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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속삭임

기사승인 2024.06.05  03:4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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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 계시는 하나님의 진실(예레미야 23:16-29)

역사의 격랑기에 처절한 체험과 깊은 내면적 분투를 거듭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선포는 격정적이면서 동시에 깊이가 있습니다. 본문은 거짓으로 백성을 선동하고 결국 나라를 도탄에 빠트린 거짓 예언자들을 향하여 참 예언자 예레미야가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저 심판의 선언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본문 말씀의 요지는 간결합니다. 먼저 본문 말씀은, 스스로 예언자를 자처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 것을 선포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들은 헛된 말로 백성을 속이고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멋대로 환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그 심각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입장에서 그 사태가 정상인 듯 호도하고, 나아가 자기 입장에만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이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모든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 그들을 옹호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실상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가 어떻게 대비되는지 그 판별 기준을 말하고 있는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그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서 누가 나 주의 회의에 들어와서, 나를 보았느냐? 누가 나의 말을 들었느냐? 누가 귀를 기울여 나의 말을 들었느냐?”(3:18)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표상이 등장합니다. 이른바 ‘천상회의’입니다. 하나님께서 회의를 하는 장면입니다. 참 예언자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중요한 지표 가운데 하나가 천상회의의 참여 여부입니다. 참 예언자는 천상회의에 참여한 반면 거짓 예언자는 참여한 적이 없습니다. 이 천상회의는, 오늘 우리들의 관념으로 보면 낯선 고대 종교의 표상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데서,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를 아는 데서 아주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 회의를 열고 토론하는 장면을 상상해 본 적 있습니까? 우리의 통념 가운데는 그런 모습이 잘 연상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릴 때, 그저 위엄을 가진 존재로서 언제나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존재로만 연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 역시 그 앞에 그저 머리를 조아리고 응답하는 모습으로만 연상합니다. 그런데 그런 통념과 달리 성서는 하나님께서 회의를 주재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모습은 매우 중요한 진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통하는 하나님의 본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소통, 곧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에 있습니다. 그저 명령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그 소통의 과정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정확히 말해 대변인을 뜻하는데, 그 대변인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 그 뜻을 확인하고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명령을 따라 전달하는 경우와 스스로 합의의 과정에 참여하고 따라서 그 취지를 분명히 알고 전달할 때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진정한 예언자는 깊은 성찰 가운데서 진정으로 하나님과 소통한 결과로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평범한 사람들은 그것을 알기 쉽지 않습니다. 그 역시 주관적 체험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그 체험을 겪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알 길이 묘연합니다. 거짓 예언자나 참 예언자나 모두 주관적 체험에 의존하고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을지 묘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별할 길이 전혀 없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스스로 고백합니다. “내 심장이 내 속에서 터지고,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처럼 되고, 포도주에 곯아떨어진 사람처럼 되었으니, 이것은 주님 때문이요, 그의 거룩한 말씀 때문이다”(23:9). 여기서 “내 심장이 내 속에서 터지고, 내 모든 뼈가 떨리며...”를 어떤 번역(국제성서주석, J. Bright)은 이렇게 번역하기도 합니다. “내 이성이 내 속에서 동요하며 뼈들은 모두 꺾인다.”

내 이성이 무너지는 거룩한 체험입니다. 그간 스스로 상식이라 여겨왔던 것, 합리적이라 여겨왔던 것이 무너지는 체험입니다. 그 체험을 하고 나서 전하는 말씀은 어떤 것일까요? 깊은 성찰 끝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저 아전인수격의 주장이 아니라 자신에게 불편할지언정 모두에게 구원의 빛을 주는 말씀입니다.

