폭력이 만연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와 공의가 강물처럼 흐리는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의 권력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 타인을 지배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심을 닮아 타인을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이게 우리가 살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이 내 뜻대로 전개되지 않는다고 해서, 내 주변 사람이 내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안해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삶을 자비와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어떤 문제도 문제될 게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어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반영해 자비롭고 친절하게 우리 삶을 대하고 우리 주변 사람을 대하는 일입니다. 내 뜻대로 전개되지 않는 상황을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비를 베풀고 사랑하고 존중하고 감사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통제하고 지배해야 할 것은 우리의 권력의지이자 지배 성향입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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