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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도 누구도 아닌 기다림

기사승인 2024.06.10  04: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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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평화·선교 공동체”(이사야 11:1-9, 로마서 12:1-2, 요한복음 4:23-24, 시편 85:7-13)

▲ 남북한 통일에 대한 열망만큼 그리스도인의 목적도 분명해야 한다. ⓒWikipedia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한 주간 나를 힘들게 하는 어떤 일도 겪지 않고,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다 오셨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루 동안에도 다른 사람과 상황에 의해서든, 내가 스스로 만들어내든 힘들고 괴로운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평안하게 지내다가 오셨느냐는 질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성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주신 완전한 평안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이 말씀에 따라 내 안에 평안이 주어졌음을 깨닫고, 주어진 평안을 선택함으로, 날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교단에서 정한 총회선교주일입니다. 1953년 6월 10일 우리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새역사를 시작한 날을 기점으로, 신앙의 선배들이 이루어왔던 선교의 역사를 계승하고, 이 시대의 상황에 맞추어 교단, 교회, 성도가 어떤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지를 함께 기도하고 다짐하는 뜻깊은 주일입니다.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특히 우리 교단은 변화하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새롭게 응답하며 신앙문서를 내놓았습니다. 이런 교단의 문서들은 변화하는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롭게 고백해야 하는 복음의 진리와 신앙의 정수를 밝혔던 등대였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묻고 대답하는 우리의 기도와 고백이었습니다.(1)

작년 교단 제108회 총회 때도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이전보다 더 다양하게 드러난 시대의 문제점들에 대응하기 위해 ‘제7문서’를 제안하고 채택했습니다. 채택된 ‘제7문서’에는 1)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 2) 교회의 위기와 기장성의 지속적 실천, 3) 차별 없는 사랑의 교회공동체, 4) 기후위기와 생태적 전환, 5) 과학기술의 발전과 다지털혁명, 6) 불평등의 극복과 경제정의 실현, 7) 한반도 평화를 일구어 나가는 교회, 여기에 ‘제언: 펜데믹 이후 미래세대를 위한 선교의 새 이름, 마음의 에큐메니즘’을 더하여, 총 여덟 개의 주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대에 맞추어, 말씀에 따라 이런 문서를 내놓을 수 있는 우리 교단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이런 교단의 교회이고 성도임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훌륭한 문서에 나온 내용을 우리와 같은 어촌의 작은 교회에서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에 있습니다. 우리와 먼 이야기인 것 같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기에 더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할 수 없으니, 당신들이나 하라고 뒷짐 지고 있을 수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7문서에 나온 주제들은 하나같이 위중하고 또 급하게 실천이 필요한 선교적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교적 과제를 위해 우리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는 무엇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응? 뭐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자고 하더니 하면 안 된다고 하시네?’ 하는 생각이 드셨습니까? 오늘 함께 읽은 본문들을 통해 왜 먼저는 무엇도 해서는 안 되는지, 그렇다면 선교적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사야 본문을 보면 이상적인 나라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이사야 11:6-8)

시편에도 이상적인 나라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내려 주시니, 우리의 땅은 열매를 맺는다.”(시편 85:6-8)

이사야와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이상적인 나라를 만든, 만들어 가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만들어 가십니다.

이사야에서는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셨다.’(이사야 11:2a)고 기록하면서 주님의 영이 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을 열매 맺게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이 스스로 알아서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어 간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리셨고, 주님의 영이 이새의 줄기로 하여금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어 가도록 했기 때문에(이사야 11:3-5) 이상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시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주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보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주님의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내가 듣겠습니다.”(시편 85:7-8a)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요청을 들어주신다면 이상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오늘 시편의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 주님의 성도들이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시편 85:8b)

이사야의 말씀도 시편의 말씀도 이상적인 나라의 주체는 주님의 영,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주님의 영이 내려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야 합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가운데 성도의 실천이 이루어집니다.

로마서와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에서 이야기하는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로마서 12:1)라는 바울의 권면은 내가 하면 좋을 일이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라는 요청입니다.

