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강림절 열한째 주일(애 1:19-22; 요일 5:5-12; 눅 18:35-43)
* 최병학 목사의 CCL교회력 세 본문 설교를 다시 연재합니다. CCL은 ‘최병학 목사의 그리스도론적 주일성서일과(Choi’s Christologic Lectionary, 2021)’의 약자입니다. 현재 한국교회 설교 강단에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교회력은 개정공동성서정과(RCL, Revised Common Lectionary, 1992)와 삼위일체교회력(1979)입니다. 현재 영어권 나라들은 대부분 RCL을 사용합니다. 한국교회도 예장 통합, 기감 교단 등이 RCL을 사용하지만, 기장 교단은 삼위일체교회력을 사용합니다. 물론, 독일은 별도의 교회력을 따릅니다. 따라서 독일에서 나온 교회력을 사용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2006년도 미국장로교(PCUSA) 목사들의 61%, 그보다 5년 앞선 2001년에는 미국 성공회가 99%, 미국 루터교는 98%, 미국그리스도연합교회는 87%가 이미 교회력과 공동성서정과를 항상, 혹은 거의 사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Ronald P. Byars, “An Advent Gift: The Eschatological Promise,” Interpretation 62-4 (October, 2008), 375]. 교회력과 성서정과는 성경의 전통입니다. 물론, 중세 시대에 잠시 왜곡되었기에 종교개혁자들이 이를 축소하였지만, 사실 교회력과 성서정과의 한계를 지적했을 뿐이지,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력과 성서정과를 통해 말씀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한국교회에 미래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2021년 9월 코로나 자가격리 기간 중 하나님께서 저에게 교회력과 성서정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각 복음서를 중심으로 4년 동안 전체 신구약 성서를 다 살펴볼 수 있는 주일 성서정과를 만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CCL은 삼위일체교회력과 RCL의 장점을 취합한 교회력 성서정과입니다. 절기에 창조절을 넣고, 삼위일체 신론 중심 교회력이며, 성서정과로는 네 복음서를 중심으로 4년을 한 주기로 합니다. 이것은 RCL의 기독론적 관점을 취하되, 매년 돌아가는 절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각 해의 주제를 ‘가’해는 마태복음 중심 ‘생명의 하나님’, ‘나’해는 마가복음 중심 ‘평화의 예수님’, ‘다’해는 누가복음 중심 ‘정의의 성령님’, 마지막 ‘라’해는 ‘사랑의 교회 공동체’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회 공동체라는 주제로 주일 세 본문 말씀이 구성됩니다. 시편은 교독문으로 읽기에 넣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기서 서신서에는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 말씀이 들어갑니다. 서신서가 교회에 주는 말씀이라면, 사도행전은 교회의 시작이며 요한계시록은 교회의 위기에 관한 말씀으로 모두 교회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말씀으로 다시 새로워지기를 바라며 교회력 설교를 다시 연재합니다. 감사합니다. |
1. 위대한 교회는 다 어디로 갔을까?
▲ 짐 콜린스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 표지와 몰락의 5단계 |
오늘 설교 제목과 비슷한 세계적인 경영학자 짐 콜린스의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김영사, 2010)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랜 연구와 치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기업이 몰락하는 5단계 과정을 밝힌 기업 전략 매뉴얼입니다. 콜린스는 6,000년이 넘는 기업의 역사를 5년에 걸쳐 끈질기고 집요하게, 그리고 철저히 조사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아무리 강한 기업이라도, 아무리 뛰어난 리더라도 찰나의 순간에 휘청거리고 몰락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책의 목차로 구성이 되어 있는, 콜린스가 말하는 강한 기업이 몰락하는 5단계는 이렇습니다.
