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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버린 만나

기사승인 2024.06.09  04:3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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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기 강해 16(출16:16-20)

▲ 「Gathering Manna」 (Dalziels’ Bible Gallery) ⓒWikimediaCommons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었다. 그랬더니, 남겨 둔 것에서는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겼다. 모세가 그들에게 몹시 화를 내었다.(출16:20)

만나 이야기를 지난주에 했습니다만 오늘 만나 이야기를 한 번 더 하려고 합니다. 지난주 이야기 기억나시죠? 백성들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원망만 하는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죠?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인간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이 전혀 다릅니다. 인간은 원망하지만, 하나님은 베푸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만나’라고 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임하는 은혜, 사람을 가리지 않는 은혜, 얼마나 착했는지 얼마나 잘 살았는지 얼마나 잘 살았는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랐는지 그런 것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심지어 악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 그게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똑같다는 말은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은 엄청난 구별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무슨 구별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앞에 내가 나 스스로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은혜를 취할 때 그 은혜는 거룩한 은혜가 되구요.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 거룩하게 구별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사로이 대하고 허투로 대하고 함부로 대하면 그건 더 이상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어떻게 다루는지, 은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자,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시험은 어려운 일로 오지 않습니다. 힘든 일, 위험한 일, 우리 마음속에 고민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으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오히려 일상적인 모습으로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상의 순간에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진심을 묻는 겁니다.

대단한 일, 엄청난 일 앞에서는 우리가 마음을 가다듬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지’ 하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사소한 일 앞에서는 슬쩍 어물쩡 지나갑니다. 바로 그때 가려놓았던 감춰 놓았던 우리의 본심이 슬쩍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그걸 보시는 겁니다. 사소한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바로 순간에 우리의 진심이 무엇이냐? 묻는 거죠. 우리는 바로 이 시험에 성공해야 합니다.

오늘 만나 이야기 두 번째 시간인데요. 오늘 말씀 중에 우리가 주목할 것은 두 가지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만나를 우리가 거두는데, 많이 거두어 봐야 한 오멜이고 적게 거두어도 한 오멜 되더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남음도 없고 부족함도 없습니다. 나에게 딱 맞는 은혜로 주신다는 겁니다.

필요한 정도는 누구마다 누구나 다르겠죠. 그런데 그걸 누가 정합니까?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다는 겁니다. ‘난 이만큼 필요해’ 하고 몽땅 거두어 봐야 정작 무게로 달아보면 한 오멜. ‘난 필요 없어’ 하고 안 가져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 이만큼 필요해’ 하고 한 오멜 채워주신다는 겁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편의 말씀이 있는데요. 시편 127편입니다.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셔 아니하시면 파수꾼에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성실해야 돼요. 열심히 살아야 돼요. 빈둥빈둥거리면서 ‘하나님이 다 채워주시겠지’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은 아름다운 신앙이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만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해 주셔야지. 내가 해 봐야 아무 소용 없어.’ 시 편의 말씀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집을 세우려고 성실하게 일하고 노력하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하나님 함께해 주신다는 이야기예요. 시편 말씀은, 우리 노력이 헛되다는 거 아닙니다. ‘너희들 아무리 열심해 해봐야 소용없다. 내가 같이 내가 안 도와주면 아무 소용없어.’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치열하게 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과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해 주셔서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성실함이, 우리의 땀이, 헛되지 않도록 해주신다는 고백입니다.

‘성실하게 살아봅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삶을 나에게 주신 삶을 아름답게 살아봅시다’ 라고 하는 그런 결단의 말씀인 거죠. 그럼 만나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많이 거둬도 한 오멜이니까 열심을 낼 필요 없다?’ 아니에요. 그런 이야기 아니에요. ‘적게 거둬도 어차피 한 오멜  채워주실 테니까 빈둥빈둥 좀 놀아도 되겠지?’ 그런 이야기 아니에요.