쉽게,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은 당연히 이것이겠지.’라는 추측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라고 추측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몸이 산 제물이 되고자 하는 자는, 전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로마서 12:2)라고 재차 권면합니다. 그런 후에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산 제물’의 삶은 나의 목적과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일 때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하기에 여기서도 주체는 성도가 아니라 결국 하나님이 되십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복음 4:23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과 진리를 ‘통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예배자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온전한 예배는 영과 진리가 주체가 되셔서 예배자가 아버지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실 때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 나눈 네 본문에서 이야기한 이상적인 나라, 온전한 예배는 사람이 뒤로 물러나고 주님의 영, 하나님이 앞으로 나올 때 가능해집니다. 성도가 주체가 될 때 이상적인 나라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고, 온전한 예배는 드려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이것이 정의이고, 이것이 옳다.’, ‘이것을 해야만 한다.’라고 먼저 판단하며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앞설 때면 많은 경우에 탈이 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라고 말하면서 ‘무리하게’ 강행함으로써 오히려 이 과정에서 불의하고 폭력적인 일을 겪게 되는 경우들이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앞서 말씀드린 권면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먼저는 무엇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주님의 영이, 하나님이 나와 우리의 뜻보다, 나의 우리의 정의보다, 나와 우리의 옳음보다 앞서가시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음성을 들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빌립처럼 어디로 가라, 누구를 만나라, 무엇을 하라(사도행전 8:26-40)는 음성과 분명한 지시를 천사나 성령에게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전 평생을 음성은 물론이거니와 환상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라는 목적과 욕망을 내려놓고 기다린다면, ‘나와 우리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상적인 나라에 대한 ‘열망’,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열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 시대의 선교적 과제를 내 삶에서 살아내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기다리면 우리가 행동해야만 하는 상황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도하여 일어나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서 내가 행동해야만 하는,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 한 가지 고백을 성도님들께 드립니다. 저는 부끄럽게도 남과북의 평화와 통일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목사였습니다. 오히려 남과북의 통일과 평화는 불가능하다고까지 생각하며 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름 남과북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일을 한다고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교회와 기관으로부터 ‘평화·통일·영성 순례’를 하고 싶다는 문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 순례를 위해 실제로 많은 교회와 기관 등이 고성을 방문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점은 제가 남과북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사역을 위해 초도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오히려 남과북의 통일과 평화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목사였습니다.

남과북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관심은 부임하고 지역을 탐방하면서 통일전망대에 놀러 갔다가 북을 바라보면서 처음 생겼습니다. 이후로 남과북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이 마음을 품고 있자 이때부터 놀라운 일들이 저에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선배, 후배, 동기 목사님들로부터 여러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한 것이라고는 ‘남과북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겠다.’라고 생각한 것과 찾아온 기회들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평화공동체운동본부 실행위원으로 들어와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통일전망대 갈 건데 가이드좀 해주라.”, “네, 알겠습니다.” / “평화기도회 할 건데 와서 말씀 좀 읽어라.”, “설교좀 해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순례를 이렇게 저렇게 해보는 게 어떻겠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묵상집 지필에 참여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총회선교주일 설교문 작성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가온 기회들, 상황들에 제가 한 것이라고는 언제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그럴듯한 ‘평화·통일·영성 순례’의 틀이 갖춰지게 되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난 것뿐이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부끄럽습니다. 얼마 전에 한 선배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평화 통일을 위하는 것처럼 흉내만 낸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 저의 상황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건, 흉내를 내고 있건 아니건 상관없이 ‘남과북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라는 마음을 통해 남과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를 계속할 수 있도록, 또 더 많은 분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의도하지 않은 여러 기회와 상황이 지금도 끊임없이 주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 뜻과 목적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잠잠히 ‘열망’을 가지고 기다리면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말씀드리기 위해 부끄러운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 안에 ‘열망’이 있으면, 그 열망에 따라 때로는 우리의 열망과 상관없이 해야 할 일과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건, 어떤 상황에 있건 상관없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어촌 마을에 살고 있음에도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할지 걱정할 이유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아니오’가 아니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리고 응답한다면 우리는 결국 제7문서에 기록된 선교적 역할들뿐만 아니라 이 땅에 이룰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한 일도 하고 있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단, 교회, 성도를 통해 일하시도록 먼저, 앞서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마음에 ‘열망’을 품고 기다리십시오. 이것이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모습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그토록 바라는 ‘생명·평화·선교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이사야의 이상적인 나라를 이루시겠다고 하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이루어 가시리라 믿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맡겨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총회선교주일인 오늘을 감사함으로 예배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결국 선교적 사명을 감당케 될 것이고, 이룰 것입니다.

미주

(1) 제7문서 내용 중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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