1단계: 성공으로부터 자만심이 생겨나는 단계
2단계: 원칙 없이 더 많은 욕심을 내는 단계
3단계: 위험과 위기 가능성을 부정하는 단계
4단계: 구원을 찾아 헤매는 단계
5단계: 유명무실해지거나 생명이 끝나는 단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몰락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 교회는 매우 심각한 위기상황이지만 그 위험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콜린스의 3단계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한국 교회는 20세기 말에 1단계를 통해 부흥과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후 21세기 초에 2단계로 접어들어 원칙 없이(곧, 말씀 없이, 상식 없이, 도덕성 없이) 더 많은 욕심을 부려 3단계에 진입했습니다. 이제 2030년부터 4단계에 접어들 터인데, 그때 반성해도 늦었습니다. 결국, 21세기 중반에 한국 교회는 유명무실해지거나 생명이 끝나는 단계에 접어들 것입니다. 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생명은 붙어 있으나, 별 존재가치가 없는 공동체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러나 콜린스는 서문에서, 기업이 쓰러질 수 있지만, 때로는 다시 일어선다고 말하면서 약간의 희망을 선포합니다.
“이 책의 목적은 정확한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절대 망할 것 같지 않던 기업들이 어떻게 몰락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여 리더들이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또한, 몰락한 기업의 최후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무엇을 배워 우리의 상황에 적용할 것인지를 살펴본다. 여기에서 논의하는 ‘몰락의 5단계’를 이해한다면 리더는 기업이 ‘우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로 추락해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지는 위험’을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몰락은 피할 수 있다. 또한, 몰락의 전조는 조기에 감지할 수 있다. 무엇보다 5단계까지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이상 몰락은 되돌릴 수 있다. 강한 기업도 언제든 쓰러질 수 있지만 때로는 다시 일어서기도 한다(7~8).”
그렇습니다. 지금 곳곳에 몰락의 전조가 보입니다. ‘신학 없는 신앙’,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성도’, ‘장사치로 변해버린 목회자’, ‘이익만 추구하는 기업으로 변해버린 교회’가 말씀 없이, 상식 없이, 도덕성 없이 그 욕망의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결국, 세상적 욕심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콜린스도 테이터를 통해서 연구한 구체적인 예를 욕심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위대했던 기업이 추락하는 원인은 대부분 혁신 거부, 과감한 행동 부재, 변화 등한시에 있거나 아니면 단순히 게을러서 현실에 안주하다가 뒤처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조사한 데이터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물론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기업은 결국 망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조사한 기업들에서 현실에 안주해 몰락했다는 증거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그보다는 오히려 과도한 욕심으로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70~71).”
한국 교회는 과도한 욕심 때문에, 바벨탑에 대한 욕망 때문에 망할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식 적자생존(適者生存)과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더 크고, 더 좋은 건물과 더 많은 물질과 성도를 소유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말뿐이며 오히려 그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었습니다.
오늘 구약 말씀 예레미야 애가는 바로 이러한 나라에 대한 심판의 노래입니다.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현장에서, 절규하는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민족 멸망 애곡(哀曲)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오래전부터 선포했지만, 회개하지 않은 예루살렘의 목은 꼿꼿했습니다. 결국, 처참하게 파멸된 예루살렘의 모습을 목격하자 예레미야는 큰 슬픔을 느낍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복음서 말씀에 나오는 여리고 성의 한 시각장애인처럼 예수님께 찾아와 “불쌍히 여기소서”를 외치면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서신서 말씀인 요한일서에 나오는 사랑의 사도 요한의 말처럼 세상을 이기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위대한 교회의 소멸은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찾지 않은 것을 깨닫고 여리고 맹인처럼 다시 한번 주님을 찾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멸망 당시, 유다는 ‘반 바벨론 동맹’에 가입했던 주변 나라인 모압과 암몬, 애돔 등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바벨론의 편을 들어 유다를 배반하였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안에 있던 제사장과 장로들은 먹을 것을 찾다가 모두 죽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애 1:19).” 여기서 사랑하는 자(לַֽמְאַהֲבַי֙)는 모압과 암몬, 그리고 에돔 등 동맹국(Allies, NIV성경)입니다. 기절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애 1:20-21a)
성안에서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굶어 죽고 성 밖에서는 아들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갑니다. 안팎의 고통에 탄식해도 위로하는 자가 없습니다. 원수들은 오히려 이 상황을 기뻐합니다. 그런데도 예레미야는 기도합니다. 원수들도 주께서 선포하신 날에 자신과 똑같이 당하게 해달라고 고백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애 1:21b-22)
3.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은 죄악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죄도 심판하실 것이며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이들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심판에 오늘 우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늦지 않았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늦기 전에 구원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구원을 찾아 나선 여리고 성의 한 시각장애인을 소개합니다.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서 큰소리로 외칩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눅 18:35-39)
▲ 니콜라 푸생 <여리고 맹인>(1594~1665) |
시각장애인은 이전처럼 여리고 성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듯이 예수님께 구걸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실 것을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예수님을 그렇게 호칭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분이심을 인정했으며 다윗의 왕위에 앉아 왕권을 행사할 메시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시각장애인은 메시아를 바라보며 메시아 대망 사상으로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부릅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눅 18:40-43)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증언하는 이가 성령입니다. 성령의 증언, 혹은 성령의 내주하심이 아니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강림주일을 지내고 있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맹인도 이렇게 예수님을 고백하고 찾을 수 없습니다. 또한, 무너진 교회도 다시 일어설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그것을 잘 알았습니다. 서신서 말씀을 볼까요?