성경은 자기 마음대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아무 고민 없이 읽고는 ‘이렇게 쓰여졌네’ 하고 우기면 안 됩니다. 성경은, 고민하는 책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도 참 이상하잖아요? 오늘 말씀 읽으실 때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어떻게 많이 거두어도 한 오멜이고 조금 거두어도 한 오멜 일수가 있나요? 이해가 되십니까? 무작정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뭐 신기하고 대단하게 하시겠지?’ 그러고 넘어가시나요?

아닙니다. 고민해야죠. ‘왜 그럴까? 열심히 거두어도 왜 한 오멜일까? 적게 거두어도 왜 한 오멜이 채워질까?’ 우리는 이 지점에서 고민해야 돼요. 성경이 지금 우리에게 고민하라고 고민의 주제를 던져주고 있는 거예요. ‘당신들의 삶에 하나님이 은혜를 가득 채워주십니다. 만나를 가득 주십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내가 아무리 많이 가지려고 해도 요만큼이고, 싫다고 거절해도 이만큼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 삶에 성실하게 임하되, 나의 성실함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던 그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는가? 내 마음을 성찰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휘둘려서 오히려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는가? 내 마음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만나 이야기는 내 삶의 중심에 내가 중심 잡고 내가 주인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나의 중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게 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일했어요.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일했어요. 그래서 남들 한 오멜 거둘 때 나는 두 오멜, 세 오멜을 거뒀어요. 잘했잖아요? 훌륭하잖아요? 세상에서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칭찬하잖아요? 칭찬받을 일이잖아요? 그렇게 뿌듯하게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 하나님은 내 수고를 다 헛되게 만들어 버리신다는 겁니다. ‘그런거 다 소용없다. 너 열심히 일하는 줄은 알 아는데, 쓸모없는 일이었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기도해야죠. 무슨 기도를 합니까? 나의 수고가 무엇을 위한 수고였는지, 내 마음 깊은 곳을 성찰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살았는데,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노력하면서 살았는데, 과연 그 노력이 무엇을 위한 노력이었지? 나는 왜 노력했는지? 내가 왜 열심히 하고 왜 수고했는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수고했는지? 아니면 내 욕심, 내 열심에만 몰두했는지 돌아보라는 겁니다.

열심히 살았다고 칭찬받고 싶은데, 칭찬은커녕 하나님께서 내 수고를 한 오멜로 만들어 버리셨어요. 그래서 나는 억울하고 답답하고 야속하고 하나님이 미워져요. 바로 그 마음을 잘 다스리고 위로하라는 겁니다. 그 지점에서 시험 들지 말라는 겁니다. ‘재훈아. 너 하나님께 칭찬받고 싶었구나. 칭찬받으려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했어야 되잖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따로 있는데, 너 좋을 대로 네 맘대로 너 좋은 일 해놓고서 왜 칭찬받으려 그래? 이 일로 하나님을 원망할 게 아니야. 솔직해져 보자. 왜 네 멋대로 살아놓고 하나님 앞에 삐지냐?’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라는 거죠. 그게 기도입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응답이 다를 때 우리는 기도해야 돼요. 기도의 자리로 지금 하나님께서 이끌고 계신 거예요. 원망으로 시작해도 돼요. 다만 원망으로 그쳐버리면 안 돼요. 기도를 계속 붙들고 있어야 돼요. 그러면 원망으로 시작했던 마음이 회개로 이어지고, 감사로 이어집니다. 그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진짜 좋은 신앙은, 모든 일에서 우리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겁니다. 아무런 실패도 없이 완벽한 신앙이 아니라, 잘못할 때에 기도의 자리에 서는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짜 아름다운 모습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만나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은혜의 이야기는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역사하심 앞에서 기도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때 기도하는 사람이 진짜 은혜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상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만나를 다음날까지 잘 남겨 놓으면 다음날에도 싱싱하고 신선하게 만나를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벌레가 들끓고 악취가 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소중하게 보관하는 게 참 좋은 일일 텐데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앞에서 기도의 사람이 되자고 했는데, 무슨 기도를 해야 합니까?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뭡니까? ‘하나님,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은혜 받고 싶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받을까를 고민합니다. 얼마나 주실까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하고 다릅니다. ‘얼마나 줄까? 무엇을 줄까?’ 하나님은 그런 고민하시는 게 아닙니다. ‘내가 주는 것 가지고 내 아들이 내 딸이 과연 뭐 할까? 내가 베풀어 주는 은혜를 어떻게 사용할까? 무슨 아름다운 일을 할까?’ 하나님은 그 고민을 하십니다.

