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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는 성적 결합을 통해 유전되는가?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과 《신국론》

기사승인 2024.06.17  03: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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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의 ‘기고만장’(基古萬張,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 19

이 원고와 영상은 ‘사이너머’ 연구소에 진행하고 있는 채수일 교수의 ‘기고만장: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입니다. 기독교 고전을 독자들과 함께 읽고 우리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입니다. 영상과 원고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채수일 교수님과 사이너머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주

여러분은 모든 인간이 이른바 ‘원죄’라는 것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믿습니까? ‘최초의, 피할 수 없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가 원죄이고, 그런 의미에서 원죄는 인간의 성적 결합과 출산을 통해 지속되고 또 유전된다고 생각하시는가요?

이런 ‘원죄론’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년-430년)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신학자가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로마의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년대-235년), 리옹의 이레나이우스(130년-202년) 등 초기 교부들도 원죄를 언급했습니다.

히폴리투스는 아담과 하와의 죄악으로 인해 인간 본성이 타락했고,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와 죽을 운명에 처해져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영아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레나이우스는 불순종을 원죄로 해석했고, 그로 인해 인간의 영혼이 죽음에 처하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원죄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과 구원을 위해 신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역사를 더 소급해 올라가면 우리는 사도 바울(5년경-64/67년)에게서 ‘원죄론’의 발단을 만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롬 5,12)라고 말했는데요, 아담의 행위로 죄와 죽음이 인간의 운명이 되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러면 아담의 죄, 최초의 인간이 지었다는 죄는 무엇일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말라는 신의 명령을 어긴 죄, 곧 불순종이 죄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최초의 인간이 저지른 죄로 인해 인류 전체가 죄악성에 물들어 있다는 교리가 소위 ‘원죄론’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죄는 그의 후손들에게 유전적으로 전달되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의 상태에 있고, 죄를 지을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아담의 원죄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유전론을 동원해야 하고, 출산을 위해서는 성관계가 전제되기 때문에, ‘원죄론’은 자연스럽게 성(性)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동반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원죄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십자가 죽음)만이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는 교리와 논리적 연관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죄가 인간 본성에 미치는 영향과 구원의 필요성을 명확하게 제시함으로써 ‘원죄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년-430년)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이 가톨릭교회의 정통 교리로 결의된 것은 1545년부터 1563년에 열린 트렌토 공의회에서였습니다. 아담의 죄가 모든 인간에게 유전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을 재확인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원죄란 무엇이고, 과연 성적 결합을 통해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것일까요? 원죄에 대한 이런 주장은 “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창 1,27-28)는 신의 명령과 인간을 성적 존재로 창조하신 신의 의지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요? 죄를 유전시키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그러면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동성애를 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말일까요? 성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본다면, 인간성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과연 어떤 의미로 ‘원죄’를 이해했을까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은 그의 작품 《고백록》(Confessions)에서 부분적으로 실려 있고, 《신국론》(De Civitate Dei) 14권 11장에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신국론》 14권 11장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의 원죄는 ‘불순종’입니다. 그리고 불순종은 ‘오만’에서 오고, 오만은 모든 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오만은 전도된 우월감에 대한 욕구입니다.(1) 전도된 우월감은 마음이 의지해야 할 원리를 저버리고, 어떤 면에서 자신이 스스로 원리가 되고, 원리일 때 발생합니다.(2) 다시 말해 인간이 신처럼 되려는 오만, 그러지 말라는 신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 원죄라는 것이지요. 인간은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창 3,5)는 사탄의 말을 좋아했고,(3) 그래서 결국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순종은 인간을 감정의 동요에 예속시켰다고 합니다.(4) 그리고 감정의 동요는 탐욕에서 비롯됩니다. 탐욕은 일반 명사이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욕’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정욕’은 수많은 사물들에 대해 표현될 수 있지만, 대게 육체의 치부들을 자극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인간이 아담이라는 한 인간 안에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 응보의 연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공동의 파멸 속으로 추락했으며, 하나님의 정의에 입각해서 벌을 받은 이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개별적으로 속량될 처지가 되었다.”(5)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를 유전보다는 연좌 개념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좌에 따른 벌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한 구원에 초점을 두는 것이 그의 ‘원죄론’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의 죄가 유해한 욕구인 욕정에 의해 후대로 전달되어, 인간의 자유의지가 심각한 손상을 입어 인류는 저주받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인류의 본성이 아담이 죄를 지은 순간부터 바뀌어,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 죄를 짓거나 짓지 않는 것 중 선택할 능력이 있었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 전 인류는 죄를 짓지 않는 자유를 선택할 자유가 없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6)

▲ 오용된 원죄론은 필연코 성의 문제와 관련될 수밖에 없다. ⓒGetty Images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전에 인간을 낳아 번식하라는 축복이 주어진 것을 긍정합니다. “혼인의 축복, 부부들이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을 채우라는 축복은 타락한 사람들에게도 남아있었지만, 그것은 원래 타락 이전에 주어졌으므로 자녀들의 생산은 결혼의 영광에 해당하는 것이지, 죄에 대한 징벌에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시켰습니다.”(7) 부부 결합은 하나님이 제정하고 축복한 것이고,(8)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자녀를 생산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9)