거짓 예언자에게는 그 성찰의 과정이 없습니다. “누가 나 주의 회의에 들어와서, 나를 보았느냐? 누가 나의 말을 들었느냐? 누가 귀를 기울여 나의 말을 들었느냐?”(23:18) 이 말씀은 성찰을 동반하지 않은 거짓 예언자들이 자기의 욕망을 그저 쏟아내는 말, 그것이 마치 진실인 양 내뱉는 막말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제 고집대로만 말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다음 이어지는 말씀들은 더욱 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거짓 예언자들에게 분노를 폭풍처럼 터뜨린다고 하셨습니다. 최후 순간에 두고 보라고 엄포까지 놓으십니다(23:19~20). 이들은 당신의 뜻을 전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당신의 뜻을 전한다고 행세하는 것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 Antonie Wierix, 「Jeremiah with a yoke on his neck in the background Hananiah breaks Jeremiah’s yoke」 ⓒRijksmuseum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가까운 곳의 하나님이며, 먼 곳의 하나님은 아닌 줄 아느냐?”(23:23) 이 말씀은 거짓 예언자들의 행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왕궁과 성전 가까이에서 항상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곧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규례에 따라 종교적 의례에서도 엄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따라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희들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너희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 가까이 계시기도 하고 멀리 계시기도 하는 하나님이라는 고백도 있지만(이사 57:15), 이 문맥에서는 ‘가까이 있다고 착각 말라. 나는 너희들과 멀리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너희들은 큰 오산을 하고 있다.’ 하는 뜻입니다. ‘너희의 국가관만 옳은 줄 아느냐? 너희의 사상만 옳은 줄 아느냐? 내가 보기에 너희들이 옳다고 믿는 그것이 오히려 잘못되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에게는 하나의 사상적 기반이 있으며, 그들의 행태는 어떤 전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상이 바알을 섬기며 내 이름을 잊었듯이, 서로 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잊어버리도록 계략을 꾸미고 있다”(23:27).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다면서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는 둥 하는 주장을 펼친다고 했습니다(23:25). 이것은 자기가 욕망하는 세계를 그대로 진실로, 현실로 착각하는 이들의 특성을 말해줍니다.

그들의 그러한 환상적 믿음은 골수까지 뿌리박은 바알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됩니다. 바알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풍요의 신입니다. 그에 대한 숭배는 물질적 풍요를 절대적 가치로 아는 믿음을 뜻합니다. 경제성장제일주의를 말합니다. 반면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보이는 그 물질적 조건을 넘어서 인간사회에 정의를 이루고 평화를 이루어 모두가 자유롭게 사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바알 신앙을 일관되게 배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물질적 풍요를 전부로 아는 세계에 대한 거부를 뜻하는 것입니다. 성서의 아주 집요한 대결 의식입니다.

누가 물질적 풍요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서의 믿음은 물질적 풍요 그 자체가 최고의 목적이 될 때 인간은 물질의 우상에 종노릇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인간의 구원이 궁극적 목적이 될 때, 물질적 풍요는 상대화될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더욱 확대된다는 것이 성서의 믿음입니다. 그것은 물질적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적 삶이 진정으로 풍요롭고 아름답게 될 수 있는 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깃들 때 그 물질적 삶은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바알 숭배자들은 그 진실을 망각한 이들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그 믿음에 바탕을 둔 자신들의 욕망을 아무런 여과 없이 공적으로 선포하는 이들입니다. 그 말의 신빙성을 꿈을 빌러 마치 계시를 받은 듯이 치장하며 자신들의 욕망으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 거짓 예언에 현혹되지 말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마주하여 내 통념이 무너지는 뼈아픈 경험을 하는 가운데 도달한 하나님의 진실을 추구하라는 것이며, 그 성찰에 근거한 말씀에 귀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지금 어떤 사태를 두고 말하고 있는지 우리는 직감적으로 압니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현상을 교회와 사회 가운데서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강단에서 너무나 빈번히 목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일시되는 현상, 고도의 합리성과 높은 공공성의 기준을 따라야 할 국정이 주술과 불통의 우격다짐으로 범벅되고 있는 현상입니다.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사람들을 미혹하는 현상입니다.

우리의 입과 우리의 귀가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생생한 그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너무 생생하게 체험하고 목격하고 있는 현상을 애써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오늘 말씀을 마주하면서 오늘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진실로 겸허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자 애쓰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언자가 경험하였듯이 심장이 터지는 듯하고 뼈가 떨리는 듯한 극적인 경험은 결코 예사로운 일은 아닙니다. 모두가 그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서가 증언하듯,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알 수 있는 매우 다양한 길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성서의 주인공들은 저마다 다양한 체험 가운데 그 뜻을 알고 깨닫습니다. 자연과의 소통 가운데서, 사람과의 소통 가운데서, 마침내는 하나님과의 소통 가운데서 진실을 깨닫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욕망에 사로잡혀 드넓은 세계를 보지 못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마저 좁은 내 세계에 가둬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이 땅 모든 사람과 생명 가운데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진실을 늘 기억하며, 그 뜻을 이루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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