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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 밤을 지날 때

기사승인 2024.06.18  03:2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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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의 빛을 따르다’ 4(요한복음 16:6-7)

▲ Frans Francken, 「The Parable of the Rich Man and Lazarus」 ⓒGetty Images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지금 여기 나 있는 곳에 함께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기원합니다. ‘진리의 빛을 따르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으로 ‘어둔 밤을 지날 때’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이 세상 너머의 삶, 곧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살 수 없고 떠나살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속박되거나 고착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무덤덤하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파괴적 속성들이 상존해 있습니다. 이 세상이 내포하고 있는 신념과 가치 체계, 제도와 인습, 존재 방식 속에는 거짓과 속임수와 악이 뒤섞여 있습니다. 반생명적이고 반인간적인 요소들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부정하는 죄와 무지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맹종하기보다 직시하고 성찰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잘 적응하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데에만 급급할 게 아니라 이 세상에 도전하고 이 세상의 부조리에 응전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초연하게 살고, 이 세상을 초월하며 사는 일에도 힘써야 합니다. 이 세상과 창조적 긴장을 유지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 이하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부자는 왜 음부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거지 나사로는 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까? 그 이유를 16장 25절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만약 부자가 거지 나사로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마음과 부와 가난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이 세상의 죄와 악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자기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한 성찰의 괴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며 살았다면, 적어도 아브라함이 그에게 너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았으니 여기에서는 괴로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은 하지 못하지 않았을까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세상살이에 대한 성찰적 자세와 영적 대응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때로는 심지어 이 세상의 미움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당장은 세상에서 손해 볼 각오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2절에서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당할 박해와 순교를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이 세상이 그분께 순종하며 살기로 결단한 제자들에게만 호의적일 리 없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박해와 순교는 초대교회를 통해 나타난 놀라운 부흥과 변혁과 승리의 역사로 전환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미움은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그래서 로마서 8장 18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물론 오늘날 우리에게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한 유형의 박해와 순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이 세상에 도전하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우리 안에 침투한 세상, 이 세상에 잠식되어 이 세상의 지배를 받는 우리의 내면에 도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 내면에 속삭이는 갖가지 거짓 신념들에 도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기로 결단한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세상에 과감하게 ‘아니오’를 말할 때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이 세상의 논리에 매여살 수는 없어. 이 세상의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에게 상처를 주며 살 수는 없어. 이 세상의 가치 체계에 종속되어 패배의식을 갖고 살 수는 없어.’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거룩한 분노를 표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야. 나는 하나님의 것이야. 이 세상이 이대로 나를 지배하게 둘 수는 없어. 나는 하나님의 선한 손에 붙들려야 해.’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희생제물로 장사하는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그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고 하나님의 집을 정화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안의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를 정화하기 위해 우리 내면과 삶을 지배하는 우리 안의 이 세상을 청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정하고 멀리하도록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은밀하게 작동하는 거짓말들을 깨어 부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취해야 할 이 세상에 대한 도전입니다.

물론 우리 안에 침투한 이 세상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우리 안에 침투한 이 세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움켜잡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논리와 가치가 우리를 제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지배에 어떤 식으로든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한 도전은 마치 우리가 택한 안전판을 스스로 제거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아래 무한한 허공 속으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에 다시 사로잡힐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이 세상의 적대행위는 애써 억제해 둔 우리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 나 때문에 그래도 그 동안 덜 불안하게 산 것 아니야? 내 말 믿고 그래도 좀 편하게 지낸 것 아니야? 나 없이 너에게 무슨 희망이 있는데?’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준 게 아닙니다. 그것을 잠시 안 보이게 가려주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감추고 억압할 임시방편을 제공해 주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은 결코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은 타락한 우리 본성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 존재의 근거이자 원천이신 하나님과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가 될 때야 비로소 증발해 버립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8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확언합니다. “하나님, 당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평안이 없나이다.”

우리의 근원적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는 신호이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인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지독하게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이고,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 매인 우리 자신을 이 세상에서 떼어내어 다시 하나님께 돌려 놓기 위해선 반드시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자꾸 회피하려고만 든다면 이 세상의 지배에 더욱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회피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 내면에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일단 먹을 것부터 많이 챙겨, 언제 없어질지 모르니까 될 수 있으면 많이 쌓아둬,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밟고 올라가,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까 될 수 있는 한 높이 올라가, 버림받지 않으려면 네가  직접 통제해, 언제 버림받을지 모르니까 될 수 있는 한 힘을 길러.’

반면에 우리가 만약 이 세상이 제시한 회피 전략을 내려놓고 불안과 두려움을 직시할 용기를 낸다면, 하나님께로 향한 길이 보일 것이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새로운 삶, 진정으로 참되고 아름답고 풍요한 삶이 우리 앞에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의 대안 없이 우리의 근원적인 불안과 두려움의 문제를 직시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손전등도 하나 없이 어둔 밤, 홀로 있는 일이 어디 쉬운가요? 의지할 수 있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홀로 서 있는 일, 출입구가 없는 작은 방에 나 나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는 일, 괴롭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상황을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일, 어디 쉬운가요?