사업하는 사람이 투자받고 싶은데 ‘일단 투자해 보세요. 뭘 할지는 나중에 알려 줄게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나요? 아니잖아요. 사업계획서를 제대로 써 가지고 ‘이러이러한 일을 할 겁니다’ 라고 제시할 때 투자해 주잖아요. 세상에서는 그렇게 살면서 왜 하나님께는 안 그럽니까? 하나님께는 ‘나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는 내 삶의 사업계획서가 하나도 없으면서, ‘일단 주세요’ 하고 조릅니다. ‘일단 나한테 투자해 주세요. 그러면 그다음에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볼게요.’ 그러면서 원망하지요. ‘하나님, 왜 나한테 투자 안 하셔요? 왜 나한테 안 주세요?’

달란트의 비유 생각나시죠. 누구한테는 열 달란트 주고 누구한테는 한 달란트 줬어요.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항상 초점이 ‘얼마’에 가 있어요. ‘왜 얘는 10달란트 주고, 왜 얘는 한 달란트 줬을까?’ 누구에게 얼마를 줬는가를 항상 생각해요. ‘왜 나한테는 이만큼 주셨지? 왜 저 사람은 더 많은 달란트 줬지?’ 그게 우리의 고민이에요. 심지어는 이 본문을 해석하는 신학자들마저도 열 달란트와 한 달란트의 차이가 그게 뭘까를 해석하려고 고민해요. 그러면서 찾아낸 이야기가 한 달란트가 작은 것 같지만 오늘날 돈으로 환산해보면 5억 6억이나 된다면서, 한 달란트가 적은 게 아니라고 말해요. 이게 무슨 엉터리같은 말입니까?

중요한 것은 주인이 무얼 보시는가예요. 누구에게 얼마나 주었느냐가 아니라 받은 것 가지고 무얼 했느냐를 주인이 보신다는 겁니다. ‘얼마를 남겼느냐’를 보시는 게 아니라 ‘이걸로 뭘 했느냐? 어떻게 했느냐? 받은 것에 성실했느냐? 받은 것으로 감사했느냐? 받은 거에 충성했느냐?’ 주님은 그걸 보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께 ‘하나님, 나에게 왜 한 달 단란트밖에 안 줬습니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하나님이 주신 것 가지고 성실하게 사는 나의 삶의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받았는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는가? 그것만 보고 있으면, 내 눈이 거기에 꽂혀 있으면, 우리의 만나에서 악취가 나고 벌레가 들끓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보면 많이 받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 이야기의 결론은, ‘많이 가지고 있으니 나눠라’ 하는 그런 윤리 도덕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윤리 도덕적인 이야기는 성경 말고도 세상에 수없이 많습니다. 성경은 세상과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농사가 잘 되어서 밭에 소출이 많아집니다. 곡식이 넘쳐납니다. 그러니까 이 부자가 무슨 생각을 합니까? ‘지금 창고는 작으니까 헐고 더 크게 지어야지’ 합니다. 이 부자의 생각이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내가 받는 것, 내가 가지는 것, 거기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받은 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어디에 써야 할까? 나에게 들어온 이 수많은 곡식 가지고 뭐 할까?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많은 곡식 그거 다 썩어버릴 걸?.’

부자청년 이야기도 아시죠? 마태복음 19장입니다. 예수님이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하시니까 근심하고 돌아갔대요 이 청년의 문제가 뭡니까? 가진 것을 베풀기 싫어하는 건가요? 더 근본적인 문제는 앞에 나오는 20절의 말씀에 있어요.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 앞에 와서 자랑스럽게 얘기해요. ‘예수님 저는요. 이것도 잘했고, 저것도 잘했고, 다 잘했는데요. 나에게 부족한 게 뭐가 더 있을까요? 더 필요한 게 뭐가 있나요?’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종교적으로 마음적으로 심적으로 신앙적으로 무얼 더 가질 수 있는가만 고민하는 겁니다.