4. 세상을 이기는 자, 예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일 5:5-7)
성령 신학자로 부를 수 있는 장 칼뱅은 성령의 세 가지 사역, 곧 ‘우주적’, ‘일반은총적’, ‘특별은총적’ 역사를 『기독교 강요』 전권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령, 성령의 ‘우주적 역사’는 창조와 섭리에 관여하며(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천지를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1.14.20), 성령의 ‘일반은총적 역사’는 인류의 창조와 보존에 관계됩니다(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은 것은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1.15.5). 또한, 성령의 ‘특별은총적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는 구원의 은총과 관련됩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오직 택함 받은 백성에게만 미치기 때문에 ‘교회적 은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칼뱅은 ‘성령과 우주’, ‘성령과 사람’, ‘성령과 교회’를 통해 성령의 사역을 다루는 것입니다.
▲ 삼위일체, 양태론, 삼신론의 차이 |
사도 요한에 의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단지 세례받을 때의 ‘물’만이 아닙니다. 십자가 공로인 ‘피’와 함께 진리인 ‘성령의 증언’으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셋은 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요일 5:8-10)
법정에서 사람의 증언도 중요할진대, 하나님의 증언은 말도 못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증언하나요? 바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하나님의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위대한 교회의 시대가 저물어 갑니다. 저 위대한 교회는 다 어디로 갔나요? 교회를 이끌던 성령의 사람, 시대의 리더는 어디로 갔나요? 앞서 서두에 언급한 콜린스의 책에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올바른 리더에 관한 언급입니다. 콜린스는 리더에게 필요한 것을 꾸준히 개선을 주도해 나가는 것으로 말합니다. 개혁이죠? 리더에게 필요한 것을 바로 꾸준한 개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평정심을 갖는 것’, ‘거짓과 속임수에 넘어지지 않는 것’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나쁜 리더의 특성과 훌륭한 리더의 조건 |
“올바른 리더는 좋은 시절이든 나쁜 시절이든, 혹은 위협에 직면하든 기회에 직면하든 항상 위기감을 느낀다. 그들은 가슴속에 활활 타오르는 석탄 덩어리를 품고 있는 것처럼 창의적인 충동과 진보를 향한 내적 욕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위협에 대면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평정을 잃지 않는다. 위기가 아닐 때 이를 거짓으로 지어내고 기업이 마치 큰 화재로 곧 무너져 내릴 ‘불타는 승강장’에 서 있다고 소리치는 것은 냉소주의를 부른다. 올바른 리더는 속임수에 의존하지 않고 불타는 승강장에 서 있든 그렇지 않든 꾸준히 개선을 주도해 나간다(158).”
지금, 구원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몰락할 것입니다. 그 구원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거짓과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평정심을 가지고 꾸준히 개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리더를 찾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영원한 리더는 예수님입니다. 세상을 이기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부르고, 따르는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의 리더도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알려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리더와 함께 교회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혁명적인 변화보다 꾸준히 개혁하는 변화가 다시 한국 교회를 살릴 것입니다. 그러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종교인문학연구소 소장) hak-9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