그러나 ‘정욕’은 범죄 이후에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신이 정욕에 휘둘려 자신에게 효율적 명령을 내리지 못한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정신이 정말 부끄러운 점은, 본성상 정신보다 하위여서 정신에 종속되어 있어야 할 육체로부터 반항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10)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의 자연스런 가치를 폄훼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심지어 인간의 성기에 대해서도 아주 세세하게 논합니다.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입에 올리는 것이 음탕하다고 비난받을 것에 대해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전혀 염려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로서는 음탕하다고 꼬집을 말이 따로 없었을 것이며, 국부를 두고 무슨 말을 하든 모두가 점잖은 말이고, 우리가 신체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 하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든지 성기의 갑작스런 발기를 세세하게 논하는 이 글을 보고서 불순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인간의 천성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잘못을 피하려고 노력하시라. 자신의 추잡한 행사에 대해 각성할 것이지 우리처럼 필요에서 나오는 언사를 피하려 하지 마시라. 정숙하고 경건하게 이 글을 읽거나 듣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에 대해 나를 무난히 용서하리라. 나는 성의 자연스런 가치와 정욕의 기원에 대한 불신감을 논박하고 있기 때문이다.”(11)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욕도 의지에 의해 제어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하위의 지체들을 순종시키는 힘을 간직할 수 있었는데 자신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 힘을 잃어버렸을 뿐이라는 것이지요.(12)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이해가 잘못 이해된 부분이 있었음을 그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원죄론’은 인간을 타고난 죄인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 존재를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시각에서 보는 단점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파괴하고 죄책감과 절망감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원죄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이브가 지은 것이고 유전(혹은 연좌)되는 것이기에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은 개인의 무책임성을 조장하거나 끝없는 절망의 심연에 빠지게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렇게 말하지 안 했지만, 성(性)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여성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성이 남성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말했지만, 성차별은 반대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이 창조하신 남녀의 성차별은 주님의 교회에 베풀어 주신 은혜 안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남녀는 다 동등합니다. 그것은 마치 은혜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또는 자유인이나 노예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갈 3,18; 골 3,11)(13)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원죄론’이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어두운 모호성을 솔직하게 인식하게 한다는 점, 그래서 인간은 용서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긍정하게 한다는 점, 도덕적 책임감을 고취시킨다는 점, 겸손과 인격적 성장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은 성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의지의 분열의 문제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의지의 쇠사슬에 의해 묶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왜곡되어 육욕(libido)이 생겼고, 육욕을 계속 따름으로 버릇이 생겼으며, 그 버릇을 저항하지 못해 필연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쇠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나를 노예의 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 … 이리하여 나의 두 의지, 즉 옛 의지와 새로운 의지, 육의 의지와 영의 의지는 내 안에서 서로 싸워 내 영혼을 찢어 놓았습니다.”(14)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한 고백을 듣는 것 같습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롬 7,19-20).

‘원죄’는 성적 욕망이 아니라, 의지의 분열, 노예가 된 의지에 의해 이리 저리 흔들리는 인간의 가능성이 아닐까요? 인간의 삶 안에 빛과 함께 있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심연이 아닐까요? 인간은 천사가 될 수도 있지만, 악마도 될 수 있는 가능성 안에서 이리 저리 흔들리는 존재임을 ‘원죄’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이란 어떤 실체가 아니고 (인간)의지의 왜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지의 왜곡이라 함은 그 의지가 최고 실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자신 안에 깊이 놓여 있는 보배를 버리고 낮은 부분으로 떨어져 밖으로 잔뜩 부풀어 있음(교만)을 말한다.”(15)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처럼 되려는 인간의 왜곡된 의지가 원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신처럼 되려는 의지야 나무랄 일이 아니지요. 문제는 의지가 왜곡되는 것입니다. 절대 권력자가 되려는 의지, 인간을 노예로 만들려는 의지, 피조세계를 약탈하려는 의지, 이것이 신처럼 되려는 인간의 왜곡된 의지이고, 이 원죄가 인류와 지구를 파괴하고 있는 현실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기독교의 명제가 참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경청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주제에 따라 길이가 차이가 있는 것 양해바라고, ‘좋아요’와 ‘구독’ 눌러주시면 힘이 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미주

(1)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1-18권》, 성염 역주 (경북 왜관: 분도출판사, 2017), 1487.
(2)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1-18권》, 1489.
(3)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1-18권》, 1491.
(4)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1-18권》, 1497.
(5)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1-18권》, 1513.
(6)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1-18권》, 1513.
(7)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1-18권》, 1513.
(8)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1-18권》, 1515.
(9)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1-18권》, 1517.
(10)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1-18권》, 1521.
(11)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1-18권》, 1523.
(12)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제11-18권》, 1525.
(13)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성한용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23), 493.
(14)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254-255.
(15)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233.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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