포도원에 일하러 온 품꾼들 이야기도 아시죠?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데요. 아침 일찍 온 사람, 점심 때쯤 온 사람, 하루 다 지나 저녁에 온 사람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더 심각해요. ‘내가 얼마나 가질까? 하나님 나에게 얼마나 주셨나?’에 몰두하다 못해 이제는 ‘다른 사람한테 얼마나 주는가? 나보다 더 많이 주는가? 나보다 조금 줘야 되는데~’ 이러고 있다는 겁니다. 내 소유에 집착하다 못해서 다른 사람의 소유에까지 간섭하는 겁니다. 이게 뭡니까?

은혜도 넘치면 독이 됩니다. 은혜 자체가 독이 되는 게 아니라, 받은 은혜를 내가 은혜로 살아내지 못하면 나에게 독이 됩니다. 은혜를 넘치도록 욕심부려 차지하려고 하는 내 마음이, 내 행동이 거룩한 은혜를 독으로 바꿔버립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는다’는 야고보서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전도서 10장의 말씀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좋은 향수가 있는데, 그 향수에서 악취가 난답니다. 왜 그럽니까? 멀쩡한 향수에서 갑자기 악취가 나는게 아닙니다. 말씀을 읽어보니까 향수 통에 파리가 빠져서 죽으면 악취가 난다는 겁니다. 향수는 뭡니까? 향기 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도 내 욕심과 내 집착이, 나의 죄가, 내 헛된 마음이 그 안에 빠져 들어가서 생명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일지라도 내 삶에서 더러운 악취 나는 똥물로 바뀌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잘못된 것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어요. 그러나 그 거룩함에 나의 더러움만 채워 넣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늘 양식 내게 내려주소서’ 우리 이렇게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아주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이 기도에 반드시 한 가지 기도를 더 추가해야 합니다. ‘내려주신 하늘 양식 가지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 나에게 일러주십시오. 이 귀한 은혜를 내가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내 생명을 내 시간을 내 마음을 이 작은 물질을 내 안에 있는 사랑을 어디다 어떻게 써야 할까요?’ 우리는 이 기도를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만나가 최종적인 은혜는 아닙니다. 만나를 보고서 사람들이 뭐라 그럽니까? ‘이게 무엇이냐?’ 무엇인지 몰라서 ‘만나’라고 불렀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놓고 보면, 우리는 그게 뭔지 모릅니다. 이게 은혜가 될지 독이 될지, 향기 나는 향수가 될지 아니면 악취 나는 쓰레기가 될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에게 거룩한 양식이 될 수도 있고, 벌레가 들끓고 악취 나는 쓰레기가 될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나를 거룩하게 성별해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임하며, 주신 은혜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까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그제야 비로소 은혜가 은혜가 됩니다.

‘이게 무엇이냐?’ 만나 앞에서 백성들이 묻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일까요? ‘이건 너희들에게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 가지고 당신들이 축복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고, 이것 가지고 저주의 길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성령강림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 곁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언제 성령으로 내 곁에 어떻게 오십니까? 원래는 저기 멀리 계시다가 이번에 특별히 우리 곁에 내려 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항상 내 곁에 계셨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절대 떠나지 않으십니다. 만나가 매일매일 온 땅에 가득한 것처럼 말이죠. 하나님은, 성령은 내 곁에 이미 강림하여 계십니다.

은혜는 특별한 사건이 아닙니다. 없던 은혜를 갑자기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충만하게 다 주셨습니다. 문제는 주신 은혜를 은혜로써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느냐?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로 와서 과연 축복이 되느냐? 아니면 벌레 끓고 악취 나는 화가 될 것이냐?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비처럼 은혜를 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은혜가 내 안에 차고 넘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 주신 그 은혜가 나의 욕심으로 인하여, 내 죄로 인하여, 내 거짓된 마음으로 인하여, 주님의 은혜를 악취 나는 것으로, 벌레가 들끓는 것으로 만들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서 과연 거룩하고 아름답게 사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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