세계적인 임상심리학자인 마샤 리네한은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회고하면서 출입구 없는 작은 방에 홀로 남겨진 지옥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해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녀에 의하면, 자해는 내면의 극한 괴로움을 육체의 고통으로 치환시키고 그 보상으로 분비되는 고통 억제 호르몬인 엔돌핀의 위안을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어둔 밤을 지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5절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실 일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부재 상황이 두려웠을 터입니다.

더욱이 앞서 16장 2절에서 예수님이 장차 너희가 출교와 순교를 당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 끝에 이렇게 당신이 떠나가신단 말을 꺼내 놓으셨으니, 제자들의 두려움은 더 가중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16장 6절에서 이런 제자들의 심정을 헤아리셨습니다. 그리고 16장 7절에서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당신이 떠나가는 건 걱정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유익한 일이라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떠나가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곰곰히 다시 생각해 볼까요? 제자들은 그간 육체적으로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왔습니다. 제자들에게 그분은 언제나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도 충분히 안심할 수 있을만큼 예수님은 충분히 자기들 곁에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가까이에서 날마다 엄청난 기적을 목도했습니다. 신비한 은혜들을 충만히 체험했습니다. 하나같이 드라마틱하고 찬란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게 모두 꿈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정신이 번쩍 드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분을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다니요. 손을 뻗어 붙잡을 수 없다니요.’ 제자들은 다시 세상에 홀로 남겨지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다시 세상을 의지할 순 없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곧 제자들에게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예수님 없이 예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제자들의 지금 이 상황이 믿음을 지닌 우리의 실존적 상황입니다.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오롯이 홀로 우리의 근원적 불안과 두려움을 감내해야 합니다.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예수님 없이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이와 관련해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소개하십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은 우리 곁에 부재하신 게 아니라 성령님으로 우리에게 임재해 계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곁을 떠나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령님을 통해 우리 존재의 심연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신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안에 더 깊이 모시고 예수님과 더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우리 바깥에 현존하시는 예수님보다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할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다고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귀로 들을 수 있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면 마음의 눈과 영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과 성품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제대로 알게 된 순간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시공간에 함께 계셨던 때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에 사로잡힌 이후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예수님을 성령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그 내면으로부터 다시 보고 다시 듣게 됨으로써 예수님을 더 온전히 알고 더 온전히 모시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의 발달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마디로 부모로부터 독립의 과정입니다. 자랄수록 부모와의 피부 접촉은 줄어들지만 부모와의 정신적 교감은 깊어집니다. 자랄수록 부모의 물리적 도움은 덜 필요로 하지만 부모가 보여준 삶의 태도와 교훈의 영향력은 더 깊어지고 확장됩니다. 성숙한 자녀들은 자신의 삶에 나타난 부모의 흔적을 통해 부모를 이해하고 부모와 교감합니다. 부모가 그저 물리적 접촉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내재화된 대상이 될 때 아이는 비로소 성인이 됩니다. 부모와 떨어져 있어도 단절감이 없고, 부모와 떨어져 지내도 부모의 지지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저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 물리적으로 접촉하고 싶은 대상으로만 취급하고 그 정도의 수준에서 예수님과 관계를 형성하려 한다면, 우리는 계속 예수님의 부재를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내재화된 대상이 되어야 예수님이 부재하는 듯한 순간에도 예수님의 현존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으로서의 예수님을 우리 안에 내재화된 대상으로 확장, 심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8절 이하에서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언급하신 내용을 살펴보십시오. 성령님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세상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성령님은 곧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받아들이도록 도우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깨닫도록 도우십니다. 성령님은 이 세상의 권세자들을 심판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통치에 순응하도록 이끄십니다. 성령님은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진리를 우리가 알게 하시고, 그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한마디로 성령님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현존하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에게서 진리가 빛을 발하도록 도우십니다. 

우리가 앞서 제기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더 이상 세상을 의지할 수 없어 불안과 두려움을 오롯이 홀로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까?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드라마틱한 사인과 징조가 없어도, 신비한 체험이 없어도, 강렬한 느낌이 없어도,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은밀하게 우리를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둔 밤을 지날 때에도 태양은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여전히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우리 내면을 이리 저리 뒤흔들며 우리를 지독하게 괴롭게 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항상 우리 심연에 그대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신뢰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우 단순해집니다. 그냥 계속 예수님 곁에 예수님 제자로 남아 있으면 됩니다. 믿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주의를 집중하고 또 집중하면 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과 삶을 우리 내면에 그려보고 또 그려보면 됩니다. 소망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약속을 회상하고 또 회상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지향하려는 단순한 목적 하나로 이처럼 단순한 영적 실천 하나를 그저 단순하게 반복하여 실천하다 보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의도하시는 대로 예수님은 우리 바깥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화된 대상으로 다가오십니다. 애써 찾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반가이 맞이해야 할 대상으로 다가오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태풍이 일어나도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멈추지 않는 한 태풍은 반드시 지나갑니다. 인생의 어둔 밤을 지날 때, 우리의 존재를 뒤흔드는 불안과 두려움을 오롯이 홀로 견뎌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을 때, 그때에도 우리가 우리의 신앙의 행위와 영적 실천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과 평강이 우리의 존재와 삶 구석구석에 깃들 것이며, 우리는 예수님과의 깊은 연합과 사귐 속에서 이 세상을 능가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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